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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9. 8. 21. 13:03

시란 무엇인가

박태상(문학평론가)

 

 

시란 언어예술인 문학의 영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양식이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구하였지만, 간단한 해답을 내리기는 어려움만을 깨닫게 되었다. 즉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는 엘리어트의 말과 같이 시에 대하여 일관성 있는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에 대한 정의는 인간의 존재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처럼 난해하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M. H. 에이브럼즈의 견해에 따라 모방론, 효용론, 표현론, 존재론에 따라 시의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모방론과 효용론은 동, 서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시의 정의이다. 영국 문학비평의 첫 고전이 된 시드니의『시의 옹호』에 의하면 시는 모방예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 mimesis(즉 재현, 묘사, 또는 모사) 이라는 낱말로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에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가 사물 그 자체, 특히 우주, 자연의 실재, 삶의 원리, 이념, 진리를 모방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시의 정의이다. <그림은 말 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시모니데스), 모방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연의 모방이고, 또 하나는 시인의 모방이다. 우리는 전자를 독창적이라고 한다>(영), <시는 찌그러진 사실(역사)를 아름답게 만드는 거울이다>(쉘리) 등등은 모두 모방론에 속한 시의 정의들이다. 시는 즐겁다, 유익하다, 즐겁고도 유익하다, 가르치고 즐거움을 준다 등등은 효용론에 속한 시의 정의들이다.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라고 하여 그 모방에서 기쁨이 발생한다고 보았으며, 무목적의 합목적성을 예술의 기본 성격으로 본 칸트는 예술유희설에 입각하여 예술의 미적 쾌락을 주장하고 그것을 무관심의 기쁨이라 하였다. 엘리어트는 시를 일종의 ‘고급의 오락’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모두 쾌락주의적, 심미주의적 견해이며, 시를 효용론에서 본 것이다.

 

표현론 또한 모방론과 마찬가지로 시가 단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그친다고 보지 않고, 우주, 자연 및 삶의 현실을 구현, 상징한다고 보았다. 다만 다른 것은 삶의 현실을 구현할 때 하나는 보편적인 이성에 의한다면, 다른 하나는 극도로 주관적인 상상에 의한 것이다. 말하자면 시를 개인의 감정의 표현으로 보는 일이다. 시를 이렇듯 감정의 표현으로 본 것은 주로 시를 형식과 내용면에서 본 19세기 낭만파 시인과 비평가들이다.

 

마지막으로 시 자체의 객관론에 치중한 것은 주로 현대의 시인, 비평가들이다. <우리가 시를 연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주로 시로 보아야 하지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엘리어트)나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만큼 랜섬과 같이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그 작품 자체의 자율성>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말로 바꾸어 질문한다.

 

<좋은 시라는 것은 내포와 외연의 극단적 대립에서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이다>(테이트)라든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웨렉과 워렌)라든지, <시는 언어의 건축물>(하이데거),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다>(엘리어트), <모든 낱말은 한때에는 한편의 시였다. 모든 새로운 관련성은 하나의 새로운 낱말이다>(크라크) 등은 시의 객관론에 의존한 시의 정의다. 시의 객관론에 의하면 시가 가지는 비의나 제재보다는 모든 시에 공통된 비유나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된다.

 

시의 특성

 

1. 시는 인식이다.

시는 인식이다. 시의 인식이란 부정하면서 자기를 지양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언어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의 변증법과 같은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를 인식하면서 그것을 다른 그 무엇으로 바꾸는 일을 말한다. 바꾸어진 그 무엇이 다름 아닌 형상이다. 즉 구체화하는 힘, 형상을 꾸미는 힘, 형상하는 힘이 인식인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요즈음은 인식이라는 말 대신에 상상이라는 말이 곧잘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보아내는 것이 다름 아닌 상상이다. 보아낸다는 것은 여태 있어 본 적이 없는 그 무엇인가를 새롭게 꾸미는 일이다. 시인을 매양 창조자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블레이크(Blake)의 말과 같이 시인은 눈을 통하여 보는 것이지, 눈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 보여지는 대로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볼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낸다는 것은 세계를 자아화 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가 누리는 시적 인식으로 가능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함으로써 시인은 세계를 재편성하고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면서 시인은 내재적이고 잠재적인 세계까지 드러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식에 의하여 무엇인가를 존재의 밝음 속에 있게 하면서 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나의 참 모습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보는 것이란 바깥을 보면서 결국 안을 보는 일이다. 시인 아닌 사람도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아닌가 ?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끊임없이 바깥만을 보고 있다.

 

 

그만큼 막연하게 밖에 보지 못한다. 안과 밖의 관련 밑에서 비로소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시는 시인에게 있어 자신을 비쳐보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나를 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되비친 나를 보는 것이다. <시는 인식이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바깥세계를 보면서 자신의 내부에 잠재된 내밀한 나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내밀한 나는 정확한 이름이 없지만 시인은 보는 것을 통하여 이름 없는 본래의 나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기에 주베르(J. L. Joubert)는 시의 본질은 진실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보는 일이란 외향시선의 내면화에 의한 자기인식 내지 자기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2.내포의 언어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언어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시어는 언어를 내포에 의해서 사용한다. 이런 언어의 사용을 함축적 의미에 의한 사용이라고 한다. 시어는 언어와 표현대상과의 관계가 외연적 언어와 달리 1 : 1의 관계로 설정되지 않는다. 이 경우 언어에 대해 표현대상이 맺는 관계는 항상 복합적인 비율로 나타난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방향으로 언어가 사용되어 비유, 비약, 생략 또는 상징 등의 용법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정지용의 ⌈카페 프란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삐쪽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 간다.

 

⌈오오 패로 서발! 굿 이브닝⌋

⌈굿 이브닝⌋( 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빰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 강아지야

내발을 빨어다오

내발을 빨어다오

 

시를 이해함에 있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인유의 요소를 감득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인용부호 없이 인용되어 중첩된 울림을 갖는 인유는 그것이 간결하고 짤막할 때 쉽게 인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작자의 의식 여부와 관계없이 인유는 선생 작품과의 대조를 통해서 작품에 밀도를 더해주고 고도의 암시성을 부여한다.

 

반드시 인유가 아니더라도 특정 의상이나 동작이 겉보기와 달리 고도의 암시성을 획득하는 수가 있다. 시작품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고도의 암시성에 민감해지고 충실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또 옛 작품인 경우엔 당대에 대한 시사를 읽어내는 것도 특별히 중요하다. 1926년에 발표되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애송되었던 ⌈카페 프란스⌋는 시대에 대한 참조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서양 쪽 외래어가 빈번히 나오는데 얼마쯤 이례적이며 정지용의 초기 작품임을 시사한다. 서정시의 화자가 반드시 시인 자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무대가 일본이고 작품이 시인의 일본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반부의 어조에는 까불이 장난기가 엿보인다. 15행 근처에서 어조의 변화가 일어나고 17행에서부터 슬픔의 감정이 앞으로 드러난다. 굳이 정의해 보자면 장난기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비애감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도입부에는 카페 프란스의 간결한 묘사가 보인다. 장명등이란 밤새 켜두는 등을 가리킨다. 이어서 카페로 가는 세 사람을 보여준다.

 

<이놈>이 입은 루바쉬카는 블라우스 비슷한 러시아 남자의 상의이다. 역시 1920년대에 발표된 일본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동경제국대학생⌋이란 시에 <안경/하오리/루바쉬카/단추 직경이 한 치나 되는 외투가 있다>는 대목이 보인다. 사회주의 사상이 풍미하기 시작한 이 시절에 루바쉬카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보헤미안 넥타이> <삐쩍 마른 몸> 등 동행 청년들이 모두 가벼운 차림인 양 보인다.

 

불빛에 비치는 밤비를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라고 한 것은 이미지스트로서의 일면을 지닌 정지용의 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로서는 참신한 직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흐늙이는 불빛>의 <흐늙이는>은 다소 모호하나 <흐느적거리다>의 뜻인 <흐늑거리다>라면 가볍게 흔들린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거기에 <흐느끼다>의 뜻이 첨가되어 있다고 보면 도리 것이다.

 

<비뚜른 능금>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몸>은 서두에 나온 세 사람에게 각각 연결되는 이미지이다.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자조적인 자화상으로 읽으면 더욱 그럴싸해 보인다. <벌레 먹은 장미>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를 딛고 서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벌레 먹은 장미>의 심장을 지닌 청년이 사랑을 앓는 이라는 시사가 있든 없든 세 청년이 씩씩하고 늠름한 젊은이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제 13행은 카페 초입께에 있는 앵무새에게 건네는 인사말이요 14행은 앵무새 쪽의 응답이다. 튤립이란 별명의 카페 아가씨가 졸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프란스는 손님이 끓는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세 사람이 이곳 단골인지는 모르나 특별히 환영받는 처지도 아닌 것 같다. 이 언저리에서부터 어조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란다>고 화자는 독백한다. 명문가의 후예도 부잣집 아들도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자작의 아들>인가 ?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인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는 조선인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른바 한일합방에 협조했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한 인사에게 귀족의 지위와 함께 불로소득의 소비생활을 보장해 준 것이다. 이들 및 이들의 2세들이 현해탄 이쪽저쪽에서 유탕생활에 탐닉하였고 특히 가난한 유학생들의 노여움을 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작의 아들>이란 이런 조선인 난봉꾼들을 가리킨다. 요즘 같으면 재벌의 아들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정지용의 시에서 손을 의식한다는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자성하거나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루바쉬카를 걸친 창백한 인텔리는 한때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19세기 러시아 소설 속에 되풀이 출몰하던 <잉여인간>의 계보를 떠올리게 한다. <비뚜른 능금>의 머리를 얹고 있는 시의 화자가 사회 속에서 설 자리와 제자리를 갖지 못하는 <잉여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뚜른 능금> 청년이 <벌레먹은 장미>청년과 함께 정상적이지 못한 불우 청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서 계속되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는 문맥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탄식이 된다.

 

끝으로 <이국종 강아지>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라와 집과 가진 것 없는 식민지 출신 청년의 비애감은 절제된 채 완결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당대에 큰 호소력을 발휘하여 인구에 회자되고 정지용의 시인적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낯설음의 시학

 

너무 친숙하면 경멸을 낳는다는 서양 쪽 속담이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지나치게 흉허물이 없이 지내는 터수가 되면 경의가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너무 익숙하거나 낯익은 것은 문학 쪽에서도 물리게 마련이다. 어문생활에서도 사정은 같다. 요즘 우리사이에서는 국민감정이라는 말 대신에 국민정서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기의는 엎어치나 메치나 같지만 기표를 바꾸어 얼마쯤의 신선감을 주기 때문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는 것이다.

 

별 혼란이 없는 대체이다. 일부에서는 차이성이란 말 대신에 차별성이란 말을 곧잘 쓴다. 낯선 말에 대한 선호라는 점에서 심리적 기반은 앞엣 경우와 같지만 그 적정성에는 문제가 있다. 차별이란 말에서 보듯 부당한 혹은 편견에서 나온 차이설정의 함의가 짙다.

 

따라서 차이성과 차별성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어쨋거나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지향이 어문생활에 변화와 새 활기를 불어넣는 것만은 사실이다.

 

 

외국어 단어나 외래어의 빈번한 사용은 기품 있는 취향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한때 모더니스트들의 시에서 드러났듯이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서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문제는 외래어나 외국어 남용이 곧 싫증을 낳게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외래어를 많이 사용한 시편들이 이내 호소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당초의 참신성이 곧 증발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반해서 생소한 우리말이 낯섦을 오래 간직하면서 당초의 신선한 충격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가령 白石시의 매력은 아마 그런 점에도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의 이국정서 선호에서 볼 수 있듯이 멀고 생소하고 낯선 것은 ᄀ 자체로서 미적 기능을 발휘한다. 러시아 형식주의가 발달한 낯설게하기와 관계없이 생소한 낱말은 효과적인 시적 단위구실을 한다. 기의보다 기표가 순기능을 발휘하는 시언어의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다.

 

놉새가 불면

唐紅연도 날으리

鄕愁는 가슴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지팽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세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黃나비도 날으리

 

生活도 葛藤도

그리고 算術도

다 잊어버리고

 

白樺를 깎아

墓標를 삼고

 

凍原에 피어오르는

한떨기 아름다운

百合꽃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

   -이한직, ⌈놉새가 불면⌋ 전문

 

타자의 암시와 풍문을 통해 감수성을 훈련받은 몰주체적 독자들은 이 뛰어난 시편과 그 작자를 알지 못할 것이다. 기계적 반복의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의 이곳을 떠나보려는 출발에의 충동은 젊은 시절에 강렬한 법이지만 평생을 지속하는 餘震일 것이다. 미지에 대한 동경과 낯선 것으로의 출발은 낭만주의의 기본 충동의 하나이기도 하나 낭만주의에 한정되지 않는다. 보들레르의 가장 긴 시편인 ⌈여행⌋에 보이는 다음 대목은 충족될 리 없는 삶의 기본적 충동의 하나를 노래하고 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도 잠재적 출발충동의 대리적 충족이기도 할 것이다.

 

허나 순씨의 나그네는 그저 뜨기 위해

길 떠나는 사람이어니.

풍선과 같이 마음은 가볍고

그 운명으로부터 영구히 헤어나지 못하지만

어인 까닭인지도 모르는 채

<가, 가자>고 언제고 언제고 외친다.

 

이한직의 시편이 다루고 있는 것은 출발충동이다. 대개의 출발충동이 그렇듯이 목적지와 정처가 뚜렷한 출발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죽장초혜의 길손 모습을 앞당겨서 구체적 세목으로 보여주는 행선지는 막연하다.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심정만 간절할 뿐이다. 화자에게 있어 현실은 <생활과 갈등과 산술>로 요약되는 당연히 산문적인 터전이다.

 

이렇게 시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는 독자로 하여금 그의 의식을 자극하는 데 있다. 자극함으로써 독자의 관습적 태도에 충격을 가한다. 쉬클로프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러한 시의 특질을 낯설음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시는 그러므로 일상의 관습적인 울을 뚫고 일상성을 다시 낯설게하여 일상성을 비일상성으로 지각하는 행위라고 형식주의자들은 이해하였다. 시를 일고 독자가 받는 경험은 거개가 독자가 전에 가져 보지 못한 새로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쉬클로프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이 곧 그것이다. 시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의 여러 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의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시란 한 대상이 시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대상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달리는 기차 안 화장실에서 울었다, 나는

울음 끝에는 슬픔이 사무치고

슬픔 끝에는 늘 성욕이 올까 ?

흔들리는 기차처럼 나는 했다, 마스터베이션

절정의 시작은 당신의 첫마디

그 첫마디 부여잡고,

허리 꺾으며 나는 했다, 고독한 마스터베이션

 

                                - 양은영, 「내 사랑의 마스터베이션」

 

<자학>은 <기다림>이라는 달관의 세계로 나아가기에 앞서 몇 단계의 과정을 더 거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목마름>과 <망각>이라는 상호 모순된 양태로 발전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목마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과도한 성적 욕망의 분출인 것이다. 양은영의 작품세계가 90년대식으로 평가받고 어느 정도 신선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단계로의 변환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태성욕적 상상력’의 활용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쉬클로프스키가 말한 낯설음의 미학에 해당된다. 그것은 현대문명의 군중 속의 고독을 새롭게 묘사하기 위한 친숙함의 논리를 깨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란 대상을 대상 그대로 취급하지 않고 그것이 시적임을 의식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이다. 낯선 사물을 처음 지각할 때 지불하는 정신작용과 시간을 연장시키는 일은 시의 여러 가지 기교 내지 기능이 되는 것이다. 시는 바로 우리가 안주하는 일상생활과는 아주 다른 세계이다. 시는 바로 일상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비일상성으로 지각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되살리는 행위이며 탈선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쉬클로프스키의 말과 같이 일상성은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되었을 때 조정되는 상태이다.

 

4. 애매성의 시학

 

애매성은 영국의 문학이론가 엠프슨이 『애매성의 일곱 가지 형태』라는 책에서 다룬 이래 시의 특성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용어로 등장하였다. 모호성을 기호분해가 명료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빚어내는 이해 불가능이라고 하면 기호분해가 두 가지 이상으로 가능하여 다양성의 혼란으로 일어나는 이해불가능을 우리는 애매성이라고 부른다. 모호성이 미학적인 근거에서 설명된다면, 애매성은 어학적인 근거에서 해명된다.

엠프슨은 동일한 기호가 여러 가지 다른 반응을 독자에게 일으키는 것은 언어가 가지는 애매성 때문이라고 보고, 시인은 복잡한 경험을 여러 가지 언어의 애매성을 가지고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애매성은 언어에 대하여 선택적 반응을 할 여지를 주는 언어의 모든 미묘한 뉘앙스라고 하면서 애매성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타입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 하나의 단어 또는 문장이 동시에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

2) 두 개 이상의 의미가 시인이 의도한 하나의 의미로 나타나는 경우

3) 일종의 동음이의어로서 하나의 단어가 동시에 두 가지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

4) 두 개 이상의 의미가 서로 모순되면서 결합하여 시인의 복잡한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경우

5) 일종의 직유로서 그 직유의 두 관념은 서로 어울리지는 않으나, 시인의 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전이됨을, 말하자면 불명료에서 명료로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경우

6) 하나의 표현이 모순이거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은 경우(시인이 의도적으로 해놓은 경우). 이 때 독자가 스스로 해석을 하여야 한다.

7)하나의 표현이 근본적으로 모순되어 시인의 정신에 분열이 있음을 암시하는 경우

 

이와 같이 어떤 단어, 문장이 애매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그것의 복합적 의미, 또는 의미가 풍부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것대로 이미 하나의 해석이 되는 것이다. 흔히 애매성이라는 용어보다 시적 깊이 또는 다의미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수영의 두 개의 시를 예로 들어 한 낱말이 지니는 애매성의 실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김수영의 <눈>의 일부이다. 위의 시에 나타나는 <눈>은 1) 雪, 2) 眼, 3) 순백, 순결, 고요, 평화 등(雪의 코노테이션), 4)분별력, 판단력, 비젼 등(眼의 코노테이션)의 복합적 의미를 포괄하기 때문에 의미의 해석과정에서 애매성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으려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김수영의 <말>의 일부이다. 여기서 애매성은 이 무언의 말 a)이 무언의 말 -> ᄀ)하늘의 빛 -> ᄂ)물의 빛 ᄃ)우연의 빛 ᄅ)우연의 말 ᄆ)죽음을 꿰뚫으는 가장 무력한 말 ᄇ)죽음을 위한 말 ᄉ)죽음에 섬기는 말 ᄋ)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ᄌ)이 만능의 말 ᄎ)겨울의 말 ᄏ)봄의 말 ᄐ)이제 내 말 ᄑ)내 말이 아닌 말 의 비유적 해석의 전이에 따라 나타난다. 그리고 위의 시행은 거의 이러한 유형으로만 짜여진 시인데, 다만 ᄇ) 자체가 띠는 반어나 모순, ᄑ)자체가 띠는 반어나 모순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시와 이미지

 

1. 이미지의 개념

 

원래 이미지는 심리학이나 사진에서 사용되는 개념인데 최근에는 영화에서 더 많이 활용되는 용어이다. 심리학이 용어로는 <머리에 떠오른 것으로서 감각적 성질을 지닌 것>으로 정의된다. 문학에서 논의되는 이미지메이커는 주로 기억, 공상, 상상력, 특히 상상력이다. 기억은 과거 체험을 심상으로 보존하여 시의 제재로 공급한다. 기억이 제공하는 심상은 변용되지 않는 재현적 심상, 기초적 심상이다. 기억은 모든 상상의 원천이다.

 

공상과 상상력은 주로 이미지 결합의 기능에서 구분된다. 시학사전에서는 이미지는 “신체의 지각작용에 의하여 제작되어지는 감각의 마음속 재생”이라고 정의가 내려지고 있다. 곧 이미지란 신체적 자극에 의하여 생성된 느낌이나 모습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마음속에 재생되는 현상을 말한다. 리듬과 함께 시의 2대 구성원리인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의 감각에 호소한다. 이것은 시가 구체적이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는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특수한 것이 이미지다. 관념과 존재는 이런 이미지 속에서 통합된다.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지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이미지는 축자적 묘사에 의하건, 인유에 의하건, 또는 비유에 사용된 유추에 의하건 간에 한 편의 시나 기타 문학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감각,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질을 가리킨다. 가령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았다 /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장만영)에서 감각적 대상인 <달>과 감각적 특질인 <향그럽다>는 모두 이미지가 된다. 둘째는 더욱 좁은 의미로 이미지란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만을 가리킨다. 셋째로 가장 일반적으로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와 직유의 보조관념을 가리킨다.

2. 이미지의 기능

 

시의 이미지는 시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이미지의 정의 속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장치다. 시인은 전달하고 싶은 관념이나 실제 경험 또는 상상적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그리고 호소력 있는 형태로 형상화시킬 수단을 찾는다. 이 수단이 이미지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개의 독립된 형태로서의 이미지나 또는 유기적 전후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형태로서의 이미지군을 숙고함으로써 주제를 추적할 수 있다. 이미지분석을 통한 이런 의미의 추적을 指數批評, 상징비평 또는 주제비평이라고 한다. 여기서 지수란 시에서 의미의 유형이나 반복되는 관념, 정서, 태도 등을 가리키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더러는

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

이 작품의 핵심 이미지로서 <눈물>을 발견하는 일은 용이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눈물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있다. 시인은 눈물이 <沃土에 떨어지는 생명>이라고 함으로써 눈물이 일반적으로 슬픔을 환기한다는 우리의 안이한 생각을 배반한다. 눈물은 생명이며 그것도 <흠도 티도 / 금가지 않은> 순수한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 눈물은 순수한 생명이란 새로운 내포를 가졌다. 그것은 시인에게 유일무이한 가치다. 동시에 이 눈물은 꽃과 열매의 관계가 웃음과 눈물의 관계에 상응하는 이런 관계의 관계를 통하여 영원하고 불변적인 가치가 됨을 시인은 암시한다.

 

꽃은 아름답지만 쉽게 시들므로 그것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다. 마찬가지로 <웃음>도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러나 이와 대립되는 열매와 눈물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작품의 테마는 영원한 가치로서의 생명의 순수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의 인생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런 테마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눈물의 핵심이미지로써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미지의 유형

 

시에서의 이미지는 흔히 지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그리고 상징적 이미지로 구분된다. 지각 이미지란 작품을 읽을 때 독자의 정 신속에 일어나는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형성되는 이미지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된 형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이미지인데 특히 은유는 전체가 이미지를 형성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이미지가 상징성을 지니며 작품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지각이미지는 다시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 기관감각이미지, 근육감각 이미지로 나뉘어진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ᄉ잎 피어가는 열두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는 전편이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첫 연에서는 ‘산/청운사/낡은 기와집’이 모두 청록 계열의 색채감을 느끼게 한다. 셋째 연의 ‘느릅나무 / 속ᄉ잎’, 넷째 연의 ‘청노루/ 맑은 눈’ 역시 투명한 푸른 색감을 느끼게 한다. 이에 비하여 둘째 연의 ‘봄눈’, 다섯째 연의 ‘구름’은 희고 맑은 색감이지만, 그 배경을 이루는 것은 역시 산과 하늘의 푸른 색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기관감각이미지는 고동, 맥박, 호흡, 소화 따위의 자각을, 근육감각이미지는 근육의 긴장과 움직임의 자각을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