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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마니또이자 견인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4. 19. 11:41

시인들의 마니또이자 견인차

 

– 나호열 시인-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시작되고 다음날인 1월 2일 나는 나호열 시인 화를 드렸다. 금년에 칠순을 맞이하는 나호열 시인의 문학을 평소에 동경해왔고, 그의 맑고 정의로운 문학세계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었는데, 요즘은 우연하게도 페이스북을 통하여 나호열 시인과 자주 소통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그를 2022년 상반기호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에 모시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난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은 나호열 시인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리하여 나호열 시인은 새해가 되자마자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우리 스토리문학을 선택해주었고, 1월 4일 첫 출근 날 일찍 스토리문학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우리 일행은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취재를 하였다. 그리고 점심을 서오릉 근처 한 한정십집에서 먹고 오랜만에 서오릉을 걸으며 녹음 취재를 진행했다.

 

나호열 시인은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282번지가 본적이만 나호열 시인은 아버지 나상순(羅相舜, 작고) 선생과 어머니 김옥희 여사(김해김씨, 작고) 사이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났다. 두 분 다 은행에 근무하셨는데 은행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나호열 시인은 기억하고 있다.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는 나주 나씨(羅州 羅氏)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나주 나씨 시조는 중국 송나라 예장(豫章) 사람 나부(羅富)이며 송나라가 위급해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이 멸망하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다. 중시조는 고려 말 무장 나세 장군으로 2만5천의 왜구가 금강 하구로 침입하자 부원수 최무선 장군과 함께 왜구를 격멸한 진포대첩의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 졌으며 충남 서천을 세거지로 삼았다. 그곳에는 나호열 시인이 나고 자란 본가도, 선산도 그대로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옛 장항제련소 굴뚝이 아스라이 보이는 곳이다. 서해 너른 바다도 지척이고요. 수량은 많지 않지만 동백정의 동백도 아련한 곳이다.

나호열 시인의 사모님이신 정은영 시인은 지금은 문단에서 조금 벗어나 살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등단한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출가시켰고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 이렇게 손녀도 셋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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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발행인 : 오늘 바쁘신 데도 저희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극성을 부려서 걱정입니다. 언제 코로나가 끝나서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갈지 근심이 큽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뵙기로는 청년 같으신데요.

 

나호열 시인 : 네, 반갑습니다. (얇은 바지를 보여주며)보시다 시피 저는 아직 내복도 안 입고 삽니다. 군대 있을 때 하도 이가 많이 생겨서 그때부터 내복을 안 입었는데 지금까지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코로나는 3차 부스터샷까지 예방접종을 마쳤고, 잘 나가지 않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어요.

 

전하라 시인 :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뵙고 싶었어요. 전에 한 번 도봉문화원에서 뵙고 한참 세월이 흘렀네요. 너무 잘 생기시고 키도 크신 데 다가 시가 좋으셔서 여류시인들한테 인기가 매우 높으신 것 같아요. 시간도 지나가고 하니 메인스토리 취재에 관한 질문을 여쭙겠어요. 선생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나호열 :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여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에 멈춥니다마는, 아버지는 강직하고 효심이 지극한 분이셨습니다. 625때 부산에서 근무하던 중 고향이 북한군에 점령당하자 어머니를 보살피겠다고 고향에 왔다가 붙잡혔으나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다가 심하게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여파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저의 조부이신 철(喆)자 하(河)자 할아버지께서는 영명하셔서 관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집안을 일으키시고 아들 셋을 두셨습니다. 구십 넘게 장수하셨는데 엄격한 유교 전통을 따르신 분으로 성품이 꼿꼿하고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으신 분이였습니다. 충효(忠孝)의 가풍이 공고했다고나 할까요. 저의 선친은 그 할아버지의 차남으로, 형제애가 남다르고 자애로운 분이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불혹의 나이에 가장이 되어 저희 삼남매를 세상의 일꾼이 될 수 있도록 거두어 주신 분입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저와는 인생관의 갈등이 있기도 했습니다.

 

김순진 : 부산에서 태어나셨다고 했는데요. 그럼 어디서 성장하셨나요?

 

나호열 :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만, 6살 때 중구 필동에서 정릉으로 이주하여 숭덕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경동중고등학교를 1972년 나와 이듬 해 1973년 건국대 철학과에 진학했고요.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석·박사)를 졸업했습니다.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의 정릉은 도시문화와 농촌문화가 공존했던 곳입니다. 집 주변에 논과 밭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던 까닭에 상여(喪輿)나가는 것, 메뚜기 잡고 미꾸라지 잡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북한산이 지척이라 어려서부터 보현봉이나 비봉까지 오르내리면서 산의 위대함(?)을 일찍부터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의 평생을 북한산을 바라보며 살았네요. 지금 저의 방 창문을 열면 백운대 인수봉이 한 눈에 잡히고요, 멀리 도봉산도 반겨줍니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지금도 산을 아주 좋아합니다.

 

전하라 : 가훈이라고나 할까요. 좌우명으로 삼는 특별한 글귀가 있나요?

 

나호열 :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까닭에 가훈을 이어받은 기억은 없고, 스스로 여러 난경을 거치며 깨달은 바는 만차손 겸수익(滿超損謙受益), 그리고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입니다. 『서경』 대우모편에 나오는 한자성어인 만차손겸수익, 즉, 부질없는 욕심을 줄이는 것과 중국 북송시대 시인인 소동파의 시구(詩句)인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ㆍ세상 곳곳이 청산이다)’에서 원용한 인생도처유상수는 자만(自慢)을 경계하는 심훈(心訓)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순진 : 문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나호열 : 나름 서울의 명문 중·고등학교를 나왔으나 가세가 기울어 학업에 매진할 수 없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편모슬하에서 가족 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바람에 공부에 소홀하게 되고, 어려서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듯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음악선생님들께서는 음대 진학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졸업 후 방황 아닌 방황을 하던 차에 건국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막연하고 치졸한 생각이었지만 사르트르나 까뮈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철학이 나의 삶의 궁금함을 풀어주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철학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철학이 무엇이냐?”라는 화두 아닌 화두를 붙잡고 있긴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이야기가 옆으로 새버렸네요.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더 막막해지더군요. 연극판에도 기웃거려보고, 음악 쪽에도 관심을 가져보았는데, 모두 재능이 부족한 같더라구요. 어느 날 대학신문에 짧은 콩트를 응모했는데, 덜컥 신문에 내 글이 실린 겁니다. 활자화된 내 글을 보니 신기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원고료가 많았어요. 당시에 라면 한 그릇이 60원, 청자 담배 한 갑이 100원 할 때인데 2천 원 정도 원고료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시시한 글이었는데요, 그 콩트 제목이 「시시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후 김홍신 소설가, 김건일 시인(2020년 작고)등이 결성한 건국문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문청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장남이 상대를 나오고 은행원이 되기를 바라셨는데……, 참 실망이 크셨겠지요. 어느 날인가 시인이신 구상 선생께서 “ 시 쓰는 일은 배고픈 일이다.”라고 하시길래 당돌하게 말씀드렸죠. “그럼 선생님은 왜 시를 쓰십니까?”라고요.

 

전하라 : 첫사랑 이야기나 사모님과의 결혼 전 이야기 등을 해주시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나호열 :제 아내는 1978년 가을에 만났습니다. 제대하고 막 복학할 때였는데, 제 부산 친의구 주소를 물으러 찾아왔던 거지요. 그 당시 제 아내는 수도사대 국문과 4학년이었고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시문학≫사에서 주관하는 전국대학생 문학상에 당당히 대상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금남의 구역인 여학교에 초청받아 시낭독도 하러 갔던 기억도 납니다. 그곳에서 고려대 교수였던 오탁번 시인과 연세대교수였던 정현기 평론가도 뵙게 되었구요. 저희 학교에는 정창범 교수가 계셨는데 직접 강의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문학회 지도교수를 맡고 계셔서 사당동 댁에는 몇 번 갔었습니다. 바로 옆집이 미당 선생댁이어서 그곳에도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창범 선생님은 “너는 스타일리스트야! 소설을 써!”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스타일리스트가 뭔지도 몰랐고요. 그저 그 말씀이 왠지 싫어서 반드시 시인으로 등단하겠다는 오기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문학회 써클 룸을 여러 써클이 함께 썼는데 김한길 소설가, 해냄출판사 발행인 송OO가 함께 생활했었습니다.

 

김순진 : 영향을 받은 작가나 도움을 준 스승은 있으신가요?

 

나호열 : 저는 사실 문학에는 문외한입니다. 문학개론 한 과목도 수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집사람이 국문학 전공자이어서 문학에 관련된 전공서적은 어렵지 않게 구해 읽을 수 있었고요, 모르는 부분은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습니다. 사사(師事)한 스승은 없으나, 집 사람이 1982년 ≪월간문학≫에 먼저 등단에 지금까지 시업을 이어올 수 있는 힘을 준 사람이고요, 제가 감히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분은 작고한 황금찬 선생님과 이웃에 살고 계신 이생진 선생님을 사표로 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국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지도를 받을 수 없고요, 창작을 가르치는 여러 기관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군 입대 전 그러니까 1974년 어느 날인 것 같아요. 진천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오만환 시인과 물어물어 종로2가 한국기원(?)에 황금찬 시인이 계시다하여 찾아갔습니다. 1층 다방에 있었는데 황금찬 선생님이 내려오셔서 작품이랄 것도 없는 제 하찮은 글을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시가 좋아요 반드시 훌륭한 시인이 될 거에요. 커피 드시고 가세요.”

그때는 제 글이 정말 작품이 좋은 줄 알았고, 금방 시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황금찬 선생님의 별명이 황과찬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의 격려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 10년쯤 전인가요. 한국문인협회가 대학로에 있을 때, 제가 한국예총의 정책연구위원장과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제 사무실은 2층이었고, 3층에 한국문입협회가 있었는데요. 김년균 이사장께서 ‘황금찬 시 읽기 행사’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3월이었는데 1월 초에 황금찬 선생님의 장자인 황도제 시인이 급서했습니다. 행사 전 점심식사를 하시면서 “딸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아내가 떠났을 때도 이렇게 슬프지 않았어요.”라고 하시면서 끝내 식사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시낭독회가 끝나나고 문협 사무실에서 다담을 나누는데 저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나 시인이 우리나라 최고의 미남 시인이야.”라고요.

사실이 아닌 사실입니다! 하하하.

 

전하라 : 황금찬 시인을 좋아하셨네요, 백수를 누리시면서도 소년처럼 살다 가신 분이시지요. 존경하는 다른 시인은 있나요.

 

나호열 : 제가 맘속으로 모시는 또 한 분은 섬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생진 선생님이십니다. 모든 예술의 분야가 그러하지만 문학은 인격수양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근래에 이르러 작품의 수월성과 작가의 인품을 구분해야한다는 논조가 우세하지만 그럼에도 시인, 작가들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추세 또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명시(名詩)들이 그 시를 생산한 시인들을 흠모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일처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종종 시의 향기와 시인의 품격이 어우러지지 않는 불쾌함을 목도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생진 시인과 황금찬 시인은 그들이 생산한 시의 길과 그들의 인생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까닭에 도봉을 빛내는 시인으로 선양(宣揚)해야 마땅하다. 한 마디로 두 시인에게서 발견되는 언행일치는 평생 동안 일관되게 표명해온 인간 일반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그 사랑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적 편향성을 거부하고, 한결 같이 일상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노래한 두 시인이 쌍문동(황금찬), 방학동(이생진)의 가까운 이웃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올해로 93세를 맞이하신 이생진 선생님은 위의 글처럼 시인으로 갖추어야 할 겸양과 절도 있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저의 70 고희를 맞이하여 낸 시집 『안부』를 받으시고 친히 식사를 모시는 자리에서 시 세 편을 읽어주시고 좋은 시를 만나서 기쁘다고 하시면서 막걸리 두 잔을 가뿐이 드시는 모습을 본 것이 보름 전입니다. 작년에 마흔 번째 시집 『나도 피카소처럼』내시고 창작의 열정을 간직하고 계신 모습에서 겸양의 미덕을 다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김순진 : 이제 꼭 선생님께 듣고 싶었던 문학이론이 있습니다. 우선 여쭙겠습니다.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호열 : 창작은 끊임없이 예술 그 자체를 묻고 대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구축된 이론을 가지고 창작에 임해 본 적이 없었던 같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 보니 그동안 나름 축적된 경향(傾向)은 있기도 한 듯해서 허술하게나마 피력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시의 정의는 부단히 갱신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갱신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고, 창작을 통해 궁극적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양한 파격적 실험의식과 도전이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는 존재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미지즘의 창도자로 불리는 에즈라 파운드 E. Pound가 제시된 좋은 시의 4가지 요건을 눈 여겨 봅니다. 표현은 상식적 진술이나 설명이 아니라 감각이란 것(sense), 의성어, 의태어와 같은 운율(sound), 이미지 즉 시중유화(image, 詩中有畵), 어조(tone). 이 네 가지 요소가 시에 필요한 구성요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요소들이 빠짐없이 들어간 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면 좋은 시로 남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전하라 :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요?

 

나호열 : ‘좋은 시’란 유령과 같습니다. 시인들은 시를 잘 쓰고 싶어 하고 독자들은 좋은 시를 읽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잘 쓴 시는 무엇이고, 좋은 시가 무엇인지 제대로 헤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는 많은데,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시가 왜 이렇게 어렵냐는 푸념이 안팎에서 들리고 그럼에도 ‘어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문학상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소문의 중심에는 ‘좋은 시’라는 해괴한 관념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시이기 때문에 상을 받고, 평론의 집중 조명을 받습니다. 거기다가 해마다 ‘올해의 좋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출간되는 시들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좋은 시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제한된 여건이라면 작품 선정의 기준을 명확히 알려주는 것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 문학작품이기에 선정한 이의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므로 차라리 우리는 이런 저런 기준으로 ‘그러나 선자(選者)들은 일관성만은 버리지 않고작품을 선정했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 독자들의 혼란과 의구심을 덜게 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다소의 특색과 공감대와 시대정신이 투영돼 있는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김순진 : 그렇다면 좋은 시를 가름하는 다른 기준은 없을까요?

 

나호열 : 창작에 있어서의 태도로서 좋은 시를 가름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놓쳐선 안 됩니다. 흔히 형식주의적 관점과 역사주의적 관점의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형식주의적 관점이란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가, 오직 주체에게서 파생된 문제를 형상화하는 관점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서 역사주의적 관점이란 창작자는 창작자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환경조건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고, 따라서 창작자는 당대의 시대적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창작자의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시보다 당대의 문제, 이를테면 환경파괴, 민족통일, 전쟁과 평화 등등의 거대 담론을 취급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좋은 시의 조건을 갖추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하라 : 우리는 시를 창작할 때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까요?

 

나호열 :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으로 창작의 임무를 다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창작은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가라앉아 있는 것들의 근원을 캐묻는 것, 근원을 캐묻되, 형상화하는 방법이 남다른 것 구조의 독창성, 문체를 포함한 것들과 더불어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세계관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대중적 문학 경향은 얼핏 보기에는 형식주의적 문학관과 유사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른바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서정성은 형식주의적 문학관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 서정성은 주어진 보편적 현실에 대응하는 진보적 태도이지 결코 퇴행적(退行的)이고 과거(過去)로 회귀하는 비생산적인 양태가 아님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주의적 경향의 시들은 탐미적인 요소가 강하고, 역사주의적 관점의 시들은 운동성과 계몽성이 두드러지면서 형상화의 밀도가 옅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순진 : 그렇다면 좋은 시를 쓰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나요?

 

나호열 : 많은 시인들은 시대적 조류를 간과할 수 없고, 그 조류에 싫든 좋든 간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 시를 씁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 존재인가?”를 따져 물을 때 시인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의 비루함, 천박함, 오만과 편견을 낱낱이 발견하는 순간의 절망감을 어떻게 극복하고 헤쳐 나갈 것인가?’와 같은 감정의 토로는 시의 중요한 기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감정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의미가 회화적 이미지로 떠올라야만 비로소 시의 구조를 갖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빚을 때에는 먼저 무엇을 쓰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도구 즉, 시 속의 이야기나 구조를 차용해야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을 담그듯이, 포도주를 맛나게 하듯이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농익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하라 : 좋은 시를 가름하는 기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나호열 :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한 조건은 많습니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인은 평생 동안 한 작품을 놓고 첨삭을 거듭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먼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야 합니다. 맑다는 것은 모든 풍경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산정(山頂)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산정에서는 사방을 멀리 조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깊고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사색의 내공이 필요하고 그 사색의 결과를 담아내는 그릇인 스타일(문체)의 조련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늘 2%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노력입니다.

 

김순진 : 시와 시인과의 관계, 그리고 시에 있어 독자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나호열 : 외국의 예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작품과 작가의 연대(連帶)에 민감해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다른 장르보다 유난히 시에 있어서는 엄격한 인격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장르에 있어서 작품의 수월성에 관점을 두는 반면 문학에 있어서는 시인의 인격에 굉장한 예민함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새로운 예술은 천재에 의해 탄생합니다. 새로운 사조 (思潮)를 이끌고 간 아방가르드들의 광기(狂氣)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유효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각자 자신이 택한 하나의 길을 갈 뿐이겠지요. 저는 시를 쓰고자하는 여러분께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가요?’ 물론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유명인이 되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경제적 풍요를 얻고자 하든 그럼으로 인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저와 같이 천학비재한 사람에게 시는 이 인터뷰의 첫 부분에서 말씀드린 삶의 겸손함을 추구하는 한 방편이리고 생각합니다. 명예와 부(富)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그 욕망에 대한 절제와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상생(相生)의 아름다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배움의 교과서가 시인이 스스로 쓰고 있는 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유명하지 않으나 자신의 영육을 불사르며 시를 만들어가는 좋은 시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니힐리스트이며 아나키스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독자를 염두에 두는 시들의 부질없음을 깨닫는 것이 자에게 남은 나머지 숙제입니다.

 

김순진 : 시가 자꾸 산문화되어가는 경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호열 : 꼭 들어맞을 수는 없지만 ‘좋은 시’로 종종 거론되는 시들이 산문시라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조명되는 시들이 이야기 구조를 가진 산문이라는 현상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시가 산문화 되는 경향은 속도를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삶은 정지(停止)의 일상에 가까웠지요. 농경의 일상은 가속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웠습니다. 때에 맞춰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는 농경(農耕)은 자연 현상에 촉각을 세우고, 관조의 미덕과 여백의 의미를 곱씹는 일상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농경시대의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현대보다는 매우 느리게 흘러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지에 가까운 일상은 어떤 일의 의미를 오래 음미하는데 적합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속도를 중시합니다. 음미나 관조는 가속화된 시대에 찰라적 잔상(殘像)과 감각적 반응으로 대치되는 말입니다. 참을성 없는 현대인들은 정지에서 비롯되는 침묵에 손사래를 치게 됩니다. 시가 노래와 등가를 이루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없었던 시대에 시는 낭송하기에 적합하게 리듬을 얹음으로써 기능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반면에 오늘의 시는 들어서 의미를 깨우치기보다는 읽음으로써 의미를 이미지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라 : 저는 시는 결국 말놀이라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호열 : 물론 저도 ‘시는 말놀이’란 말에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시는 결국 말을 어느 곳에 놓아야 상품이 되는 것인지를 깨닫는 작업이니까요. 언어는 자의적(恣意的)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속의 때가 묻어 있는 괴물입니다. 우리가 비유라 일컫는 트릭은 사실은 창작자의 심장에 꽂히는 못과도 같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관념의 그림자를 어떻게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시는 과녁에 적중하지 못하는 빗나간 화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될 수 있으면 짧은 시를 쓰고자 노력합니다. 가외자언야(可畏者言也)라는 글귀를 상기합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은 말이다!’라는 뜻이지요

 

김순진 : 우리나라 문학풍토의 문제점에 대하여 어떻게 진단하고 계시나요?

 

나호열 : 수백 개의 문학상과 문예지를 가진 나라, 세계유일의 신춘문예라는 등단제도가 한 세기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나라, 수 만 명에 이르는 시인들이 살아가는 나라,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경제학의 이론이 오늘의 우리 문단에 절절하게 와 닿는다는 것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수만이 즐기는 고급예술이 문학이라고 자위를 하면서도 보다 많은 대중이 시를 읽고, 시에서 고단한 삶을 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매스컴의 강력한 선택을 받은 몇몇 시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훌륭한 시인들이 녹록치 않은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전하라 :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문학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나호열 : 첫째로 우리나라 교육에서 국어를 비롯한 문학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습니다. 사고(思考) 영역의 ‘읽기’와 ‘쓰기’ 능력의 배양은 논리적이고 비판적 사유를 공고하게 만드는 실마리이면서 결말임이 분명한데도 우리의 학교 교육은 문학교육의 중요성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 자라나는 세대, 훈련된 독자가 양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학의 진흥(振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두 번째로 충분한 문학 수련과 교양이 축적되지 않은 대중에게 탈脫 이성사회, IT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문화로의 진입에 영향 받은 새로운 세대의 문학(시)은 환영 받을 수 없는 몽상의 세계일뿐이어서 일군의 현대시는 교화(敎化)의 사회적 기능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문학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중이 사실은 그런 문학을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논증할 수는 없겠으나 21세기 현대사회에서의 시인의 역할이 자연과 인간, 감성과 이성과 같은 이분법적 사유 방식으로 이 세계를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김순진 :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나호열 : 시를 쓰겠다는 분들에게 저는 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유합니다. 특히 단편소설을요. 20대에 저는 한국소설전집을 세 번 정도 완독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감명을 받았고요. 주제의 명료성, 문체 文體 습득을 위해서는 참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먼 기억지지만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 이제하의 초기 작품(『초식」), 이문열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요. 최근에는 책을 멀리하고 있지만 김훈의 소설들이 주는 문제의식과 문장력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전하라 : 요즘 글 잘 쓴다고 생각되는 작가나 추천하고 싶은 젊은 시인, 작가, 평론가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나호열 : 박지웅, 이제니와 같이 자신의 문체를 구축한 시인들, 정효구, 김수이 평론가의 정ㅂ밀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비평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가까운 이웃인 황정산 시인겸 평론가의 현장비평에 호감을 가지고 있고요.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진희 평론가도 떠오릅니다.

 

김순진 : 대표작이나 대표저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호열 : 가장 난감한 질문입니다. 스무 권의 시집을 내면서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느 작품이 뛰어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요. 모든 작품이 대표작이거나 아니면 모든 작품을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어찌 보면 시 쓰는 즐거움은 의도의 오류에서 빚어지는 독자와의 교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여 쓴 작품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시들은 운율이 살아 있고 쉽게 의미의 전달이 되는 시들 같습니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실려 있는「북」,「매화」,「당신에게 말걸기」등과 같은 시가 그러하다고 봅니다. 굳이 시집을 꼽아본다면 최근에 낸 시집인 『안부』, 그리고 세종 우수도서로 선정된 『촉도』,『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등이 눈길이 좀 더 닿는 것 같습니다.

 

전하라 :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나호열 : 이제 70이 되었으니 마음을 따라가는 종심(從心)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청탁을 받아 쓴 산문들과 문화예술정첵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공부한 문화예술평론들, 그리고 주마간산으로 다녔던 국내외 기행문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20권의 시집을 한데 묶는 시선집 발간도 기회가 된다면 추진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반세기 이상 거주했던 도봉지역의 풍광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집『도봉(道峰)』을 올해 안에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김순진 : 신인작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나호열 :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글쓰기의 양태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너무 시류에 영합하고 자신의 작품을 상품화하는데 치중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평생을 걸어가는 먼 길이고 결국 그 끝에서 만나는 사람 또한 자신이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문여기인 文如其人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전하라 : 저희 계간 스토리문학에 거는 기대나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나호열 : 스토리문학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문학잡지입니다. 창간 초기부터 제게 작품게제를 허락해준 잡지이기도 하고요, 저 스스로 ‘은둔(隱遁)의 길’을 자청하여 걸어 왔기에 문단과 교류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기억해 주심에 감사하기도 하고요. 작품 발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지만 숨어 있는 작품과 시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는데 힘을 기울여주시니 이 또한 기쁜 일이지요. 날이 갈수록 문학잡지의 발간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예술의 가치를 증명하는 선도자로서의 동력을 끝까지 지켜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다음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호열 시인의 시 3편을 싣는다.

 

 

 

 

안부(安否) 

 

나호열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픈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 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라기 별과 같은 것이다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한 말뜻을

이제야 귀가 열리는 밤

안부를 기다리던 사람이

내게 안부를 묻는다

기다림의 시간이 구불구불

부끄럽게 닿는다

 

 

틀니

 

 

어제는 교회에 갔고 오늘은 법당에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하루치의 까닭모를 분노가 잡초처럼 돋아오르고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고요히 앉아 지난 신문을 거꾸로 들어 읽으시는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병

일 년 열두 달 눈 내리는 나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되돌아오는 길이 지워져버려

그분의 얼굴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이곳이 지옥이었다가 극락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분은 경극의 주인공이십니다

입 벌리세요

호랑이는 굶어서 죽지 잡혀 먹히지는 않겠는지요

틀니를 뽑아 물에 헹굴 때 그 분은 순하디 순한 얼굴로

웃고 계십니다 아니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나의 교회와 나의 법당

어머니를 벗어날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리석은 양

길 잃은 양이 되어 눈물 납니다

 

 

 

진화론을 읽는 밤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 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의 말

그렇게 믿어왔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의 조롱으로 메아리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삵에게 쫓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만 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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