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민란에서 식민지까지… 거친 역사가 형제의 삶에 녹아 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8.26 03:12
[226] 다사다난했던 지운영-석영 형제의 일생
이미지 크게보기경기도 안양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는 677년 통일신라 때 원효가 만든 절이다. 삼성산은 관악산이다. 원효 이후 1234년이 지난 1911년 백련거사 지운영이 삼막사에 백련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은둔했다. 김옥균 암살 미수범 지운영은 식민시대에 화가가 되었다. 근대 조선 사진술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그는 백련암 큰 바위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 귀 자 세 개를 새겨놓고 세상을 초월해 살았다. 그의 동생 지석영은 종두법을 도입하고, 동학의 원인 제공자인 민영휘 처단을 주장하고, 동학을 토벌하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고, 근대 의학교를 운영하며 그 모진 세월을 살았다. 형제는 1935년 넉 달을 사이에 두고 하늘로 갔다. /박종인 기자
1935년 6월 8일 토요일 자 '조선일보' 2면에는 짤막한 부음(訃音) 기사가 실렸다. "백련 지운영씨는 6일 오전 여섯시 시내 가회동 이십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얏는데 향년이 팔십사세엿다 하며 氏는 조선 화단과 시단에 중진이엿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6월 10일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영결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세상을 떠날 때 지운영(池運永·1852~ 1935)은 화가요 시인이었다. 50년 전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조선 팔도를 떠들썩하게 한 협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운영은 조선에 사진술을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지운영이 죽기 넉 달 전 동생 또한 세상을 떠났다. 1935년 2월 3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제목은 '종두계 대은인 지석영옹 장서(長逝)'. "조선에 처음으로 우두 넛는 법을 배워 민중에게 실시한 종두술의 대선각자 지석영씨는 1일 밤에 시내 락원동 십칠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엿다. 향년은 팔십세이다."
종두법을 도입한 선각자 지석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는 대구에서 동학군을 토벌한 사령관이었다. 동시에 동학의 원인이 된 탐관오리 수괴 민영휘 처단을 요구한 지사(志士)였다.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은 사람이기도 했고 한글을 대중화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어느 한 가지 자로 재단하기 어려운, 두 형제 삶에 녹아 있는 20세기 초 조선의 만 가지 얼굴을 뜯어보도록 하자.
무술가 지운영의 개안(開眼)
1852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지운영은 어릴 적 취미가 이상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나무를 걷어차는가 하면 수수가 자라면 자라는 대로 하루에 몇 번씩 뛰어넘곤 했다. 새싹이 돋아서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도 뛰어넘었다.(유영박, '백련 지운영의 미공개 문권저책 목록', 도서관연구 vol 22, 1981) 지운영의 아들인 화가 지성채(1899~1980)로부터 앞 논문 저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과장은 있으되 거짓은 없을 것이다.
지운영은 또 시화(詩畫)에 능했다. 1877년부터 지운영은 개화사상가 강위(姜瑋)의 시 모임에서 문장을 닦았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1876년 강화도조약 때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육교시사'라는 그 모임에서 지운영은 개화(開化)를 배웠다. 그리고 권력자 민영목과 연줄이 닿아 관직을 얻으니, 개화를 책임지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말단 주사(主事)였다.(윤효정, '한말비사', p70, 김재한 '백련 지운영의 회화세계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1권, 2010 재인용)
1882년 구식군대 병사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이 죽었다. 그해 8월 박영효를 대표로 수신사가 파견됐을 때 지운영도 일본으로 갔다. 사진(寫眞)을 보았다. 일행은 귀국했지만 지운영은 남아서 사진을 배웠다. 왼쪽 사진은 유학 시절 스승 헤이무라 도쿠베에가 촬영한 사진이다. 그때 조선 권력자들은 사진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1881년 2월 1일 자 일본 '東京日日新聞'은 "오사카 상인이 각국 귀족 촬영을 조선 정부로부터 주문받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고 보도했다.(이은주, '개화기 사진술의 도입과 그 영향', 서강대 석사논문, 2000) 이듬해 귀국한 지운영은 도화원 출신 김용원과 함께 관립 촬영국(撮影局)을 열고 1884년 개인 사진관을 열었다.
개화파 무술가, 자객이 되다
바로 그해 갑신정변이 터졌다. 관직으로 끌어줬던 여흥 민씨 민영목이 죽었다. 사진관은 일본인 소유로 착각한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됐다.(김재한, 앞 논문) 멘토와 재산이 개화파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지운영은 칼을 갈았다.
지운영. 1883년 헤이무라 도쿠베에 사진관에서 촬영(추정). /한미사진미술관
1886년 지운영은 '도해포적사(渡海捕賊使·바다 건너 역적을 잡는 특사)'라는 국서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 암살은 신분이 탄로나며 불발됐다. 그가 송환되자, 고종은 "제 마음대로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며 나라에 수치를 끼친 것이 많으니 엄하게 신문하라"고 명했다.(1886년 6월 10일 '고종실록') 일주일 뒤 지운영이 의금부에 이렇게 자백했다.
"순전히 사적 분노로 나 홀로 쌍검(雙劍)을 갈아서 행한 짓이다. 임금 명령 또한 가짜였다." 고문해서라도 배후를 캐겠다는 의금부 보고에 고종은 "딱히 단서가 없으니 그냥 유배형을 내리라"며 수사를 종결시켰다.(1886년 6월 17일 '고종실록') 고종 정권 때 관료였던 윤효정에 의하면 평안도 영변으로 가던 그 귀양 행렬은 '현지에 부임하는 부사 행렬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적 앙심으로 국익을 해친 자가 그런 호사(豪奢)를?
그럴 리가 없었다. 다음은 지운영이 암살 기도 전모를 기록한 글이다.
"동지들에게 지나온 일의 대개를 밝힌다. 1885년 11월 3일 참판 민병석을 은밀히 만나 얘기를 하고, 이틀 뒤 주상을 만났다. 1886년 정월 10일 다시 주상을 뵙고 국서와 여비 5만원을 받았다 운운."(1886년 4월 그믐날 지운영 서한·번역 김재한 제공, 원문 독립기념관 소장)
고종은 그런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자기 책임을 면탈하고 남에게 죄를 미루는 그런. 지운영은 그런 군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렸다.
함께 유배당했던 동생, 석영
그가 영변에서 유배생활 중이던 1887년, 동생 석영 또한 유배를 당했다. "흉악한 지석영은 우두(牛痘)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로 도당을 모았으니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1887년 4월 26일 '고종실록') 갑신정변 당시 종두법 보급을 가장해 박영효 같은 개화파와 꿍꿍이짓을 했다는 것이다. 고종은 지석영을 완도 신지도로 유배형을 내렸다.
이미지 크게보기지운영이 삼막사 백련암에서 그린 '관음항마일심보검(1920)'. 전업화가로 변신한 그는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관음항마일심보검'도 여러 점이 남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지석영은 개화파였다. 과거 급제 전 고종에게 "'만국공법', '조선책략', '기화근사'(김옥균), '지구도경'(박영효 형 박영교) 같은 개화 서적을 보급하고 근대 기계를 수입하자"고 상소문을 올린 그였다.(1882년 8월 23일 '고종실록')
1879년 지석영은 일본 해군 소속 부산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웠다. 그해 겨울 어린 처남에게 우두를 맞혔다. 사흘 만에 우두 자국이 생겼다. 훗날 지석영은 "과거 급제와 유배 해제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1931년 1월 25일 '매일신보') 5000년 역사를 가진 공포, '호환 마마' 가운데 하나를 없애준 '대은인'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자기 밥그릇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무당들에 의해 종두장이 불타는 수난을 겪었다.(황상익, '7월 19일, 성난 조선 군인은 왜 지석영을 공격했나?', 프레시안, 2010년 7월 19일)
1894년 동학혁명이 터졌다. 지석영이 상소문을 올렸다. "백성을 수탈해 난을 초래한 간신 민영휘를 처단하라."(1894년 7월 5일 '고종실록') 9월 25일 고종은 지석영을 대구 동학을 토벌하는 토포사로 임명했다. 토포사 지석영은 숱한 동학군을 체포하고 처형했다.(이두황, '양호우선봉일기'3 1894년 12월)
1898년 지석영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그해 3월 또 고종 눈 밖에 나 재판도 없이 유배형을 받았다. 거센 여론에 밀려 고종은 석 달 만에 지석영을 풀어주었다.
1907년 지석영이 편집한 '아학편'. 정약용의 외국어 교재 '아학편'에 영어를 보태 만들었다. 한글로 적은 발음이 인상적이다. 2018년 '베리북'이 복간한 판본이다. /베리북
이듬해 3월 지석영은 의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공식 한글 정책인 '신정국문'을 만들어 공포했다. 부산에서 종두법을 배울 때 일본인 거류민용 조선어 교본 '인어대방(隣語大方)'을 교정하며 얻은 문법 지식이 도움이 됐다. 정약용의 외국어 교재 '아학편'에 영어를 덧붙여 지석영 버전 '아학편'도 보급했다. 한글로 적은 발음을 보면, 발음에 관한 한 21세기 영어 교육보다 낫다.
동학 원인을 파악하고 있던 지석영과 농민을 때려잡은 지석영과 의대 총장 지석영과 국어학자 지석영은 동일 인물이다. 1909년 12월 12일 '한자통일회' 주최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한 지석영도 동일 인물이다. 이토 약사(略史)는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이 읽었다.(1909년 12월 14일 '황성신문') 2002년 부산 시민단체 '극일운동시민연합'은 지석영을 친일 인사라 주장했다. 부산시는 그를 '부산을 빛낸 인물'에서 제외했다. 2003년 과학기술부 또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5인에 선정했던 지석영을 제외했다.
두 형제의 식민지
1911년 지운영은 안양에 있는 관악산 중턱 삼막사에 백련암을 짓고 은둔했다. 화가가 된 것이다. 그가 그린 산수화와 인물화는 천하 명품이었고 작품 세계는 '초세적(超世的)'이었다.(1917년 7월 3일 '매일신보', 변경화 앞 논문 재인용) 사람들은 그를 시(詩)·문(文)·서(書)·화(畵)에 능한 '지사절(池四絶)'이라 불렀다.
1928년 9월 21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지석영 공적 50년 기념 기사. 사람 죽인다고 오해받았던 종두법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1920년 5월 20일 자 '윤치호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삼막사 절 옆에는 유명한 미치광이 화가 지운영씨가 살고 있다." 종교에 심취해 기인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바보[痴·치], 미치광이[狂·광], 구도자[禪·선]와 지혜[慧·혜]를 더해 '지팔절(池八絶)'이라 불렀다.(1931년 5월 1일 '별건곤') 지운영은 백련암 바위에 거북 귀(龜) 자를 세 가지 형태로 새겨놓고 살다가 1935년 가회동 집에서 죽었다.
넉 달 전 죽은 동생 지석 영은 생전에도 죽어서도 큰 평가를 받았다. 총독부는 종두법을 대표적인 '일본의 개화 선물'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윤치호는 이렇게 기록했다. "두 형제분은 이 속세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다."(1920년 5월 29일 '윤치호일기') 종두법,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독립협회 그리고 망국과 식민지. 지운영-석영 형제는 그 격동의 역사를 신선처럼 살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5/20200825051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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