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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본질과 생명의 탐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5. 14. 16:20

서정의 본질과 생명의 탐구

나호열

 

1.

 

이충이 시인이 영면에 든 지 일 년이 되어간다. 마침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등 10편의 시가 그의 컴퓨터에서 걸어 나와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이제 온화한 그의 눈빛을 마주할 수 없지만, 새싹처럼 푸른 유고遺稿는 다시 이충이 시인을 상기하게 만든다.

 

2.

 

이충이 시인은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하여 등단하였으며,『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고』(1986),『저녁 강에 누운 별』(1988)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1989), 앞의 세 권의 시집에서 고른 62편의 시를 실은 시선집 『달의 무게』(1996), 그 이후『깨끗한 손』(1996),『빛의 파종』(1999)을 남겼다. 이번의 미발표 시들은『빛의 파종』(1999) 이후의 오랜 침묵이 단순한 휴지休止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한 마디로 정중동靜中動의 사유를 건너온 10편의 시는 이충이 시인의 시업詩業을 완결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이 10편의 시들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찾아보기 위해서는『빛의 파종』까지의 시편들을 개괄하고, 시인이 표명한 시관 詩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충이 시인이 밝힌 시작詩作의 지향점은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 드러난다.

 

나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위한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 또한 오늘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며 우리 시대가 겪는 역사성을 시 정신에 담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시를 통해서 자유의 길을 찾고 있다.

-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서문

 

내 자신과 이웃의 갇힌 삶의 풀이를 위하여 나는 노력해왔다 새로운 시세계의 문 열기는 나의 가까운데 있는 듯 했으나 실은 어려움 뿐 이었다. 여러 가지로 절망적인 일상, 어느 때는 손발 둘 곳이 없었다. 그러나 저기 눈꽃을 하늘로 밀어올리는 봄꽃, 봄의 산을 바로 보자. 산 위에 잠시 이내로 머물고 있는 눈꽃의 몸이여, 일순의 삶이라 할지라도 이제 너는 하늘로 오를 수 있겠구나

 

- 『저녁강에 누운 별』서문

 

위의 언명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현대사現代史의 슬픈 와류 속으로 속절없이 스러져간 민중, 폭력이 주는 질곡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민중을 아우르는 ‘사람’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시집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시로 강열하게 열린다.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

 

- 「찬란한 비밀」 전문

 

시는 오독誤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음으로 한 때 이 시를 연시戀詩로 읽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오직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니, 그 그리움의 실체는 과연 어떤 이였을까?

 

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고

우린 또

무얼 기다리는가

 

등 돌려

밀어뜨리는 저 아귀

돌처럼 굳어

뒷전에 서 있는 것들

 

떴다 사라지는

별빛이라 생각하자

새벽하늘 흐르는 얕은 강가

한 가닥 모래바람으로 남을건가

 

어려운 때를 당해

지천으로 무너져 내리며

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는다는데

 

이 한 목숨 아껴

아침 밥상에나 태연히 나앉은

우리 식솔들

또 멀겋게 살아가느니

 

- 「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고」 전문

 

시인은 폭압에 항거하고 먼저 산화하여 빛으로 남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누가 물어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어려운 때를 당해 / 지천으로 무너져 내린’ 억울한 희생 앞에서 ‘이 한 목숨 아껴 / 아침 밥상에나 태연히 나앉은’ 현실을 부끄러워하며 때묻은 삶을 곧추 세운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별’, ‘빛’, ‘사람’이 표징하는 바를 단순히 낭만적인 서정적 자아의 감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운룡이 시집 『저녁 강에 누운 별』을 ‘도시공간의 서정성’이라 평하면서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내면에 불안한 시대의식, 분단현실의 비극 등을 함축하고 있음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나. ‘이충이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퍼스나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충이 시인이라기보다는 그를 포함한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니 그와는 관계없을는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관계에 얽매여 떨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민과 동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문득문득 노출되는 시인의 모습이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자세임을 고려할 때, 그의 내면에는 뜨거운 행동화의 욕구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속과 비속성의 거리」)라고 이충이 시인의 서정抒情을 분석한 윤석산尹石山의 분석은 이충이 시인이 걸어가고자 했던 시의 길을 조명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

 

요약하면 이충이 시편의 중심인 ‘사람’은 한 개인을 넘어서는 총체적 ‘민중’이며 그 ‘민중’은 시대의 아픔을 걸머지고 사라져 빛으로 남은 자들이기도 하다. ‘빛’과 ‘별’이 상징하는 우러러 봄과 희망은 그리하여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과 등가等價를 이루는 것이다.

 

3.

 

이와 같은 시인의 공고한 의식은 유고시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끝나지 않는 가난과 익숙한 고통을 / 간직하며 오래 속아온 세상 ’(「빛의 바퀴」-해방절 ), ‘저 붉은 4월의 비명 뒤에 서서 / 우리는 휩쓸리고 여전히/ 어딘가로 가는지 모르’( 「4월의 빛」)는 현실은 ‘사월혁명(1960.4.19.)’이나, ‘광주 혁명(1980.5.18.)’, 시인이 해방절이라 명명한 ‘8.15 광복절’과 같은 역사의 분기奮起가 아직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있음을 아파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는 여전히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았다는 시인의 낮은 목소리는 어쩌면 동어반복의 메아리로 시인의 가슴 속에 응혈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끝끝내 빛으로 남아 있는 인간다움의 세상을 꿈꾸고 있음을 이번 시편들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바다 건너 성산포 일출봉 앞 동네에

유채꽃보다 노란 배추꽃이 먼저 핍니다.

어딘가에 있을 빛의 탄생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생애

찬란히 피어나는 겨울꽃을

더는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겨울 속의 봄을 만날 것입니다.

 

- 「겨울 속의 봄」

 

빛의 바퀴는 더 낮은 곳으로 굴러

굴러 내려가서 잠자는 돌 속에

별꽃을 피운다, 어디든지

함께 가서 마침내 빛의 문을 연다

 

- 「빛의 바퀴」 –해방절

 

어딘가에 있을 빛의 탄생과 잠자는 돌 속에 마침내 빛의 문을 열리라는 시인의 희망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지만 그가 얼싸 안아야 할 세상은 오지 않았고, 이미 다른 세상에 당도한 낭패감이 그의 시들을 노트북 안에 잠들어 있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짐작하건대, 미발표 시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 「우도牛島에 다녀와서」에서 그런 격절의 소회를 느껴볼 수 있다.

 

내 마음 구석구석에 피었던 눈꽃들이

이제 하나씩 시들어간다

바다에 내려와 어둠이

짜디짠 앙금 되어 번지는 저녁 때

부서진 산호 알이 되는 꿈을 꾸며

몇 차례 눈발이 날렸다

 

내가 몇 해를 두고 기다렸던 이를

마음 밖 바다 멀리

바라볼 수 없는 나라로

떠나보내는 것 같고

내가 이제 만나

우리 함께 걷던 외로운 섬길

우도를 떠나야 할 것 같아서

목 잠겨 허리 꺾으며

꽃불 밝히는 쑥부쟁이를 꺾어든다

 

- 「우도牛島에 다녀와서」1, 2연

 

‘내가 몇 해를 두고 기다렸던 이를 / 마음 밖 바다 멀리 / 바라볼 수 없는 나라로 / 떠나보내는 것 같’은 상실감은 시인이 꿈꾸고, 노래하고, 얼싸안고 춤추고 싶었던 세상이 오지도 않았다절망의 국면과는 다르다, 조심스럽게 추측하여 본다면 견자 見者로서 시인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세계가 다가옴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불현 듯 다가온 디지털의 세계, 가상현실의 세계는 곡비哭婢가 필요하지 않은 프로파간다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감을 예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사람’의 ‘사람다움의 세상’을 끝내 소멸하지 않는 ‘빛’으로 ‘갇혀 있는 물이 아니고 / 흐르는 물’ 로 멈추지 않는 ‘만유萬有의 생명’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주관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긴 침묵은 이와같은 현실에 응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유를 과감히 폐기하는, 생물生物의 시, 전위 前衛의 시가 필요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4.

 

위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이충이 시인이 끌어안은 서정은 자연에의 순응이나 탐미에 머물러 있지 않다. 1993년 계간『시와 산문』을 창간하고, 1997년 ‘녹색문학정신 즉 생명주의를 추구하는 문학 활동을 지원 고양’할 목적으로 녹색시인협회를 창립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충이 시인은 시인이 마땅히 구유해야 할 강건한 세계관과 더불어 예술이 걸어가야 할 창조성으로 강건한 세계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도전의식이 필요함을 감지했던 것이다.「오늘의 시는 무엇인가」라는 글은 자신의 시작詩作을 멈추는 대신에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창하는 이충이 시인의 시관을 드러내는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오늘의 시, 즉 녹색시는 생명주의生命主義이며, 생명에 대한 경외이다. 입을 모아서 합창하듯이 말하는 환경시나 생태시가 아니다. 쉽게 말해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녹색시이다.

 

시인은 ‘생명은 성(性)인 동시에 성(聖)’이라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성性을 통하여 이어지는 생명, 그러면서 고정된 매커니즘을 거부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생명이기에聖스럽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생명을 규정할 때, 지금껏 우리가 수행해왔던 시의 정의定義는 일순간에 무너지고 ‘시인이 만들어내는 시의 정체성이나 동일성을 찾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다시 부연한다.

 

오늘의 시는 리얼리티의 환상에 젖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이나 사물의 내면에서 아름다운 생명이 드러난다. 이것은 숨은 미학의 재발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시대의 광기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시인은 우리의 고단한 삶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라도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오늘의 시, 즉 녹색시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충이 시인은 오늘의 우리가 맞이한 불확정 시대의 예측불가능한 삶, 경계가 사라진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버린 이성의 함몰을 돌파해나가기 위해서는 고정된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역동力動의 시학 詩學, 녹색시가 필요함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충이 시인은『시와 산문』과 녹색시인협회를 기반으로 ‘만유의 생명’의 패러다임을 변화의 양상으로 받아들이고 그 변화의 양상을 이미지로 대체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광기狂氣를 치유하는 실험과 도전의 시학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와 같은 기미幾微를 다음과 같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어깨죽지에 날개가 솟아난다

고장난 시계바늘이 다시 움직인다

모두 일어나서 서두는 아침마다 해가 솟는다

밤새 차갑다가 아침마다 따뜻해지는 흰 깁

모두 땅 속으로 스민다 모든 지면의 활자들이

살아 움직인다 불꽃의 심장이 박동한다

 

- 「해가 솟는다」마지막 연

 

이 시는 눈이 내린 밤과 해가 솟아오른 아침까지의 외적인 서경과 내면의 서정을 희망의 메시지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시이다. 이 시를 시인이 말하는 메타 텍스트 meta text, 현상을 넘어선 본질, 즉 존재의 양상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완곡하게 볼 수 있겠다. 밤새 내린 눈의 본질과 녹아가는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을 ‘어깨죽지에 날개가 솟아난다’거나 ‘고장난 시계바늘이 다시 움직인다’라고 포착하는 시안 詩眼을 감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5.

 

1999년『빛의 파종』이후 이충이 시인은 녹색시로 명명한, 멈추지 않고 고착되지 않는 생명의 본질을 메타 텍스트로 찾아내고자 노력해 왔다. 여러 난관으로 녹색시의 선두에 서는 전범典範은, 그의 뒤를 잇는 이현애, 정승화. 김명아, 주영란 등과 같은 시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번 10편의 시는 이충이 시인이 추구해온 ‘사람’과 생명에의 외경畏敬을 공고한 염결성으로 남겨준 소중한 선물이다. ‘짧은 인생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새롭다.

 

* 이 글은 계간 시와 산문 2021년 여름호에 게제할(된) 것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