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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은 시집 『피노키오 기상청』: 복면覆面의 마음으로 사람 찾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5. 21. 11:37

跋文

복면覆面의 마음으로 사람 찾기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팬데믹의 풍경과 그늘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가지 측면의 난경難境에 처해 있다. 그 하나는 코비드 19(2019년)의 창궐, 즉 팬데믹pandemic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온 사회구조의 변화 – 일자리 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은 노동시장의 축소와 기계에 소외되는 인간, 각 세대 간의 인식의 격차 등–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난제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를 요약해 본다면, 21세기 들어서 사스(2002년), 메르스(2012년)에 이어 코비드 19와 같은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옴은 물론 이로 말미암아 시회망의 구조, 즉 인간관계의 부정적 변화를 야기하는데 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정보와 교통수단의 획기적 발달은 국경과 인종의 경계를 허물고 개방적 교류의 시대를 열었지만, 역설적으로 역병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병疫病의 도전에 맞서 비대면사회에서 필요한 여러 방면에서의 소통의 통로를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응전의 과제를 안겨주었다.

 

이와 병행하여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과학기술의 혁명은 한 마디로 초연결성 Hyper –connected으로 인공지능AI를 기반으로 하는 사물인터넷 IoT, 클라우드 등 비대면으로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국면으로 이행되어가면서 비대면의 일상화와 더불어 세대 간의 갈등과 불통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토인비A. Toynbee는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하였는바, 우리 앞에 주어진 이 두 가지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여 보다 인간다운 삶을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요구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잘 구워진 벽』(2020년)에 이은 이서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피노키오 기상청』이 팬데믹과 과학기술문명이 가져온 비대면사회를 맞이한 우리네 삶의 풍경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2. 고독한 군중

 

백 년 전에 리스먼 D. Riesman은『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 』를 통해 20세기 초의 현대인이 타인지향형, 즉 타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교성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고독한 군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면에서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때로는 협동을, 때로는 경쟁을 통해서 사회적 동물로 진화해 왔다.

 

돌이켜 보면 팬데믹이 오기 전부터 ‘페이스 북’, ‘유튜브’, ‘트위터’, ‘메신저’ 등의 전자기기를 통해서 비대면의 소통 방식을 일상화했다. 전화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기 보다는 메신저를 통해서 문자로, 이모티콘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일상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양상을 포착한 이서은 시인의 시세계를, 먼저 그의 첫 번째 시집의 표제시인「잘 구워진 벽」과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피노키오 기상청」두 편의 시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고 비교적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오늘의 삶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설익은 마음을 굽는다

오래된 토스트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본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벽과 벽 사이

당신과 내가 누워 있다

 

- 「잘 구워진 벽」 전문

 

 

그녀의 정강이가 시린 날은 어김없이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며칠 동안 한파가 지속되고

중부지방에 폭설이 내린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햇살이 쨍쨍했다.

 

또 속았다.

 

- 「피노키오 기상청」전문

 

 

이 두 편의 시는 오늘의 삶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기기를 통한 소통이 일견 ‘노릇노릇 잘 구워진’ 교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벽’이었고, 정강이가 시리면 어김없이 비가 오는 ‘몸’도 믿을 수 없고, 무한 연산이 가능한 수퍼 컴퓨터도 예측이 빗나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목도할 때, 속고 속이는 주체는 사라져 버린다.

 

‘인스타에는 별이 없고 / 페이스 북에도 얼굴이 없’(「그래 봤자, 넌 내 시의 소재일 뿐이야」부분) 는, 이 허위의 공간은 무엇을 뜻하게 되는 것일까? ‘스타성이 없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대중들, / 이 무리에는 물론 나도 포함된다’(「모두 B·T·S가 될 수는 없다」 부분)는 자조自嘲는 우리가 더 이상 예측이 가능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소통의 도구로 삼고 있는 전자기기들이 마음을 숨기는 복면覆面 임을 아프게 증언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다.

 

찍고 찍히는 세상에서

진짜 찍고 싶은 건 무엇일까

외과보다 성형외과 간판이 더 많은 거리를 떠도는

형형색색 마스크 속 진짜 얼굴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눈꺼풀은 꿰맬 수 있지만

눈동자를 성형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오늘밤도 자비 없는 시선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 「가면무도회」전문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코비드 역병은 ‘하루에 만보씩 걸어보니 자동차로 볼 수 없는 / 풍경을 담기에도 두 눈은 호수처럼 출렁거리게’(「코로나가 바꾼 일상」부분)하는 느리게 걷는 삶을 일깨우고, ‘세상이 멈추니 / 지구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 너와 나의 거리가 그리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사회적 거리두기」부분)는 팬데믹 상황에 길들여진 일상을 고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복면과 익명匿名으로 자신을 위장僞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안전을 담보로 매일 CCTV에 찍히고, 알게 모르게 위치추적을 당하며, 이름 대신 주민등록번호로 존재를 확인 당하는 가상의 세상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자비 없는 시선’들은 타자他者의 불선不善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한 편에서는 요즘 회자되고 있는 관종 –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자 튀는 여러 가지 형태의 행동- 에 열광하면서 자신의 타자화他者化에 함몰되는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시인은 그래도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눈동자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크낙한 희망이냐고 위로한다.

 

3. 덤 & 더머

 

‘덤 앤 더머Dumb and Dumber’는 1994년에 개봉한 미국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원래 단어의 뜻은 한 마디로 ‘벙어리의 사람, 바보’라는 뜻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현대인은 타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외부지향적이고, 타인의 주목을 받기를 열망하는 관종이면서, 흠결있는 타인에게는 ‘자비 없는 시선’을 쏟아내는 바보들인지도 모르겠다.

 

허언과 가짜뉴스가 판치는 ‘말이 너무 많아 입을 가려야 하는 시절’(「 덤 앤 더머」부분)인데, 마침 노점에서 푸성귀를 파는 벙어리 할머니는 고구마 줄기 한 다발을 사니 덤으로 한 다발을 더 얹어준다. 그래서 ‘화살 같은 말’보다 수화手話로 던져주는 ‘덤’이, 이 삭막한 세상을 밝혀주는 힘이라는 것을 시「 덤 앤 더머」넌지시 우리에게 알려준다.

 

‘20대 자취시절 / 언제 또 먹을지 모른단 생각에 / 기회가 되면 나는 음식을 먹어 치웠다’(「햄버거로 채울 수 없는 허기」부분)는 불편하고 힘든 청춘의 시기와 ‘이제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과 / 멋진 풍경을 선물 할 줄 아는 나이가 된’(「서해」3연 부분) 시차時差가 그리 멀어보이지는 않지만 ‘오늘 살아있는 자체로 기적이고 / 기쁨이고 선물’(「산책」6연)임을 알고, ‘인생이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 빗속에서 춤추는 것’(「레이나 댄스」부분)을 깨닫는 나이에 이르고 있는 젊은 시인의 혜안이 돋보인다. 이런 근기와 혜안을 가진 까닭에 시인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부조리한 일들에 관심과 분노를 주저하지 않고 냉소와 풍자로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사표師表로 숭앙받던 엘리트 승려가 ‘마음 비우기’를 설파하면서 정작 자신은 검약과는 거리가 먼 호화주택에 거주하면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몰락한 참담함을 그린「주봉석,씨」,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사리사욕에 눈 먼 고위공무원들이나 국회의원들의 비리에 절망하는「장칼국수의 사회학」, 인두겁을 쓰고 어린 소녀에게 만행蠻行을 저지른 자에 내려진 법의 무력함을 빗댄 시 「To 조두순」, 속물근성으로 자기 자랑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이웃들을 내치는「당신이 가셔요, 대기업」등의 시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곡비哭婢로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시인 자신에게도 어김이 없다. 각성과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비에 젖은 목소리 삽니다」는 휴대전화를 빌려 달라는 낯 선 여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 조금 전까지 별별 상황을 떠올리며 / 소설을 쓰던 간사한 마음이 녹아내린’ 낭패의 일화逸話를 토로한 시이다.

 

봄비처럼 편안해진 얼굴로 여자는 명치 가까이 두 손을 모으며 휴대폰을 돌려받고 돌아서는 나에게 재차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인다.

냉장고 값을 능가하는 휴대폰을 밤낮으로 들고 다니면서도 봄비처럼 반갑게 전화를 받을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늦은 저녁, 노을 속으로 가는 발걸음이 짐승처럼 무겁다.

 

-「비에 젖은 목소리 삽니다」마지막 연

 

이 시는 타인에 대한 불신이 안도로 바뀌는 순간 포착에 시의 의미를 두기 보다는, 잃어버릴 새라 값비싼 전화기를 하루 종일 손에 쥐고 다니면서도 막상 ‘봄비처럼 반갑게 전화를 받을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소외와 불통不通 의 덫에 걸린 자화상을 보여주는 시인의 진솔함이 돋보이는데 의미가 있다.

 

이와같이『피노키오 기상청』의 많은 시편들은 특별하지도 않고,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적 화자話者 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각 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話者 가 시인 자신이든, 가공의 인물이든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패기 발랄한 이웃이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오는 즐거운 대화가 시집『피노키오 기상청』의 전모全貌이다. 사실 개방사회로 나아갈수록 그동안 은폐되었던 사회의 깊은 치부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던 악습과 관행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의 도래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복면 속에 우리의 양심良心이 가리워져 있다고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피노키오 기상청』에 수록된 부조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시들 중에서 이와 같은

변하지 않고 사라질 수 없는 만인 萬人에게 주어진 진실을 그려낸 시 한 편이 있다.

 

어젯밤 뒷담화하며 뜯던 닭발의 발톱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의 연봉과 명품 지갑과 아파트 평수는 알지 못하나

당신이 소화시키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퇴근길 덤까지 담아온 길거리표 붕어빵

산책길 아이와 나눠먹던 아이스크림

잠 못 이루던 밤 야식으로 비벼먹던 찬밥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아 당신을 정의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 「똥」 전문

 

속도로 무장한 변화무쌍한 디지털의 시대에 우리의 삶은 ‘장기 두다 차에 치일 줄 누가 알’(「인생은 장기 두기」부분)수도 없는 예측이 불가능한 길에 놓여 있고, 그래서 ‘불안에 저당 잡힌 하루 /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24시간’( 「만기 없는 적금」부분)에 얽매여 있기도 하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위태한 일상에서 ‘똥’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결과물일지 모른다. 과연 배설排泄은 부끄럽고 더러운 일일까? ‘똥’이야말로 부와 빈곤, 남과 여, 정의와 부정 등등의 이 사회가 기획한 이분법적 경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평등의 상징이 아니겠는가?「똥」은 역설과 풍자로, 현시욕을 복면으로 감춘 우리 모두에게 내리치는 죽비로 읽혀지는 수작秀作이라고 생각한다.

 

 

4. 앙가주망의 시를 향하여

 

앙가주망engagement 은 이미 한 물 간 사조思潮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되새겨볼만한 주장이기도 하다. 간단히 앙가주망을 사르트르에 말을 통해 설명한다면 이러하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의 삶을 초월하고 현재의 삶에서의 해방을 꿈꾸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데아 – 존재하지 않는 – 를 찾아가기 위한 구속 상태로 자각하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즉, 인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자각하면서 끊임없이 현실의 난관을 돌파해 나가려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측면에서의 앙가주망은 작가의 현실참여와 작가 개개인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용어로서 여전히 작동하는 의식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느닷없이 앙가주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서은 시인의『피노키오 기상청』이 이와 같은 앙가주망을 지향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피노키오 기상청』에 드러난 이서은 시인의 시관 詩觀을 앙가주망의 바탕으로 몇 가지로 정리한다면 첫 째 이서은 시인의 시는 불필요한 수사修辭를 배제하면서 경쾌한 문장의 행보行步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서은 시인은 특별하지 않은 젊은(?)세대의 평범한 일상을 삽화로 그려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이야기할 때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이야기’의 구성과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흥미성興味性이라 한다면『피노키오 기상청』의 각 시편들은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지는 서사敍事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둘 째,『피노키오 기상청』의 시편들은 다양한 구성 양식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비에 젖은 목소리 삽니다」,「당신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요?」와 같이 긴 산문의 형식을 따른 시가 있는가 하면, 백수나 일용직을 빗댄「프리랜서의 점심」, 극도의 상징으로 이루어진 「얼룩말의 시간」과 같이 짧은 시도 다수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얼룩말의 시간」을 감상해 보자.

 

초원이 그린

흑백 무늬가

팽팽한 직조로 짜여진

내일을 물들이고 있다

 

- 「얼룩말의 시간」 전문

 

초원은 양육강식의 현장이다. 동시에 영원한 승자도 없는 인드라망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슴은 사자에게 잡혀 먹지만 병든 사자는 독수리나 하이에나와 같은 상대적 약자의 먹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얼룩말은 사자나 표범과 같은 맹수에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어지러운 흑백 무늬로 몸을 치장한다. 그렇다면 얼룩말의 몸은 흰 바탕에 검은 무늬로 새겨진 것인가? 아니면 검은 바탕에 흰 무늬를 얹은 것인가? 이 시는 짧지만 여러 갈래의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시이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내일을 살기 위하여 흑과 백의 잣대로 아웅다웅하는 어리석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메시지로 감상할 수도 있겠다.

 

어째든 이서은 시인은 천편일률적인 시작詩作을 지양止揚하고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미덕을 가진 시인이다. 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여기 두 편의 ‘모과’에 대한 시가 있다.

 

暮,果

 

툭, 툭,

터져 나온 상처를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다.

 

상처의 깊이만큼

향기도 깊어진다는 걸

아는

그런 영혼으로

 

툭, 툭

 

 

모과

 

툭, 툭,

터져 나온 상처를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다.

 

상처의 깊이만큼

향기도 깊어진다는 걸

아는

그런 영혼으로

 

툭, 툭

불거지고 싶다.

 

가을의 모과木果 열매는 향기가 고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暮, 果」와 「모과」는 모두 모과木果를 소재로 한 시들이다.「暮, 果」는 저물 ‘모’와 과실 ‘과’자를 ‘,’로 등치시키고 있을 뿐, 「모과」와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暮, 果」가 마지막 연을 ‘툭, 툭’의 의성어로 맺는 것과 달리 「모과」는 ‘툭, 툭 / 불거지고 싶다’로 종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暮,果’의 음은 ‘모과가 아니라 ‘모,와 과’ 즉, ‘저녁과 열매’이다. 따라서「暮, 果」와 「모과」는 다른 시이다. 이 글에서 이 두 편의 시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마도 시인은 독자들을 향해 재미있는 해석의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간략하게 몇 가지의 예를 들어 이서은 시인의 앙가주망을 분석해보았다. 이제 이 글의 마지막으로『피노키오 기상청』시편들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을 요약해 본다.

 

이서은 시인은 복면사회가 보여주는 휴머니즘의 몰락과 4차 산업혁명이 야기하는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섣부른 관조와 달관의 포즈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경험 속에서 터득한 서정의 목소리를 다듬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물 한 모금 주지 않아도 꽃은 핀’(「봄에는 운동화를 벗고)다는 사실로부터 현실의 각박함을 ‘목이 마르다고 / 그늘이 졌다고 / 불평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극복하겠다는 일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겐가 꽃이 되겠다는 소통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분명히『피노키오 기상청』은 문여기인文如其人을 향해 가는 이서은 시인의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시업詩業의 길고 먼 여정의 성취는 언제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푸른 밥’을 잊지 않는데 있을 것이다.

 

 

공평할 것 없는 세상에서 하늘만큼은

유일하게 ‘우리’라는 울타리를 내어준다

편 가르지 않고 숟가락질 할 수 있는 저녁

밥,

당신과 먹고 싶다

 

- 「푸른 밥」전문

진심으로 이서은 시인의 『피노키오 기상청』상재를 축하드리면서 ‘웃음은 유행을 타지 않고, 상상력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꿈은 영원하다’는 월트 디즈니의 말씀을 놓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