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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평민 따로 없다” 못다 핀 정여립의 평등세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0. 28. 15:17

“양반·평민 따로 없다” 못다 핀 정여립의 평등세상

중앙일보

입력 2022.10.28 00:34

업데이트 2022.10.28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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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군 죽도

김정탁 노장사상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사람이 많이 죽은 것으로 보면 단연 기축옥사(1589)이다. 기축옥사는 선조 때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했다는 상소로 촉발되었는데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모반을 도모했는지 불투명하다. 정여립이 전제 왕정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정여립은 진술할 기회도 없이 체포되자마자 죽었고, 그가 쓴 글과 서신은 모두 불태워져 이런 의혹이 더욱 증폭되었다.

기축옥사, 조선 최대의 정치 참사

 

기축옥사는 다른 옥사와 달리 2년씩이나 길게 끌어 죽은 사람이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른다. 옥사로 죽은 선비는 10여 명에 지나지 않고 유배된 선비는 3명에 불과했어도 고문으로 죽은 사람이 속출했을 정도로 조사과정이 끔찍했다.

대동사회 꿈꾸다 역적으로 몰려
동서갈등 깊어지며 피바람 불어

“왕도란 백성 섬기는 것” 급진사상“조선의 크롬웰” 재평가 뒤따라야

일본의 조선 침략도 일찍이 예언역사의 그곳엔 아무 흔적도 없어

금강 물줄기가 천반산 자락을 원으로 그리면서 흘러 한반도 모양을 이루었다. 전북 진안군 천반산은 수직 융기로 해발 650m의 산이 되었다. 오른쪽에 있는 산이 죽도다. 산죽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관군과 대항하다 죽었다.

 

기축옥사 후 전주 명문가 출신인 정여립의 흔적은 고향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의 부모와 형제, 자식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그의 집은 파헤쳐져 연못이 되었다. 또 조부 이상의 무덤은 전주에서 모조리 파내져 이장되었고, 집안사람들은 멀고 가깝고 관계없이 내쫓겨져 딴 고을로 이사 가야 했다.

 

그런데 정여립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달라지고 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정여립을 프랑스 계몽주의자 루소에 비유하고, 정치학자 신복룡은 영국 공화정을 처음 연 크롬웰에 비교한다. 이들은 어째서 정여립을 높이 평가할까. 세상이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바뀌어서다. 그러니 정여립이 조선에서 역적으로 몰렸어도 지금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정여립이 군사훈련을 하던 천반산과 그 옆을 흐르는 구량천. 구량천은 금강의 지류다.

 

정여립은 40살이 되기 전 한양의 벼슬살이를 정리하고, 전북 진안에 죽도서실을 연 뒤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은 『예기』에서 공자가 한 말로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명정대해진다”에서 비롯된다. 대동사회는 유학이 이상으로 그리는 사회인데, 그의 대동계는 보통의 대동계와 또 달랐다. 양반과 평민을 구별하지 않아 구성원 중에는 천민·노비·승려도 있었고, 매달 보름에는 활쏘기 연습까지 했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2년 전에 왜구가 고흥 손죽도에 침입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동원해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대동계는 국가권력에 의해 사실상 승인된 셈이다.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 바꿔

죽도에 들어선 별장. [사진 김정탁]

그런데도 기축옥사가 어째서 조선 최고의 정치적 참사로 기록되었을까. 먼저 정여립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여립은 ‘천하가 공물인데 주인이 어찌 따로 있는가?’ ‘왕도란 백성을 섬기는 게 아닌가’라는 급진적 생각을 가슴으로만 품지 않고 계원들에게 공공연히 밝혔다. 지금 기준으론 평범한 생각이어도 전제왕조 입장에선 위험한 발상이었다.

정여립

 

또 정여립은 서인에 의해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율곡 이이의 지원으로 누구나 바라는 홍문관 수찬에 올랐는데 율곡이 죽자마자 경연에서 율곡을 비판한 뒤 서인을 배신하고 동인으로 당적을 바꿨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인물로 여겼고, 서인도 그를 벼렸다.

죽도에 들어선 펜션. [사진 김정탁]

 

다음으론 기축옥사 위관을 맡았던 정철에게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철은 정여립 사건이 나자 이 기회에 동인 세력을 뿌리 뽑으려 했다. 정철은 당시 호남을 대표하는 유자(儒子) 지위를 놓고 동인의 실력자 이발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했다. 이발 가문은 9대조부터 이발에 이르기까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호남 최고의 명문가였다. 그러니 이발의 눈에 왕실 후궁 집안을 배경으로 한 정철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정철이 서인의 숨은 실력자 송익필의 하수인처럼 행동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한편 정철은 율곡에게 이발과 벗하면 농락당할 거라며 그에게 극도의 정치적 불신을 보였다.

 

정철의 거짓 상소, 역모로 비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대동계원의 활약을 다룬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중앙포토]

 

정철은 결국 담양 출신 생원 양천회를 꼬드겨 거짓 상소를 올리게 한 뒤 역모 사건을 키웠다. 먼저 정여립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이발 집안을 박살 냈다. 이발의 모친 윤씨는 82세 고령인데도 곤장을 맞고 죽었다. 그녀는 윤선도의 할아버지인 윤의중의 여동생인데, 윤의중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데다 호남 최고의 부자였다.

 

또 이발의 아들은 10살인데 혹형으로 죽었다. 그의 조카 대부분도 고문으로 죽었다. 지리산 밑에 은둔하면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최영경도 역모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가상 인물 길삼봉으로 몰아서 죽였고, 호남의 대표적 지성이었던 정개청도 죽였다.

정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철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기축옥사가 진행되었다. 선조가 상황을 미리부터 장악해서다. 선조는 정여립 사건의 위관으로 동인 정언신을 파직하고 서인 정철을 임명했는데 이는 서인에게 정치보복을 하라는 공식허가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기축옥사가 확대된 또 다른 이유를 선조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선조는 자신의 왕위 계승에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씻기 위해 정여립 사건을 적절히 활용했다. 그래서였는지 정여립이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자 선조는 전라도 내 모든 산을 태워서라도 그를 죽여야 한다는 극단적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정철은 음흉한 선조에 의해 순진하게 이용당한 면이 있다. 그렇다면 기축옥사의 보이지 않은 손은 선조이고, 정철은 하수인에 불과한 셈이다. 선조는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던 정여립을 죽인 뒤 기축옥사를 확대해 많은 선비를 희생시켰다. 그 결과 당쟁의 골이 깊어져 사대부의 힘은 무력화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선조, 마키아벨리의 얼굴

 

여기서 선조의 마키아벨리적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실 선조는 처음에는 율곡을 통해 서인을 편들었는데 율곡이 죽고 나선 동인 이산해를 이조판서에 임명해 동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동인을 버리고 서인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섰는데 기축옥사가 계기가 되었다.

 

이윽고 선조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라도 유생 정암수가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이산해와 유성룡도 정여립과 관련 있다고 주장해서다. 선조는 더 이상의 확대를 원치 않아 이 상소를 뭉갰다. 그래서 이들은 동인이었음에도 기축옥사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선조도 통제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끈 사람은 누구였을까. ‘조선의 숨은 왕’이라 불리는 송익필이다. 그는 정철이 기축옥사 위관 자리에 나아가는 걸 주저했을 때 그를 부추겼다. 또 정여립이 죽도에 머물렀을 때 여기서 멀지 않은 운장산에 숨어 살았다. 참고로 운장은 송익필의 자이다. 또 운장산 옆에는 구봉산이 있는데 구봉은 송익필의 호이다. 그러니 송익필은 정여립 행적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송익필은 어째서 이런 엄청난 사건을 기획하고 통제했을까. 동인에 의해 불우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동인, 특히 이발이 송익필의 어두운 과거사를 폭로하는 데 앞장서면서 송익필 일가 70여 명은 안당 집안의 가노로 신분이 별안간 바뀌었다.

 

이때 판결사가 정윤희였는데 정윤희 아우의 현손이 정약용이다. 문제는 정윤희가 이발을 찾아가 판결사를 자청했기에 정약용에 대한 서인의 악감정이 여기서 생겨났다. 그러니 정여립 사건은 송익필에겐 개인적 복수를 위해, 정철에겐 정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선조에겐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각각 이용되어서 겉잡을 수없이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이 남긴 뼈아픈 교훈

 

기축옥사가 끝난 지 2년도 채 안 돼 정여립의 예언대로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이것이 임진왜란인데 정치적 파국이 국가적 파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여립이 추구한 대동사회였다면 왜의 침략도 쉽게 격퇴했을 거다. 백성과 양반이 하나가 되어 왜군을 상대로 싸웠을 거라 보이기 때문이다. 한양이 쉽게 뚫려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가야 했던 건 조선 백성이 왜군 앞잡이가 된 게 작지 않은 이유이다. 이는 대동사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불행히도 대동사회를 꿈꾸던 진안 죽도에는 정여립에 대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 별장 같은 집들만 들어서 있어 잔뜩 기대하고 찾아간 필자가 크게 실망했다. 조선 왕조가 정여립을 버렸다고 지금 세상도 그를 버려서야 되겠는가.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