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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後生)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2. 22. 15:09

후생(後生)

 


경향신문 입력 : 2022.02.21 03:00 수정 : 2022.02.21 03:01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얼굴도 없이 뼈도 없이 맹물에도 풀리면서 더러운 것이나 훔치는 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늘만 바라보면서 고고했던 의지를 꺾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무엇이든 맞서 싸우되 한 뼘 땅에 만족했던 우직함이 나를 쓰러뜨렸다

나무는 벌거벗어도 실체가 없음의 다른 말이다 벌거벗어도 보일 것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다 당신이 나를 가슴에 품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는다 해도 잠시라도 나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는 휴지가 되기로 한다 나는 당당한 나무의 후생이다

                                                                                           나호열(1953~)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연필, 의자, 책상…. 연필은 글씨를 쓰는데, 의자는 궁둥이를 대고 앉는데, 책상은 주로 글을 읽거나 쓸 때 사용한다. 저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쓰임이 있다. 곁에 두고 오래 쓴다. 하지만 똑같이 나무로 만들어진 휴지는 “더러운 것이나 훔치는” 데 사용하고, 한 번 쓰고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해보지만,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잠시라도 나를 필요로” 했다는 건 그나마 위안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데, 곧은 나무는 베어져 휴지가 된다. 하찮은 휴지 이전엔 올곧게 불의에 맞선 삶인지라 후회는 없다. “의지를 꺾은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부끄럽지 않다. 다만 “한 뼘 땅에 만족”한 것과 현실에 안주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하늘 높은 줄만 알고 땅 넓은 줄 몰랐다. “당당한 나무의 후생”이라는 말에선 자부심이 드러난다. 나무의 곧은 기개가 느껴진다. 나는 지금 ‘맹물’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