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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남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 삶의 경계와 아타락시아ataraxia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2. 23. 12:33

跋文

삶의 경계와 아타락시아ataraxia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 Es ist gut!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

 

이신남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시집이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만으로 이 시집의 전모를 단정지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추모를 넘어서서, 그 추모의 마음이 일으키는 파장은 추모 너머에 숨어 있는 삶의 풍경들에 가 닿아서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삶의 배후를 상기하게 한다. 애써 피하고 싶은 죽음의 그늘과 개인과 가족이라는 사회적 관계의 의미를 되묻게 하면서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의 고마움을 온전하게 느껴야하는 당위성을 當爲性를 더듬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당연하게 나는 오늘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그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한한 행복은 한갓 꿈에 불과한 것이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한 몸이라는 것을 잊은 채, 안락安樂의 권태가 허물어지는 순간, 슬픔과 분노의 광포함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지고, 일상의 질서가 헝클어질 때의 참담을 겪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태어나는 괴로움(生苦), 늙어가는 괴로움(老苦), 병듦(病苦), 죽음(死苦)를 네 가지 괴로움이라고 하고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애별리고愛別離苦), 원한으로 맺어진 사람들과의 만남(원증회고怨憎會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구불득고求不得苦), 인간이 구유하고 있는 물체인 색, 감각인 수, 인식하는 능력인 상. 욕구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행. 마음인 식이 일으키는 괴로움(오음성고五陰盛苦)를 일러 팔고八苦라 하였다.

 

무한한 즐거움이 없음을, 영원한 지상의 삶이 덧없음을 알면서도 짐짓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은 오늘의 삶에 고통을 안겨주는 원인이겠으나 범인凡人은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욕망을 일으켜서 그 욕망이 빚어내는 탐내고, 화내는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울지 마라, 잘 살았다는 이런 욕망의 삼독三毒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제행무상 諸行無常을 마주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 Being towards death’로 규정하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존재로서,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진실한 삶과 허위의 삶이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인식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한 삶이라면- 이는 자살과는 다르다 죽음을 애써 회피하는 삶은 가짜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인다 해도 죽음 그 자체를 온전한 의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앙의 힘이나 체념과 같은 불완전한 의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죽음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역경 逆境일 뿐이다.

 

몇 십 만원을 주고

해마다 하는 검진에서는 소용이 없었던

흔하지 않은 암세포종이라 치료약도 없는

이미 뼈까지 전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다리가 휘청거려 주저앉았던

침샘암,

서울대 병원 암센터에서 내린 병명

치료약이 없단다

 

당신의 침샘은 막히고

내 눈물샘은 터지던

그날은 20188월 이었다

 

- 청천벽력전문

 

청천벽력 靑天霹靂은 뜻 그대로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뜻밖의 일이다. 그 누가 청천벽력 같은 일과 마주치기를 반기겠는가? 을 얻어 환자가 되는 일, 그 환자의 아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조차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청천벽력에 굴하지 않고 죽음에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늘밭마을, 자연속이다

유배지라고 굳이 이름을 정한 이유는

써니포 친구 중에 유독 남편을 좋아하는 친구가

내게 내린 벌이라며 유배를 보낸 거라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친구다

방 한 칸에 작은 거실

편백으로 만들은 좁은 집이다

마흔다섯 평 넓은 집을 텅 비워 놓고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서

소꿉살림을 차렸다

산길을 걸으며 자연에 묻힌 채

손을 잡고 걷고 또 걸었다

다리가 걸음을 허락하는 날까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웃음을 울고

울음을 웃으며 그렇게

당신과 나의 가을을 보내기로 했다

 

- 유배지 일기 1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시대로의 급격한 변화는 주거住居의 방식, 가족의 개념, 공동체 삶의 양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무한경쟁시대의 가족은 서로를 유배 流配시키는, 그 유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관계로 바뀌고, 경제적 풍요가 행복의 척도가 되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허용되었던 것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서 /소꿉살림을 차

리는 일이나 산길을 걸으며 자연에 묻힌 채 / 손을 잡고 걷고 또 걷는 일, ‘웃음을 울고 /

울음을 웃으며 그렇게 / 당신과 나의 가을을 보내기로한 일들은 오래 전 애틋했던 젊은 날로 돌아가는 희망의 유배로 상기되기에 충분하다.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1부에 실린 유배지 일기연작이나 투병일기연작은 역설적이게도, 당연한 듯 하여 무덤덤했던 일상에서의 교감交感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보여준다. 혼자 누우니 / 힘든 하루가 되고 / 나란히 누우니 / 애틋한 눈빛이 되는 / 고독에도 향기가 있다는 것을’( 외딴방부분) 우리는 오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명의 길, 소멸의 길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다. 생명에는 본래 종말이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의 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생명의 지속을 위한 형태의 급속한 붕괴의 현상이 곧 죽음의 현상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더라도 생명은 없어지지 않는다. 죽음은 오직 생명의 한 형식적인 소재가 붕괴되어 다른 형식의 소재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힌두교에서 본 죽음, 정태혁

 

햇살은 참 따스한 손길을 담은 단어이다. 그 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실낱같은 희망과 평화를 어찌 보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햇살병동은 그래서 긴 겨울이 지나고 새 생명이 움트는 봄 같은 병동이다.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2부의 햇살병동연작은 부제로 붙은 호스피스 병동의 암울함 속에서도 절망을 이겨내려는 젊은 부부의 눈물겨운 대화가 절절히 녹아져내리는 사랑의 꽃인 것이다. 호스피스hospice 병동은 적극적인 치료 아니라 환자의 통증을 완화시키면서 마음의 안정을 꾀하는 목적을 지닌 병동을 말한다. 이곳에서 50대의 젊은 부부는 멋쩍고, 어색하여 마음에 두고만 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첫 경험들을 나누게 된다.

 

당신 나 사랑해? / 철부지 아내의 잦은 질문에 /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나 라고 했던’( 햇살병동일기 7)사람이 결혼 27주년을 맞아 환자복 차림으로 / 검은 나비넥타이를 하고 나온 / 당신 패션이 너무 멋있어서 / 서로가 꽃 화관을 머리에 쓴 채 / 마주보며 슬픔을 웃고 있었다’( 햇살병동일기 12)든가, 겁나고 두렵지요? / 두려울 게 뭐 있나 /할 거 다 해보고 조금 일찍 가는 거지/ 그동안 고생 많았다// 장례식 때 까지만 울고 더는 울지 마라 /많이 울면 내가 저승도 못 간다’ (햇살병동 일기 11) 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일이 언제 또 있었던가! 남편의 관장을 하는 일, ( 햇살병동일기 9), 마약진통제가 투여되는 순간에도 컵에 손수 꽃을 꽂아 붉은 꽃다발을 건네주던 마지막 선물은 어찌 보면 손수 만든 생의 첫 선물이 아니었던가!( 햇살병동일기 1).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속마음을 내어주고 서로를 위로하며 생명을 꽃 피웠던 것이다.

 

온전한 마음이다

가까이 마주하며 내 손을 잡는 당신

무슨 말을 하꼬

사랑한다는 말밖에

싸움도 사랑이었고

투덜거리는 것도 사랑이었다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 마라

잘 살았다 아이가

애들 잘 키워줘서 고맙고

내 마누라여서 고맙다

 

여보

당신이 내 남편이어서 고맙습니다

 

- 햇살병동일기 5전문

 

그렇게 한 사람은 떠났고 한 사람은 남았다. 그러나 떠남과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견고한 고리로 이어져 있음을, 남편과 아내로,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이어지는 생명의 영원함을 증명하고 고마워하는 시간이었음을 체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울지 마라, 잘 살았다

 

이 세상에서 죽어 본 사람은 없다. 죽는 순간에 소멸해 버리는 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증명할 수가 없다. 앞 글에서 진실한 삶은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종교의 힘을 빌어 내세의 삶을 꿈꾸는 영생永生은 실현가능한 일인가?

퀴블러 로스 Elizabeth Kubler-Ross “ON Death and Dying”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죽는 사람의 심리는 무조건 죽음을 부인하고 고립화시키려는 단계,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는 분노의 단계, 죽음과 일종의 협상을 벌이는 단계, 협상이 잘 되지 않으므로 의기소침해지는 단계,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로 나뉜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은 이 글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야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이 사라진 존재가 그러하거니와- 어느 단계에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햇살병동일기 5는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삶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온전한 마음으로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울지 말라고, 잘 살았다고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의연함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살병동일기 15

호스피스 병동 햇살방-

 

새벽 6

샤워를 하고 싶었다

머리도 감아야한다는 생각을 하며

귀에다 자기야 샤워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라고 했다

 

씻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고르지 못한 숨소리였지만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감은 듯 떠 있는

당신의 눈이 불편해 보여

간호사를 불렀다

눈 위에 손수건을 올려주란다

산소포화도가 높다

혈압도 맥박도 고르지가 않다

그래도 남은 온기가 있다

집에서 자고 있는 작은 아들을 불러라한다

당신의 발과 다리와 손에 입을 맞췄다

 

제 박자를 놓치며 급하게 뛰고 있는

당신 심장에 내 손을 얹었다

한 때 서로 사랑했던 그 감정만큼 팔딱이는,

그리고

두 눈을 편안하게 감겨드리고 싶은 마음에

깨끗이 소독된 거즈를 올렸다

왼쪽 눈 위에 하나를 올리고

더 거센 숨소리를 들으며

오른 쪽 눈 위에 또 하나의 거즈를 올리며

재원아빠 눈 편안하게 감고 있어요 하는 그 순간

당신의 숨소리가 그쳤고

그렇게 팔딱이던 심장이 멈췄다

 

살 부비며 사랑했던 한 사람의 생이 끝나는 날

2020211일 오전 713

내 심장도 멎을 것 같았던 이별의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처럼 아프고 슬픈 고통이 어디 있을까? 육신은 소멸해도 정령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공자의 제자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 감히 죽음을 묻습니다. 다시 대답하기를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 논어 論語 선진편 先進編 12

 

울지 마라, 잘 살았다에 실린 58편의 시 중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소회를 담은 3부의 19 편을 제외한 시들은 발병發病과 투병鬪病 그리고 운명殞命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다. 함께 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안간 힘과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누며 고인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했던 이 시집은 한 시대를 씩씩하게 걸어갔던 한 사나이의 족적 足跡인 동시에, 유한有限한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만드는 넉넉한 사유를 나누어주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치열하게, 값지게 사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는 공력! 슬퍼하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애이불상哀而不傷! .

일 년이 지났다. 혼자 남은 듯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함께 있다. 하늘나라에서도 가족을 위해 /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보내는 / 당신이 고맙다‘(유족연금전문)

 

Es ist gut!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포도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Es ist gut! 이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참 좋다! 이 말이 포도주를 마셔서 좋다라는 말인지 좀 더 심오하게 자신의 삶이 좋았다라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마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된다. 울지 마라, 잘 살았다! Es ist gut! 는 혼란스럽지도 않고 동요가 없는, 헛된 갈망에서 벗어난 평온의 상태, 즉 아타락시아 ataraxia에 다름 아니다. 영국의 메리 여왕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 속에 품어 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노라.

 

시집 울지 마라, 잘 살았다는 참으로 아픈 기억을 되짚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통찰이 새롭게 돋아나고 있음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늘 홀로 서 있지만 우리의 가슴에는 사랑의 기억이 살아 숨쉬고 있기에 삶의 경계는 무한히 뻗어가고 있다는 긍정의 신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브로드웨이 호텔 206호실

자정을 넘긴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집중호우에

부산에서는 두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인생은 그런 거다

화려한 날 있으면 어두운 날이 있고

가슴에 못을 박는 날 있으면

가슴에 못을 빼는 날도 있는 것

어둠을 밝히려 불을 켜고

밝음을 죽이려 불을 껐다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당신과 나는

마음 안에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혼자서 잠을 잤다

 

- 홀로서기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