“우리의 적은 달래내 고개다, 무조건 길을 뚫어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327. 경부고속도로와 대한민국 - 달래내 고개 비석 이야기
* 유튜브 https://youtu.be/BNLfsZvoEt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달래내고개에 서 있는 작은 비석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달래내고개 옛길 고개마루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 주인 이름은 한기영이다. 비석 주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달래내로343이다. 제1201건설공병단 소속 사병 한기영은 1968년 3월 23일 이곳 달래내고개에서 죽었다. 비석 몸통과 아래 석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고 병장 한기영 순직비.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목숨 바친 공병의 얼 고속도로와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 1968년 3월 23일 순직’
순직 당시 상병이었던 한기영은 병장으로 추서되고 지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묘역 비석에는 생전 계급 상병으로 표시돼 있다. 이 글은 한기영에게 바치는 글이며 그와 대한국인 모두가 만든 나라에 바치는 글이다.
한강의 기적? 500년 만의 기적!
1967년 한국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42달러였고 수출은 3억2000만달러였다. 그해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과 가리봉동에 구로공단이 들어섰다. 청계천에서 쫓겨난 철거민 판자촌과 야산, 미8군 탄약창고 터에 만든 이 공단에서 사람들은 섬유와 봉제, OEM으로 계약한 전기, 전자제품과 가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71년 대한민국 수출액은 10억6만7000 달러로 치솟았다.(한국무역협회 통계)
숫자를 수직 상승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도로가 있다. 공단에서 생산한 물건을 항구까지 운반하는 물류 기반이 도로다. 한반도에, 유사 이래 처음으로, 상공업을 위한 도로가 그때 생겨났다. 바로 경부고속도로다. 사람들은 식민 시대와 전흔을 싹 지워버린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기적은 500년의 기적이다. 500년 동안 조선 왕조가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져 방치하고 억압했던 상업과 공업을 대한국인들이 부활시킨 것이다. 그 드라마 주인공이 바로 ‘길’이다.
조선의 길, 폭 1m
조선은 법이 완비된 국가였다. 수도 한성은 물론 한성 외곽과 지방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설치와 유지, 보수에 관해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예컨대 한성 내부도로 폭은 대로(大路) 56척, 중로 16척, 소로 11척으로 닦도록 규정했다. 정해진 거리마다 이정표(堠·후)를 세워 거리와 지명을 표시하도록 규정했다.(‘경국대전’, 공전, 교로(橋路)) 그리고 고려시대까지 형성돼 있던 길들을 정비해 한성에 이르는 9개 도로망을 구축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현대 도로원표에 해당하는 거리 시작점을 창덕궁 돈화문으로 잡았다.
법규상으로는 세련되고 완비된 도로망이지만 실제는 매우 많이 달랐다. 한성에서 가장 넓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는 56척(17m)이라야 하지만 육조거리를 발굴한 결과 그 폭은 자그마치 50m가 넘었다.(이용욱, ‘고려~조선시대의 도로 및 수레 연구’, 한국상고사학보 116권, 한국상고사학회, 2022)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외방도로라 불리는 지방도도 마찬가지였다. 명확한 규정이 있었지만 현장 지형지물에 따라 그 폭이 들쑥날쑥이었다. 영조 때 학자 유형원에 따르면 지방도는 큰길은 12보(步)요 가장 좁은 소로(小路)는 폭이 6보였다.(유형원, ‘반계수록’ 25, 속편上, 도로교량) 그런데 지켜지지 않았다. 예컨대 영남대로에서 가장 좁은 문경새재 남쪽 토끼비리는 폭이 1m가 되지 않은 낭떠러지길이었다. 영남대로가 한성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고개 또한 1m가 되지 않았고 경사도 급했다.(‘한국도로사’, 한국도로공사, 1981, p129)
수레는 고사하고 사람도 비켜가기 힘든 길이 ‘대로(大路)’를 막은 것이다. 토끼비리는 그 협소한 폭으로 말미암아 ‘견훤을 피해 달아나던 왕건을 토끼가 안내했던 길’이라는 전설까지 붙어 있다. 그런 길마저 주용도는 정치, 군사적 기능에 있었을 뿐 민간 상업이나 여행 따위는 조선왕조 도로 쓰임이 아니었다.(최영준, ‘조선시대의 영남로 연구’, 지리학 10권2호, 대한지리학회, 1975)
세종이 없앴던 달래내 고개
사람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던, 한성 남쪽 마지막 고갯길이 바로 맨 처음 말한 한기영 병장 순직비가 서 있는 달래내 고개다. 그런데 그나마 그 좁아터진 고개 또한 한때 풍수론자에 의해 흙과 바위로 메꿔져 사라질 뻔했다. 세종 때다.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태종릉 헌릉이 달래내고개 때문에 기가 눌린다고 하자 세종이 논의 끝에 이를 승인하고 달래내고개를 폐쇄한 것이다.(1430년 음7월 7일, 1438년 음4월 15일 ‘세종실록’) 우여곡절 끝에 26년 뒤 세조 때 다시 통행이 허용되긴 했지만 영남대로는 불구로 반세기를 견뎌야 했다.
쓸데없는 상공업과 쓸데없는 수레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하여 이익된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을 제거한다(務本抑末 興利除害·무본억말 흥리제해).” 이렇게 인간의 탐욕을 유도하는 상공업을 억제하라고 명을 내린 사람은 정조다.(1783년 음1월 1일 ‘정조실록’) 더 한 지도자도 있었다. 성종 때는 전라관찰사 보고에 따라 ‘매월 두 차례 열리는 장(場)을 열어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르는(捨本逐末·사본축말) 행위’를 금지했다.(1472년 음7월 27일 성종실록) 중종 때는 ‘상업은 도둑질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금해야 한다’고 영의정 정광필이 보고했다.(1518년 음5월 28일 중종실록)
상업이 이토록 억제되니 상업을 팔도로 실어 나를 도로와 수레는 필요가 없었다. 산세가 험하다는 사실도 도로 건설을 후순위에 두는 데 좋은 핑계였다. 세종 때 명정승 황희가 이렇게 세종에게 답한다. “수레가 운반하는 데는 편리하나 길이 험하면 쓸 수 없고 바닷가 모랫길에서 또한 쓰기가 어렵다. 기껏 수레를 만들어봤자 다 쓸모가 없게 되니 왜 만드는가.”(1435년 음4월 11일 ‘세종실록’)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
1644년 인조 때 실용적 관료 김육이 209년 전 명정승 황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길이 험해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나, 수레가 왕성한 중국이라고 어찌 길이 다 평탄하겠는가. 평안도에도 없는 험준한 재들을 물품을 싣고 넘나든다. 어찌 수레를 사용하지 못할 리가.”(1644년 음9월 1일 ‘인조실록’) 대사성 김육이 올린 상소는 먹히지 않았다.
1783년 정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북학파(北學派) 태두 박지원이 똑같은 논의를 했다. 이러했다. ‘중국에도 위태한 고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니.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랴.’(박지원, ‘열하일기’, 일신수필, 거제(車制))
박지원 제자 박제가 또한 정조에게 ‘북학의’라는 책까지 지어올리며 도로를 만들고 수레를 제작하자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개화파 박영효가 한성판윤으로 있던 1882년 “도로를 닦고 오물을 없애자”는 동료 김옥균의 ‘치도약론’에 따라 도로 정비를 했지만 수구파의 견제로 박영효는 석 달 만에 광주 유수로 좌천되고 도로 사업은 오물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가 성(城)을 허물고 길을 택했을 때 조선은 끝까지 성에 안주했다.
1968년 1월 25일 길이 열리다
식민지가 되고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졌고 전흔(戰痕)이 깊게 남았다. 그리고 길이 생겼다. 1968년 1월 25일 서울~수원을 잇는 경수고속도로 달래내 구간 3㎞ 공사가 시작됐다. 투입된 인력에는 육군 제1201건설공병단 220대대도 포함됐다. 1중대장 대위 노부웅이 선언했다. “우리의 적은 저 달래내 고개다.”(‘땀과 눈물의 대서사시-고속도로 건설 비화’, 한국도로공사, 1980, p92)
얼어붙은 논밭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평토화했다. 서낭당 우주목으로 마을 주민들이 숭배하던 노거수 한 그루도 고사를 지내고 밑동에 도화선을 감아 폭파했다. 며칠 뒤 불도저 한 대가 후진 도중 전복했다. 사람들은 신목의 저주라고 수군댔다. 위 회고록에는 없지만, 바로 이 사고에 상병 한기영이 순직한 듯하다. 한기영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달래내 고개 마루 작은 비석이 더 눈에 박힌다.
충북 영동 당재터널은 사고가 난무한 최악, 최후의 구간이었다. 걸핏하면 천장이 무너지고 바위가 굴러 사람이 죽었다. 당재터널은 개통일로 예정됐던 1970년 7월 7일을 열흘 앞두고야 겨우 완공됐다.
전쟁을 벌이듯, 500년 동안 동맥경화를 앓던 한반도에 그렇게 길을 뚫었다. 정부도 미쳤고 시공사 현대건설도 미쳤고 투입된 모든 인력이 다 미친듯이 만든 미친 고속도로였다. 350년 전 대사성 김육, 그리고 200년 전 북학파 박지원이 꿨던 꿈이 그제야 이뤄졌다. 수레가 다녀야 하니까 길을 뚫었고 길을 뚫으니 더 많은 수레가 부(富)를 싣고 달리지 않는가. 대한민국이 바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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