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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의 효용에 대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11. 14. 22:40

시의 효용에 대하여

나호열

1.

 

시를 읽기 전에 임보 시인의 시창작론 「풍요속의 빈곤」을 먼저 펼쳤다. ‘자유시에 대한 오해’, ‘운율에 대한 경시’, ‘독선적 발언’, ‘미의식의 문제점’, ‘시 정신의 타락’의 조목들은 오늘날 스스로 시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깊이 시 창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금과옥조金科玉條에 다름 아니다. 예전과 달리 등단의 통로가 많아지고 확연하게 시의 정의가 다른 집단들이 할거割據하는 형국에서 다양성이 미덕이 되는 풍토까지 더해져서 시 읽기의 괴로움(?)이 가중되는 혼란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대학의 젊은 시학 선생들은 그들이 접한 해체된 세상과 디지털의 세례에 반응한 언어의 변질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 그들의 문도門徒들에게 전수한 시창작의 개요는 한 마디로 난삽하다는 것이다. 물론 시를 곧바로 읽어서 뜻을 알아야 하고 즐겨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다. 시는 산문과 달리 진술이 아니라 표현인 까닭에 언중유골 言中有骨의 함축을 익히는 공부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감상을 나눌 수가 없다. 또 다른 한펴에서 시가 난삽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시의 정조 情調를 언어의 일차적 기의記意에 기대는 일 또한 시 창작에서 피해야 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풍요속의 빈곤」은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면서 어떻게 하면 시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금언 金言으로 새겨야 할 글이라고 생각한다.

 

2.

 

오늘날의 삶은 디지털과 영상 映像의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 아침에 보이던 것이 저녁이면 사라지고 영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감각의 허망을 드러낸다.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충분한 지식이나 정보를 컴퓨터에 내장된 인터넷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다. 어느 나라보다 빨리 인터넷이 보급된 우리나라가 출판의 양은 세계 10위권인데 일인당 독서는 일 년에 10권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독서는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방식과 사유을 통한 판단과 추리의 능력을 배양하는 통로로서 유용함을 얻는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일탈은 이런 독서의 이런 효과를 가볍게 지나치는데 있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단련되지 않으면 아무리 시간이 넉넉해도 쉽사리 책을 열지 못한다. 독서는 아날로그의 사유인 까닭에 사색의 멈춤에 익숙하지 않으면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다. 어느 사람은 서점에서 시집 몇 권을 읽었다고 자랑한다. 시집 한 권에 육, 칠십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시집 한 권을 읽는데 한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 사람은 문자를 읽은 것이지 시를 감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 있는 시 읽기의 괴로움(?)은 바로 이와 같은 읽기의 단계에서 부딪치는 시인과 독자와의 간극 間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시의 난삽함을 피하는 일이 언어의 일차적 기의記意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시인이나 독자나 다같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사유의 침묵과 빈 공간의 탐색은 시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 편의 시가 완벽하게 ‘자유시에 대한 오해’, ‘운율에 대한 경시’, ‘독선적 발언’, ‘미의식의 문제점’, ‘시 정신의 타락’의 함정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례로 운율에 대한 강조가 자칫하면 은유의 깊은 맛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반면에 과도한 은유의 사용이 부실한 내용을 덧칠하는 ‘호박에 줄긋는’ 모자람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시창작의 어려움을 헤쳐가면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먼저 시인은 자신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 話者에 대한 설정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체험을 일차적 재료로 삼는다. 화자가 시인 자신이 될 때 부딪치는 문제는 감정의 과잉, 독자에 대한 동감의 설득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화자 속에 숨어 객관화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3.

시의 효용은 김현의 언명대로 ‘무용 無用의 유용 有用’함에 있다.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지식을 얻거나 교훈을 얻기 위해 시를 읽지 않는다. 사유의 휴식과 도를 향한 탐색의 여정을 궁구하는 것이 시 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세 편의 시를 함께 나누어 본다.

 

권금성에서 봉화대를 향해 오르는 등산길

산 위에서 꿱꿱 악을 쓰며 울고 있는 새소리에

단풍을 귀로 보며 걷고 있다

 

앞서 가던 청년이

어무이 단풍 잘 보입니까?하니

하몬 단풍 참 곱데이,

어무이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저 새소리에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고 있는 거 아입니꺼,

참말로 붉습니다

하, 그래야?

 

왼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오른 손은 지팡이를 잡은 어머니

허리를 쭉 펴며 뒤돌아보는데 그 어머니

썬글라스가 아닌 검정안경을 끼고 있다

 

그 어머니는 진정 귀로 단풍을 보고 있다.

 

최도선 시인의「귀로 보는 단풍」 전문이다. 바야흐로 가을을 맞이하여 행락객들이 산과 들로 나서는 계절이다. 이 시가 만일 실화 實話라면 시인은 정말 기쁘고 가슴 뭉클한 효도와 장애를 극복하는 감각의 승리를 맛보았으리라! 또한 실화라 하더라도 이렇게 반전의 능수능란함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으리라! ‘귀로 단풍을 보’는 일이 어쩌면 우리 삶에 있어서 필요한 진정한 여유가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사유를 일으키는 촉매제라면 또 얼마나 좋은 일일까.

 

팔백 미터 육백산 고지에 가을이 따뜻합니다

맑은 태양 아래 교정의 소나무들

머리 감은 듯 상쾌합니다

여학생들의 종아리에 햇살이 톡톡 튀고

남학생들 운동복이 바람을 가르고

여름내 뭉실뭉실 떠다니던 심술 구름도

세털같이 산뜻하게 걸려 있군요

학생회관 카페의 창으로 학생들을 들여다보며

산이 울긋불긋 웃고 있습니다

건물 사이 오솔길에도 노란 비단이 깔릴테지요

여학생들의 봄에

발갛게 깔깔대며 복숭아가 익었습니다

도사관 창가에서 레포트를 작성하는 남학생

어깨 위로 툭툭

가을이 다정하게 손을 뻗습니다

 

이러다가도 한 번씩 바람이 몰아치고 눈비 뿌리며

천지가 깜깜해질 땐

저 산의 심통에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

여교수 연구실.

 

- 신원철, 「가을 도계」 전문

 

가을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을 깨는 유니크한 시다. 결실, 조락 凋落, 쓸쓸함, 소멸과 같이 익숙했던 가을의 심상들이 경쾌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들로 전환되는 순간.

‘이러다가도 한 번씩 바람이 몰아치고 눈비 뿌리며/ 천지가 깜깜해질 땐/ 저 산의 심통에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 여교수 연구실.’의 결말은 ‘심통’ 의 의미를 고약한 마음, 심통: 마음의 고통, 심통 心通; 마음이 통하다의 여러 의미로 읽을 때 ‘숨죽여 흐느끼는 여교수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엿보기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귀로 보는 단풍」이나「가을 도계」가 객관적인 화자의 거리 조정에 성공한 작품이라면 시인이 보다 작품에 깊숙이 개입한 작품을 눈여겨보게 된다.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 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구나

개똥지바뀌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 진란, 「가을, 누가 지나갔다」 전문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열심히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성취한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숲이 주는 안온한 휴식의 시간의 만끽을 느리게 감상할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하기도 한다. 숲을 밀고, 숲을 열고 들어간 화자는 자연이 이룩한 생명의 숨소리와 순환을 부재하는 ‘그’를 통해서 감지한다. ‘그’는 시간일수도 있고, 자연 전체 또는 섭리 攝理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고 할 때의 ‘누구’는 화자 이면서 동시에 화자를 초월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또 하나의 주체를 상정하는 함축미가 도드라지는 작품으로 눈여겨 볼만한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본 세 편의 시 외에도 독특한 발상과 객관적 묘사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나눈 작품들이 넉넉했음을 밝힌다.

 

계간 『산림문학』 2018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