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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안과 치유로서의 힐링(Healing)문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9. 9. 20. 15:42

삶의 위안과 치유로서의 힐링(Healing)문학

이준관

 

1.

 

나는 힘든 청소년 시절에 시를 만났다. 호롱불빛 어른거리는 방에 엎드려 목월의 시 청노루를 읽으며 ‘머언 산 자하산에 청노루’가 사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가람 이병기의 가을 “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두고/ 젖 먹는 어린 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를 읽으며 모성이 충만한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열입곱 살 힘들고 고통스런 날에 내게 힘이 되어준 것은 한편의 시였다.

스물한 살 나이 일찍 시작한 교직생활에 아이들을 만나 즐거움도 컸지만 경직된 학교생활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내가 살았던 70년대는 아시는 바와 정치적으로 격동기였다. 그 시간을 견뎌내게 한 갓도 역시 시였다. 시대의 아픔과 어둠을 시로 표현하면서 그 힘든 시간을 극복했다. 나는 그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 한 구절을 읽듯 시 한 편을 읽고 하루를 시작했다. 시 한 편을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미움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러기에 시는 내게는 내 영혼과 몸과 정신을 구해 준 구원자였다. 또한 시는 나에게 간절한 기도였고 신앙이었다. 시는 이렇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다가왔고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생의 동반자로서 여기까지 왔다. 나에게는 따로 내 시론이 있는 것도, 시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를 생각하면 즐겁고 행복할 따름이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정화되고 기쁨이 해일처럼 밀려올 뿐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어째 시를 배우지 않는가? 시는 사람의 마음을 감흥시키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게 하며, 남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하고, 남의 잘못을 원망할 수 있게 한다.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는 것을 가르쳐주고, 멀리는 주군을 섬기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많은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가르쳐준다.” 라고 했다. 시가 어찌 유교적인 충효만 가르쳐 줄까. 사람의 참된 길을 가르쳐주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고 자연과 사물의 이름과 이치를 가르쳐 준다. 그뿐만 아니다, 시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살아갈 지헤와 힘을 준다.

 

2.

 

시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배우고 써야 한다. 유명한 시인이 되겠다고, 무슨 상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시를 쓰게 되면 시는 위안도 행복도 아닌 고통일 뿐이다.

 

그래서 문학하는 첫 번째 자세는 ‘즐거운 마음’으로 쓰라는 것이다. 무사무욕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 감동 아닌 것이 없고, 신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두 번째는 ‘관심과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다. 황동규 시인은 “호기심이 없는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라고 했다. 가족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날마다 접하는 자연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어찌 시가 발 發하겠는가. 관심을 가지면 절로 시가 발하고 사랑이 싹튼다.

 

세 번째는 ‘남의 마음이 되어보기’이다. 연탄의 마음이 되어본 사람은 함부로 연탄재를 차지 않는다. 이별한 사람의 마음이 되어보면 소월처럼 절절한 사랑과 이별시가 나오게 될 것이다.

 

네 번째는 ‘감동의 마음을 가져라’이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가 기적이 아니고, 감동이 아닌 것이 없다. 시는 감동의 울림이 있어야 한다. 감동의 눈, 경외감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기를 당부한다.

 

다섯 번째는 ‘생각의 힘을 기르라’는 것이다. 자연과 사물을 의미화하고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사유의 힘이다. 고독 속으로 침잠하여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자연과 현실과 세계를 올바르게 보고 깊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숨겨진 비의를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사랑과 감정의 예술적 표현이다. 그리기에 마지막으로 ‘예술적 표현’에 힘쓰기를 당부하고 싶다. 아무리 사상이 높고 감성이 풍부해도 예술적 표현이 미숙하면 좋은 문학 작품을 쓸 수 없다. 부단히 문장 수련을 하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그러려면 좋은 시를 많이 읽고 다양한 독서를 해야 한다.

 

3.

 

시를 어떻게 써야 할까?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누구나 시를 쓸 때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나라고 무슨 비법이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오랜 경험으로 얻어진 체험적 시법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제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줄까 한다.

 

먼저 무엇을 쓸 것인가를 말씀드리겠다.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잘 아는 것은‘나’와 ‘가족’‘친구’, 또는 살면서 만난 사람, 일상생활 속의 사건이나 현상, 자연물과 자연 현상, 자신의 내면의 관념과 감정 등이다. 그러나 자기가 잘 아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아무래도 경험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만나기 위해서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길을 걸으면서 본 인상적인 풍경과 가슴에 와 닿는 감흥을 시로 옮긴다. 그래서 유독 길에 관한 시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구부러진 길을 가면/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구부러진 길」

 

앉아서 쓰기 보다는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어보고 쓴다. 어느 산만 그리는 화가를 보고 한 사람이 당신은 왜 산을 매일 찾아가느냐고 물었단다. 방에 앉아서 머리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리지 뭘 똑같은 산을 찾아가냐는 힐책이다. 그러자 그 화가는 똑같아 보이지만 갈 때 마다 산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보고 들어보아야 진정성 있는 시가 나온다. 생활 주변을 관심과 애정을 갖고 유심히 지켜보고 사람들이 사는 풍경과 자연의 풍광을 눈여겨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거기에 시가 날것으로 있다.

 

시는 주제(의미), 심상, 음악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심상과 음악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게 시이다. 이 중에서 나는 심상을 중요시한다. 시를 잘 모르는 친구가 시가 뭐냐고 ane기에 참 난감했다. ‘시는 사상과 감정의 예술적 표현이다’가 모범 답이다. 그런데 나는 좀 생뚱맞게 ‘시는 비유다’라고 말해주었다. 시의 일면만을 말한 것이지만 시를 쓸 때 잊어서는 안되는 게 비유이다. 한시의 전형적인 창작 기법으로 시상을 전개할 때에 먼저 자연이나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고 난 후 시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읊는 선경후정이나 형상을 세워서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하는 입상진의도 묘사, 비유, 심상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좋은 시인가 아닌가는 비유가 참심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신한 비유로 형상화되지 못한 시는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다.

 

 

내가 사는 아파트 가까이/ 버려진 땅을 일구어 사람들은 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촘촘히 뜨개질을 하듯/ 심은 옥수수와 콩과 고추들,/ 꿀벌이 날아와 하늘로 꽁지를 치켜들고/대지의 꿀을 빨아들이고,/ 배고픈 새들은 내려와 / 무언가를 쪼아 먹고 간다.//

아파트 불빛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제 가슴의 빈터를 메우듯/호미를 들고와 흙을 북돋워주고 풀을 뽑는다 / 옥수수 잎에 후드득 지는 빗방울은/ 사람들의 핏방울로 흐르고,/ 저녁에는 푸른 별 같은/ 콩이 열린다.//

흙 묻은 손으로/옥수수와 콩과 고추와 나누는/ 말없는 따뜻한 수화,/사람들의 손길 따라/ 흙은 선한 사람의 눈빛을 띈다.//

가을이면 사람들은 흙 묻은 손으로/ 발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흙에서 태어난 벌레들은/ 밤늦게까지 식구들의 옷을 짓는/재봉틀 소리로 운다.//

슬프고 외로울 때면/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는 사람들,/ 겨울에는 시리고 적막한 무릎을 덮는 / 무릎덮개처럼/ 눈이 쌓인다,/ 사람들이 일군 마음의 밭에.

- 「흙 묻은 손」

 

 

이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시는 많은 비유의 얼개로 짜여져 있다. “뜨개질을 하듯”“빗방울은 사람들의 핏방울로 흐르고”“푸른 별 같은 콩”“따뜻한 수화”“재봉틀 소리로 운다”“무릎덮개처럼”등이 그것이다. 이런 비유적 이미지들이 이 시를 생동감있게 하고 생기있게 하고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살아 숨쉬게 한다. 나는 대상과 상황에 맞는 정확한 비유를 찾는데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다. 영화에도 명장면이 있듯이 명시에도 명구절이 있다. 그 구절은 대체로 심상과 관련된 것이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서정주 「국화 옆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김광균 「추일서정」)등이 그것이다.

 

시의 비유는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대개 실패한 시들은 비유가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경우이다. 나는 새로운 비유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런다고 해서 엉뚱한 비유를 찾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가 아름다운 것은 비유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내 시에 쓰인 비유 몇 개를 소개해 보겠다.

 

 

“지금도 인절미 같은 눈이 내릴까”(「 떡집이 있던 골목길」)

“가난한 아이들의 머리를 성탄목처럼 아름답게 깎고 다듬어주겠다”(「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어린 날 다친 무릎에 어머니가 발라주던 빨간 약 같던 저녁놀이 보인다.”(「하모니카의 행복」)

“따스한 도시락 같은 시골 버스”(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들판엔 어둠이/ 어머니의 밥상보처럼 살포시 덮이고”(「저녁별」)

“저녁쌀 씻는 소리로 우는 벌레 소리들......”(「들녘의 하루」)

“문득 내 손에 쥔 벼이삭이 /늙은 어머니의 틀니처럼 무거워진다”(「허리를 굽혀」)

 

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에서 추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 추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도 마찬가지다. 은유와 상징으로 된 추상적인 시가 요즘은 많다. 특히 젊은 세대의 시에 많다. 그것은 젊은 세대에겐 구체적인 체험이나 깊이 있는 삶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추상화된 시는 감동도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그러기에 나는 내 시가 구체적이기를 소망한다.

 

내 시에 큰 영향을 준 시인 중의 하나는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주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그 감자가 정말로 진짜임을 보이기 위하여 흙이 잔뜩 묻은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깨끗하게 씻은 감자를 보고도 그것을 진짜 감자로 인정하려는 사람의 두 가지 유형을 말한다. 나는 이 둘 중에서 후자를 택하고 싶다. 예술의 사명은 인생을 정화시켜 주는 것으로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로버트 프로스트처럼 시의 사명은 인생을 정화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의 분노와 미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엔 그런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했지만 지금은 감정이 맑게 가라앉아야 시가 써진다.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새떼도 밟지 않은 저녁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 촌락들은/ 마지막 햇빛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뜯어가려 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어머니로 가득하다/ 게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새끼 게가 되어 돌아오고/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지붕 위에 초승달 뜨고/ 오늘 저녁/ 딸 없는 집에서는 / 저 초승달을 데려다가 딸로 산아도 좋으리라.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이 시는 장인 장례식을 치르는 날에 쓴 시이다. 흔히들 죽음의 슬픔과 허무를 말하지만 나는 죽음이 있으므로 신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새떼들도 밟지 않는 아름다운 저녁놀, 새끼를 밴 암소, 새끼 게가 되어 돌아오는 아이들, 목책으로 돌아오는 하늘, 새로 뜬 초승달 등 모두 새로운 삶의 태동을 암시하고 있다. 죽음이 있기에 새로운 생명의 태동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죽음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서 위안이 된다.

 

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이 시에 담기도록 노력한다.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사랑할 때 아름다움은 우리 내부에서 태어난다. 아름다운 세상을 드러내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현실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시적 진실이다.

 

교외선 기차에서 내린 딸은 /코스모스 꽃을 향해 달려간다/코스모스 꽃의 허리를 가진 딸은/ 꿀벌의 날갯짓에도 흔들린다//

아들은 염소처럼 매해해 운다/ 염소의 뿔이 되고 싶다는 아들/ 그 뿔에 들꽃이 걸린다//

하늘빛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아내는/ 낯선 집 장독대에 핀 맨드라미를 보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장독대 위 낮달의 손톱에/ 여름에 물들인 봉숭아꽃물이/ 아직도 엷게 남아 있다//

길가에 알밤이 떨어져 있다/ 아들은 알밤을 주우며/ 이 알밤도 우리 가족이야, 하고 말한다/ 저 가을 하늘 울타리가 파랗다

- 「가을, 가족 나들이」

 

이 시처럼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시에서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갑니다“(「혼불」의 최명희 작가의 말)”“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모두 살다 가게 하려고 한다. 나는 시를 통해서 그런 꿈을 이루고 싶다.

 * 이 글은 『온글』(2015년 제 15집)에 특집으로 게제된 것을 옮겨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