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복위 운동 벌어진 죽계천에는 핏물이 흘렀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325. 순흥 피끝마을과 금성대군 신단
* 유튜브 https://youtu.be/8uFoUVqsWWE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된 조카와 권력자 삼촌 수양
문종이 죽고 왕이 된 어린 단종이 종친을 불러 모았다. 즉위하고 다섯 달이 지난 1452년 음력 윤9월 2일이다. 할아버지 효령대군은 물론 수양대군 이유 이하 모든 삼촌들이 집합했다. 수양 아래 동생 안평대군 이용은 불참했다. 단종은 삼촌들에게 표범가죽 방석 아닷개[豹皮阿多叱介·표피아닷개]를 일일이 선물했다. 모인 삼촌은 모두 15명이었다. 이제는 조카로 하대하지 못하게 된 왕을 알현한 뒤 삼촌 수양이 이리 말했다. “내 오늘 한 말씀 아뢰고자 했으나 성상께서 말을 하지 않으셔서 감히 못하였다. 훗날 반드시 아뢰겠다.”(1452년 윤9월 2일 ‘단종실록’)
이들 조카와 삼촌들은 이미 할아버지 세종 생전에 모인 적이 있었다. 1442년 세종이 팔도에 흩어져 있던 자기 아들들 태실(胎室)을 경상도 성주에 모아 집단 태실을 조성했다. 문종을 제외한 둘째 수양부터 손자 단종까지 직계 왕손 19명 태항아리를 모아서 성주 태봉에 묻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년 뒤 왕이 된 그 손자가 삼촌들을 궁궐로 부른 것이다. 회합에 불참했던 안평대군은 이듬해 10월 18일 역모 혐의로 조카가 내린 사약을 먹고 죽었다. 열두 살 먹은 조카 단종은 거듭 거부했지만 이미 8일 전 수양이 주도해 권력을 잡은 계유정난 쿠데타 세력 기세는 꺾지 못했다. 이틀 전 “지친(至親)에게 사사(賜死)할 수는 없다”고 울면서 반대했던 안평대군 형 수양대군은 “개인적으로는 죽일 수 없지만 공론을 저지하지는 않겠다”라며 ‘점잖게’ 사약을 방조했다.(1453년 10월 16일, 18일 ‘단종실록’)
이후 쿠데타 여진 속에 좁은 조선 땅이 몇 번씩 뒤집어졌다. 1455년 여름 수양이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 바로 그날 동생 금성대군 이유는 경기도 삭녕(현 연천~철원 일대)으로 유배당했다. 시작이었다.(1455년 윤6월 11일 ‘세조실록’)
수양의 권력 찬탈, 금성의 유배
안평대군에게 씐 혐의는 역모였다. 단종을 끄집어 내리고 본인이 왕이 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였다. 훗날 사육신으로 추앙받는 집현전 소장 학자들도 안평대군 처리에 관해서는 수양대군과 같은 편이었다. 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반수양대군파가 속속, 은밀히 세를 규합해나갔다. 그 핵심에 금성대군이 있었다.
단종 등극 3년째인 1455년 금성대군 집에서 몇몇 인사가 활쏘기를 하면서 잔치를 벌였다는 제보가 입수됐다. 이들을 처리해 달라는 수양대군파 관료들 요구에 단종은 ‘그대로 따랐다[從之·종지]’.(1455년 2월 27일 ‘단종실록’) 금성대군은 관직을 내놓고 유배당했다. 며칠 뒤 누명은 풀리고 금성대군은 관직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또 며칠 뒤 쿠데타 세력은 금성대군이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같은 해 3월 21일 ‘단종실록’)
넉 달 뒤 어전회의에서 수양대군이 이렇게 선언했다.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따위를 유배 보내야 한다.” 셋은 모두 자기 아우들이다. 이 꼴을 보고 있던 조카 단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나이가 어리니 간사한 무리들이 발동하는구나.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한다.” ‘대임(大任)’은 왕위다. 그리고 어전회의에 참석해 있는 삼촌 수양대군이 바로 그 ‘영의정’이다.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삼촌을 물리치고 단종은 마침 와 있던 명나라 사신에게 이를 전격 통보했다. 수양이 그날로 왕이 되었다. 삭령에 유배됐던 금성대군은 이듬해 한성에서 떨어진 순흥으로 재유배됐다.(1455년 윤6월 11일, 1456년 6월 27일 ‘세조실록’)
모반, 그리고 피바다
1456년 반수양대군으로 돌아선 집현전 학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됐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던 김질이 고자질해서 실패로 돌아간 일이었다. 금성대군은 한성에서 떨어진 순흥으로 재유배됐다.(1456년 6월 27일 ‘세조실록’) 사육신 사건은 엄청난 피바람 속에 마무리됐다. 1년 뒤 이동이라는 안동 관노가 한성까지 올라와 이렇게 밀고했다. “이유가 순흥에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해 불의한 짓을 도모한다.”(1457년 6월 27일 ‘세조실록’)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 유생들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거병해 다시 조카 복위를 모의 중이라는 것이다.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순흥부사 이보흠도 정식으로 금성대군 모반을 보고했는데, 알고 보니 이보흠 또한 가담한 대규모 역모였다. 그해 10월 합동수사본부에 세조가 물었다. “누가 괴수인가.” “예전이라면 노산군인데, 지금은 금성대군 이유입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죽이소서.”(1457년 10월 21일 ‘세조실록’)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실록에 따르면 영월에 유배됐던 단종은 사약을 받으면서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목매 자살했다.(같은 날 ‘세조실록’)
1457년 7월 복위 운동이 제압됐다. 7월 16일 세조는 대사헌 김순을 순흥으로 내려보냈다. 명분은 “큰 옥사를 멀리서 지시할 수 없다”였다. 이미 세조는 7월 10일 ‘칼을 채워 설득하다가 안동으로 옮겨서 계속 수사하라’고 김순에게 지시해 놓은 터였다.(같은 해 7월 10일, 16일 ‘세조실록’) 열흘 뒤 실록에는 ‘대사헌 김순이 금성대군 옥사를 처리하고 안동에서 돌아왔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그런데 순흥에서는 그 한 달 남짓한 수사 과정을 ‘참극’으로 기억한다. 1822년 이황 후손 이야순이 쓴 ‘태평서당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순흥 일대 65가구 혼령을 위로해 제사를 지냈다’.(이야순, ‘태평서당기’) 그러니까 수백 명이 수사 과정에서 실록이 기록하지 않은 고문과 비공식적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박찬수,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순흥 의거’, 민족문화 34권, 한국고전번역원, 2010) 결국 공식 사료에는 은폐됐거나 기록되지 않은 참극이 모반의 땅 순흥에서 벌어졌다는 뜻이고, 순흥 사람들은 이를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부른다.
핏물이 멈춘 피끝마을
그 참극을 상징하는 곳이 있다. ‘피끝마을’이다.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순흥에 죽계천이 흐른다. 정축년 수사 과정에서 최소 65가구 수백 명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 넘게 흘렀다. 핏물이 정화되고 다시 개울물이 맑게 변한 지점에 있는 우음리(雨陰里) 마을은 이후 지금까지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핏물이 멈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1711년 피끝마을 뒷산 미궐봉에 고씨 성을 가진 무녀(巫女)가 성황당을 짓고 당제를 올렸다. 정축지변 때 희생된 사람들 혼을 달래는 제사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성황당에 당제를 지낸다.
피끝마을 남쪽에 합도마을이 있다. 조개 합[蛤]자를 쓴다.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 형세가 조개처럼 보인다. 이곳 또한 계유정난에 즈음해 뜻있는 사람들이 낙향한 마을이다. 그런데 도로 건너 논 한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작은 둔덕이 있다. 사람들은 이 둔덕을 ‘조개섬’이라고 부른다. ‘조것도 섬이냐’하는 ‘조게 섬’의 변형이다.
권력자의 뒤끝
1458년 예조에서 세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성주에 있는 태봉에 주상과 여타 동생, 특히 난신(亂臣) 이유 태실이 섞여 있으니 이들을 옮기고 이유와 노산군(단종)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1458년 7월 8일 ‘세조실록’) 세조는 즉시 보고에 응했다. 그리하여 금성대군 태항아리는 파괴돼 사라지고, 단종 태항아리는 텅 비게 되었다. 일찌감치 제거됐던 안평대군 태항아리, 금성대군 편을 들었던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태항아리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예조에서 “주상 태실을 다른 장소로 옮기게 하소서”라고 권했다. 세조는 “형제가 태를 같이하였다”며 반대했다. 예조는 이에 따라 태실 앞에 귀부를 세우고 비석에 이렇게 새겨넣었다.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나네.’(1462년 9월 14일 ‘세조실록’)
수사가 마무리된 직후 순흥은 풍기군 밑으로 들어가고 도호부 이름을 빼앗겼다. 창고와 관사는 파괴됐다.(1457년 8월 2일 ‘세조실록’) 숙종 때 순흥부가 다시 설치됐지만(1682년 1월 13일 ‘숙종실록’) 지금도 순흥은 영주시 순흥면이다. 금성대군은 숙종 때인 1698년 복권됐다. 1742년 영조 때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자리에 제단이 정식으로 설치됐다. 그게 지금 있는 금성대군 신단이다. 담대했고, 허망했고, 살벌했던 15세기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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