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여든다섯, 누에가 실 뽑듯 끊임없이 썼다
등단 64주년 맞은 소설가 정연희, 새 단편 소설집 ‘땅끝의 달’ 펴내
입력 2021.02.17 03:34 | 수정 2021.02.17 03:34
소설가 정연희(85)씨가 최근 단편 소설 다섯 편을 묶은 소설집 ‘땅끝의 달’을 펴냈다. 올해로 등단 64주년. 1957년 이화여대 국문과 학생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한 뒤로 장편 소설 30여 권과 소설집 10여 권을 냈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경기 안성시 밤고개 자택에서 서울 중구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왔다. “나이 여든을 넘고 보니까 늙는 거 자체가 질환입디다. 무르팍이 시큰거리긴 해도 아직은 펄펄 날듯 걸어 다닙니다.” 왼쪽 귀가 어두운 까닭에 주로 오른쪽 얼굴을 보며 대화했다. 그는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5년 동안 사람을 만나고 장소를 탐사했다”고 했다. 구제역 우려가 있는 돼지를 대량 살처분하는 공무원, 바닷가에 쓸려 오는 쓰레기를 치우는 노인, 아기를 상품으로 대하는 미혼모 등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병폐를 그렸다.
여든다섯 나이에 새 소설집을 낸 소설가 정연희는“나는 절대로 종이가 죽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라며“인간은 활자를 종이 위에서 볼 때 감성이 제대로 산다”고 말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그는 “스캔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다닌 여자”라고 했다. 젊은 여성 작가로 화려하게 데뷔해 대중의 주목을 받다가 소설가와 결혼했다. 술 마시고 노름하는 남편의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임신 중절을 거듭하다 서른 살에 이혼했다. 1973년 아내와 별거 중인 남자와 사귀다 간통 사건에 휘말려 검찰청 포토라인 앞에 죄수복을 입은 채 서기도 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에 일어난 ‘정연희 간통 사건’으로 40일간 불구속 수사와 72일간 재판을 받은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정씨는 구치소에서 신앙에 눈을 떴고, 1975년 결혼해 줄곧 함께하다 2008년 사별했다. 자녀를 두진 않았다. 고양이 세 마리, 개 두 마리와 산다.
“혼자 되고 난 뒤에 노동이 많아요. 마당의 잔디와 김도 매야 하고, 배추도 심어 먹고 블루베리 열매도 거둡니다.” 새벽에 일어나 개와 고양이 사료를 준 뒤 오전 11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가사를 시작한다. 오후 2시 서재로 들어가 꼬박 세 시간 글을 쓴다. 그는 “누에가 실을 뽑듯 나에게 쓰는 일은 신성한 노동”이라고 말했다. “하루라도 자판기를 두들기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하다못해 일기라도 정리를 해야죠.”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노트 수십 권이 필요하다. “연구해야 합니다. 어떤 인물들이 무슨 경험을 하는지, 이야기는 어떻게 변화를 줘야 하는지. 미친 듯이 메모해 포스트잇으로 붙여놓고 궁금하면 또 열어보고.” 이후 오후 6시에 밥 한 공기나 토스트를 먹고 기도한다.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아낸 건 기도와 노동, 글 쓰는 작업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밤에는 TV 연속극은 보지 않고 다큐멘터리 채널과 뉴스를 본다고 했다. 평생에 걸친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 새벽 3시쯤 또 서재로 끌려간다.
삶은 계속되고 글쓰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국 근세·근대사를 다루는 소설을 쓰고 있다”며 “양심을 가지고 신에게 보고서를 쓰듯 내가 겪은 해방과 전쟁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방 때까지 써둔 게 200자 원고지 3000장쯤 돼요. 한국전쟁 이야기까지 하려면 1만 장이 될 것 같습니다.”
인기 작가로 주목받던 젊은 날의 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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