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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수승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0. 30. 20:37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백제 사신 길 떠나던 바위에는 낯선 이름들만 가득하더라

 

입력 : 2016.10.26 03:19 | 수정 : 2016.10.26 14:31

[57] 거창 수승대의 비밀과 선비 의사 유이태

충신 동계 정온 살던 거창… 고종 5남 의친왕도 동계 고택에서 의병 도모
백제 사신 떠나던 수송대는 퇴계가 수승대라 개명
수승대 소유권 놓고 신씨-임씨 가문이 수백년 동안 이름 새겨
명의 유이태도 거창 출신 곳곳에 전설과 기록 남아
가슴 아픈 현대사 거창 학살 사건도 함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 중기 선비 정온(鄭蘊·1569~1641)은 거창 사람이다. 호는 동계(桐溪)다. 병자호란(1636~1637) 때 조정이 항복을 결정했다. 인조가 남한산성 성문을 나설 무렵 정온은 칼로 자기 배를 찔렀다. 예순일곱 살 때였다. 칼날이 2촌(寸), 6㎝까지 들어갔다. 튀어나온 창자를 아들이 쑤셔넣고 배를 꿰맸다. 사흘이 되도록 죽지 않았다. 정온은 "쇠잔한 목숨이 끊어지지 않으니 괴이하다"고 인조에게 글을 바치고 낙향했다. 덕유산 자락 '이름 없는 마을' 모리(某里)에 살았다. 훗날 1728년 영조 때 후손 정희량이 이인좌와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참수당했다. 할아버지 정온이 남긴 우국충절은 후손이 지은 죄를 덮고도 남아서, 1764년 영조는 정온 후손에게 불천위(不遷位)를 허락했다. 영원무궁토록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다. 정온의 종갓집인 동계 고택에는 나라로부터 받은 '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현판과 불천위 사당이 남아 있다. 선비들 이야기를 모르면 거창 여행은 불가능하다. 1714년 추석날 동계 고택에서 술을 마셨던 선비 유이태(劉以泰)도 그중 하나다.

동계 고택과 명의(名醫) 유이태

유이태의 11세손 유철호. IT 기업 사장이 조상 뿌리를 찾다가 한의학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이태의 11세손 유철호. IT 기업 사장이 조상 뿌리를 찾다가 한의학사(韓醫學史)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14년 추석 산청에 살던 유이태가 고택을 찾아왔다. 한양에서 숙종 임금 병을 치료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고택에는 정온의 증손자 정중원이 살고 있었다. 유이태의 할아버지 유유도는 정중원의 증조부 정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정중원이 훗날 이렇게 썼다. "그의 귀밑머리 보니 어느덧 하얗게 되었더라." 유이태는 이듬해 죽었다. 예순세 살이었다.

유이태는 선비 의사다. 유의(儒醫)라 한다. 유학자이면서 의학 이치에 통달한 선비다.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 치료에 능했다. 거창에서 태어나 남쪽 산청에서 살았다. 영남과 호남 일대에 숱한 전설과 설화를 남겼다. 대충 이러하다. "… 사람 잡아먹은 뱀을 살려주고 타일러 뱀에게 침술을 선물 받았고, 닭에게 침을 아홉 개 놓았는데도 여전히 뛰어다녔다. 그 명성이 청나라까지 알려져 청 고종 병을 고쳐주고 벼슬을 마다하고 돌아와 의술을 펼쳤다…" 뱀침 설화는 거창 위천면 옛 위천중학교 옆 침대롱바위에 남아 있다.

명의, 산청, 전설. 많은 독자는 기시감(旣視感)을 느낄 것이다. 자기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은, 의성(醫聖) 허준의 스승 류의태(柳義泰)가 아닌가. 실제로 산청에는 류의태를 기리는 테마파크 동의보감촌이 있고 류의태 전설이 남아 있다. 결론부터. 류의태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 속 인물이다. 거창에서 태어나 산청에서 활동하고 숙종 임금 병을 고치고 의술을 베푼 의사는 유이태다. 동계 고택에서 주인장과 대작하고 죽은 해가 1715년이니, 허준(1539~1615)보다 100년 뒤 사람이다.

거창 신씨, 은진 임씨 그리고 수승대

백제 말기, 신라로 보내는 백제 사신은백제땅 거창 위천(渭川)에 있는 큰 바위 앞에서 출발하곤 했다. 나라가 흔들거리니 적국으로 가는 사신도, 보내는 이들도 기뻐했을 리가 만무했다. 하여 바위 이름은 수송대(愁送臺)다. 슬픔을 떠나보내는 바위다. 경치가 남도 제일이라 조선 선비들이 방문을 선망하던 곳이다. 동계 고택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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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 위천면에 있는 바위 수승대는 조선 선비들이 열망하던 명승지다. 보다시피, 수백년에 걸친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가문 기(氣) 싸움에 바위는 이름 각자(刻字)로 아수라장이 됐다. /박종인 기자
1543년 퇴계 이황이 수송대 소문을 듣고 놀러왔다가 급한 일로 코앞에서 한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거창 선비인 요수 신권에게 글을 보냈다. "수송대 이름이 좋지 않으니 수승대(搜勝臺)로 고칩시다, 그려." 대학자가 보낸 시에 거창 신씨 신권은 화답시를 짓고 바위에 수승대라 새겼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럽네(深荷珍重敎殊絶恨望懷)"

신권의 처남인 갈천 임훈은 동갑인 퇴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퇴계면 퇴계지, 와보지도 않은 곳 이름을 멋대로? 은진 임씨 임훈도 화답시를 지었다. 마지막 연은 이렇다. "봄을 보내는 시름만 아니라 그대를 보내는 시름도 있네(不濁愁春愁送君)" 한 연에 퇴계가 없애라 했던 수송(愁送)을 포함해 슬플 수(愁)가 두 번이나 들어 있었다. 이후 수승대는 신씨들과 임씨들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신씨 문중은 바위에 '樂水藏修之臺(요수장수지대)'라 새겼다. 신권이 숨어서 수양하던 바위라는 뜻이다. 임씨 문중은 퇴계의 시와 임훈의 화답시를 새겼다. 퇴계 시 옆에는 '退溪命名之臺(퇴계명명지대)'라 새겼다. 임훈 시 옆에는 '葛川杖之所(갈천장구지소)'라 새겼다. 갈천이 지팡이를 짚고 짚신 끌던 곳이라는 뜻이다.

유이태가 명의가 된 내력이 전설로 전하는 이태사랑바위. 

 

유이태가 명의가 된 내력이 전설로 전하는 이태사랑바위.

 

쟁탈전이 끝없이 이어졌다. 신씨 문중은 신권을 기리는 구연서원 앞 바위에 '樂水愼先生藏修洞(요수신선생장수동)'이라고 큰 글씨를 새겼다. 임씨 문중은 바위에 자기네 이름들을 차곡차곡 새겼다. 날이 새면 그 상하좌우에 신씨 이름이 새겨졌다. 1805년 신씨 가문은 홍수로 떠내려간 신권의 정자 요수정을 바위 건너에 세웠다. 바위는 거대한 집단 묘비명처럼 신씨 임씨 이름으로 도배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1월 3일자 조선일보는 "막대한 재산과 다수한 인명까지 희생하였으나 아모 해결을 엇지 못하며 지내"라고 보도하고 있다. 구한말 문장가 이건창(1852~1898)은 이리 말했다. "아름다움은 빼어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하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했다. 가보라. 수승대를 난장판으로 만든 싸움 구경에 해가 질 줄 모른다.

수승대와 이태사랑바위

거창
수승대 옆 위천 아래쪽에는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더 있다. 명의 유이태 전설이 얽힌 바위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소년 유이태가 이 바위에 앉아 있는데, 절색 미녀가 나타나 입을 맞췄다. 파란 구슬이 입속으로 들락거리니 아이가 혼절할 지경이었다. 이를 안 훈장이 구슬을 삼키라 알려준 그날 밤 소년은 구슬을 삼켜버렸다. 유철호(65)가 말했다. "그러고 나니 유이태가 의통안(醫通眼)에 눈을 떴다. 그래서 바위 이름이 이태사랑바위다."

유철호는 유이태의 11세손이다. 유이태가 활동했던 산청 생초면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IT 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다. 동아대학교와 고려대에서 각각 경제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2015년 경희대에서 한의학사(韓醫學史)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력부터 비범하다. 그가 말했다. "어릴 적부터 유이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틈에 소설 캐릭터인 류의태가 실존 인물이 되고 할아버지는 사라진 게 아닌가. 1984년 서울 남산도서관에서 아내 한정옥과 함께 '유이태'와 '류의태' 자료를 찾았다. 유이태는 있으되 류의태는 어디에도 근거가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2011년까지 28년 동안 팔도와 일본과 미국을 돌며 사람을 만났고 자료를 모았다. 내친김에 2012년 경희대 한의대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2015년 2월 '유이태 생애와 마진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말했다. "거창, 산청은 물론 영호남 곳곳에 유이태 흔적이 남아 있고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도 산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가공인물 류의태 동상은 물론 이름을 건 의학상까지 만들었다. 사실을 기록하고 오류를 인정해야 역사가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계 고택, 그리고 의친왕

대한제국이 망했다. 왕족들은 모두 일본 황실 아래 계급 귀족으로 변신했다.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10월 왕족 의친왕 이강이 거창을 찾았다. 고종의 5남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과 반목했던 사내였다. 거창군사에 따르면 이강은 한 달 동안 정태균이라는 사람 집에 묵으며 항일 거병을 도모했다. 월성계곡에 있는 사선대 일대 땅을 사서 의병 근거지로 쓰려 했다가 일본에 발각돼 서울로 호송됐다. 정태균이 바로 동계 정온의 후손이다. 그가 살던 집이 동계 고택이다. 고택에는 이강이 쓴 某窩(모와·이름 모를 움집)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가 묵은 방도 보존돼 있다. 월성계곡에 가면 웅장한 사선대(四仙臺)를 볼 수 있다.

'견벽청야' 토벌 작전과 최덕신

거창 사건 추모공원 위령탑. 

 

거창 사건 추모공원 위령탑.

 

하나 더 언급할 인물이 있다. 최덕신이다. 6·25전쟁 당시 11사단장이다. 1951년 2월 9일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이 양민 719명을 몰살했다. 작전명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들인다'는 뜻이다. 빨치산 토벌작전의 일환으로 벌인 일이었다. 11사단 9연대는 빨치산과 몇 차례 교전 끝에 이 지역 남녀노소 주민들을 집합시키고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공비 토벌작전'의 진실은 3년 만에 드러났다. 그리고 2004년에 신원면에 추모공원이 들어섰다. 비석에 새겨진 사망 연월일은 1951년 2월 10일 아니면 2월 11일로 똑같다. 남녀노소는 그저 유골 크기로 나눴다.

자, 견벽청야 작전을 지시한 최덕신은 어찌 되었는가. 최덕신은 천도교 교령을 지내고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두루 요직을 거쳤다. 방향성 없이 갈지자로 살던 최덕신은 1986년 월북해 평양 애국렬사릉에 잠자고 있다. 거창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모두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