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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섬’ 신안 앞바다 ‘섬티아고 순례길’ 걸으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0. 17. 20:41

‘1004섬’ 신안 앞바다 ‘섬티아고 순례길’ 걸으며

중앙일보

입력 2021.10.15 13:00

조남대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26)

 

여행은 언제나 설렘과 흥미를 유발한다. 신안은 드넓은 바다 건너 섬에서 예수 십이사도의 고행을 묵상하면서 나를 되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더욱 그러하리라. 노둣길을 만들고 마을을 홍보하기 위해 애쓰는 지자체와 주민들의 노력이 가상스러워 보였다.

K대 여행작가 과정 교수와 학생 4명은 렌터카를 타고 신안군청으로 향했다. 군청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004섬 신안’이라는 간판이다. 관내 섬이 1004개인 것을 홍보하기 위함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인 점을 부각하기 위해 ‘천사(天使)’라는 좋은 이미지와 연계시킨 것으로 보인다. 고장을 알리기 위한 기발한 착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암태면 기동삼거리에 동백꽃 파마를 하고 수줍게 웃고 있는 노부부 벽화. [사진 조남대]

신안은 어디를 가나 ‘1004섬’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다. 시내버스도 ‘1004섬’이라는 글씨를 붙이고 달린다. 압해도에서 암태도로 이어지는 교량은 총 길이가 7.22㎞나 되지만 2개의 주탑 간의 길이를 1004m로 건설하고 ‘천사 대교’라고 명명했다. 자은도 한운리에서 할미도까지 1004m의 인도교를 만들어 ‘無限(무한)의 다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배 이름도 ‘천사 아일랜드’다. 또 ‘천사섬 분재공원’, ‘1004섬 수석미술관’, ‘1004섬 뮤지엄파크’ 등 ‘1004’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교량의 총 길이는 7.22Km이지만 2개의 주탑간의 거리는 1004m로 되어있는 천사대교. [사진 조남대]

반월도와 박지도는 온 섬을 보라색으로 형상화해 퍼플 섬이라고 이름 지어 관광객에게 손짓하고 있으며, 병풍도는 맨드라미 섬으로 특화하기 위해 지붕과 벽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식당 이름도 맨드라미 하우스로 지었다. 암태면 기동삼거리에 ‘동백꽃 파마’를 한 채 수줍게 웃는 노부부 벽화는 천사 대교 개통 이후 관광객이 사진을 찍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가장 뜨거운 장소가 되었다.

자은도 한운리에서 할미도까지 놓여진 길이 1004m의 '무한의 다리'. [사진 조남대]

땅과 바다를 포함하면 서울시의 11배나 되는 광활한 지역이지만 총인구는 4만여 명 조금 넘을 뿐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특화된 모습을 홍보해 ‘오고 싶은 섬’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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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기점도와 소악도 주변의 5개 섬에 만들어진 12개의 작은 예배당이다.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인 점에 착안해 스페인,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조형 예술가 10명이 예수의 십이사도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을 세웠다. 하나의 작은 예배당에서 노둣길을 통해 다른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12㎞의 길은 언제부턴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견주어 ‘섬티아고 순례길’이라고 불리고 있다.

섬과 섬 사이는 애초에 징검다리였지만 주민들이 돌로 바다를 메우고 시멘트로 포장해 지금과 같은 노둣길이 되었다. 밀물 때는 찰랑거리는 수평선이 되고 썰물 때는 노둣길과 갯벌과 숲을 걸으며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명상을 해본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지친 삶에서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이번 순례에서 무언가 느끼고 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물이 차면 들어갈 수 없어 ‘딴섬’이라고 불리는 무인도에 있는 가롯유다 예배당. [사진 조남대]

송공항을 출발해 대기점도에 내려 1번 베드로 집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물때를 맞추기 위해 진섬에 내려 12번인 가롯 유다의 예배당부터 순례하였다. 노둣길이 바닷물로 막히면 2∼3시간 동안 쉬어야 한다. 길이 막히기 전에 둘러보기 위해 서두른 탓에 여유를 갖고 주변의 멋진 경치를 마음껏 구경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대기점도에서 병풍도로 가는 노둣길 입구 언덕에 서 있는 안드레아집. [사진 조남대]

12사도의 예배당은 선착장, 노둣길, 마을 어귀와 언덕, 해안과 저수지 가운데를 비롯하여 섬 곳곳에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3평 남짓한 단층으로 울타리도 없고 문은 열려 있어 거리낌 없이 들어가 볼 수 있어, 딱딱하고 규모가 커 문을 밀고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운 도시의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길가에 바로 붙어 있으니 언제든 눈과 비를 피해 갈 수 있는 쉼터가 될 것이다.

대기점도 선착장에 있는 ‘베드로의 집’은 눈부시게 하얀 외벽과 지중해풍의 푸른색으로 마감하였고, 돔 형태의 지붕은 이국적인 감성을 자아내게 한다. 고개를 숙이고 키가 작은 종탑으로 몸을 넣어본다. 그동안 게을렀던 신앙생활이 작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종을 쳐 본다. 부드러운 울림은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고 한다. 코로나를 핑계로 소홀해진 미사를 지그시 참으며 기다려 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한다. 잠시의 묵상은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된다.

대기점도에서 병풍도로 가는 노둣길 입구 언덕에 서 있는 안드레아집은 해와 달로 형상화한 네모지고 둥근 구조물이 한데 붙은 형태로 지어졌다. 조그만 사각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노둣길 건너 고즈넉이 자리 잡은 아름다운 병풍도가 보인다. 긴 노둣길을 보고 있노라면 땀 흘리며 만드신 주민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절로 솟아난다.

소기점도와 소악도를 잇는 노둣길 중앙에 서 있는 마태오의 집. 이곳을 방문할 때는 꼭 물 때를 확인해야 하며 조금 늦기라고 하면 다음 썰물 때까지 고립되기 십상이다. [사진 조남대]

소기점도와 소악도를 잇는 노둣길 중앙에 서 있는 마태오의 집은 밀물이 되면 바다 위에 떠 있다. 벽에 설치된 대형 창문을 통해 넓은 갯벌과 출렁이는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물때가 맞지 않아 조금 늦기라도 하면 바다에 갇혀 썰물이 길을 내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이 빠져 다시 순례를 시작하게 되면 고립되었을 때의 두려움보다는 몇 배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송공항에서 대기점도 선착장을 오가는 천사아일랜드호 [사진 조남대]

마지막에 있는 가롯 유다의 집은 딴섬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무인도에 고딕 양식으로 첨탑과 기와를 올린 작은 예배당이다. 나선형으로 된 벽돌 종루에 있는 종을 열두 번 치면 12㎞의 순례길을 무사히 마무리했음을 알리게 된다. 물때에 맞춰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각각의 작은 예배당이 상징하는 열두 사도의 행적을 조금이라도 본받아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우러나온다.

드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걸어 본 섬티아고 순례를 통해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여 후련해졌다. 다음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례길을 걸으며 지난 60여 년의 삶을 되돌아봤다. 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온 것은 주님의 크나큰 은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살며시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