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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아직 너를 모른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9. 19. 18:24

그러나 나는 아직 너를 모른다

<이원규 시인>

내 생애 유일한 신(神)은 시(詩)였고, 시는 곧 가시 같은 것이었다. 밤마다 아프게 콕콕 찌르는 신이 시요, 시가 가시였다!

짐짓 모른 체 돌아누워도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벌떡 일어나 풍찬노숙의 먼 길을 걸어도 티눈처럼 돋아나 발가락을 콕콕 찌른다. 바깥에서 나를 찌르는 이물질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내 몸 속에서 아직 살이 되지 못한 뼛조각 같은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그러나 나는 아직 이 가시의 맨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주 나의 문학적 첫 마음이자 유일한 스승인 고향 하내리의 맹인 김씨 아저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지만 나는 두고두고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산촌 하내리의 겨울밤

자정 넘어 함박눈 내리면

먼저 아는 이 누구일까

제아무리 도둑발로 와도

먼저 듣고 아는 이 누구일까

 

온 마을 길들이 덮여

문득 봉당 아래 까무러치면

맹인 김씨 홀로 깨어 싸리비를 챙긴다

폭설의 삶일지라도 살아온 만큼은 길 아니던가

밤새 쓸고 또 쓸다보면

맹인 김씨 하얀 입김 따라 열리는 동구 밖

 

비록 먼눈일지언정

깜박이는 눈썹 사이 하내리의 아침이 깃들면

맨 먼저 그 길을 따라

막일 나가는 천씨의 콧노래

등교하는 아이들의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비로소 맹인 김씨 잠을 청한다

 

- 졸시 <맹인의 아침> 전문

 

돌이켜보면 유년 시절의 나는 맹인 김씨의 안 보이는 눈을 얕보았던 게 분명하다. 안 보이면 곧 모르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대여섯 살 때부터 맹인 김씨 아저씨의 구멍가게를 들락거리며 과자를 사는 척 검은 포도 알을 몰래 빼먹는 등의 도둑질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맹인 김씨 아저씨는 하내리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도 내 어린 발자국 소리를 읽어내고, 검은 포도 알을 빼먹는 어린 도둑의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마저 다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던 맹인 김씨, 그는 날마다 하내리를 훤히 들여다보는 신 같은 존재였다.

 

안 보이는 눈으로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 그 성문들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읽을 뿐만이 아니라 목소리 톤만으로도 그날 그 집안의 길흉화복을 읽어내고, 누구의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인지, 누구의 경운기 소리인지 모두 알았으니 맹인 김씨의 안 보이는 눈을 통해 하내리의 하루하루가 빠짐없이 필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촌 하내리의 한겨울 한밤중에 소리 없이 함박눈이 내려도 가장 먼저 아는 이가 바로 맹인 김씨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함박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아는 것도 범상한 일이지만 그 보다는 안 뒤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닐 수 없다.

맹인 김씨는 모두가 잠든 밤에 빗자루를 들고 나와 새벽이 올 때까지 동구 밖까지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 먼 길을 나가는 누군가의 시린 발을 생각하며.  나는 아직도 스무 살 무렵에 엿보았던 그 겨울밤을 잊지 못한다. 벌떡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김씨 아저씨를 따라 함께 눈을 쓸 것인가, 이대로 지켜만 볼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밤을 꼬박 지새운 그 겨울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를 쓰기 시작한 지 35년이 넘도록 나는 여전히 시 창작의 방법론보다는 시인의 자세 혹은 시 창작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인의 자세 혹은 시 창작의 태도는 엿보기인가, 맹인 김씨의 예감인가, 예감과 실천의 암수한몸인가를 두고 나는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둔재로 살아왔다. 사실 그동안 엿보기도 잘 되지 않았을 뿐더러 워낙 둔감했으니 예감마저 외면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 결핍의 와중에도 온몸을 구겨 넣으며 실천하려고 애를 썼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이를 두고 시대정신이라 믿었다.

문학적 결실은 미미했으나 그래도 예까지 오는 길은 나름대로의 진흙탕과 가시밭길이었다.

 

세상의 부름에 어깨를 걸고 장구를 치고 춤을 추며 돌을 던지느라 10년을 보내고, 그 사이 죽거나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며 목을 꺾고 무릎을 꺾고 자책의 묵념을 하느라 10년을 보냈다. 말하자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선 투쟁의 상상력과 절망의 상상력에 초점을 맞춰 온몸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답답한 시절들과의 단절이 바로 지리산행이었다. 어언 17년 전, 삼십대 중반의 아직 팔팔한 나이에 입산이라니! 당시의 혈기가 아찔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거침이 없는 무애의 날들이었다. 욕을 먹고 돌을 맞더라도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신이 쏠리는 대로’ 살아보고자 했으니, 일단 내 생애 단 한 번의 원은 이룬 셈이다.

 

참매를 키우던 어린 시절의 고향, 맹인 김씨의 하내리를 떠난 뒤 절과 대학과 광산, 그 어느 곳에서도 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서울살이 또한 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언론사 등 현장을 전전하며 간신히 딱 10년을 견뎠으나 그마저 지리산행의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행한 세상과의 단절 혹은 무책임은 뒷골이 서늘한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해방이되 참회의 내용과 형식마저 외면하고 그저 산짐승처럼 살고픈 생존본능의 오감과 더불어 그동안 거세되었던 육감을 되살려보려는 ‘지리산 고아’로서의 처절한 해방감이었다.

내리 3년 폐가를 전전하며 상처 입은 산짐승처럼 스스로 치유하며 살다보니 어느새 업보인 ‘제1의 화살’은 등에 박힌 채로 서서히 삭아 그대로 한 몸이 되었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휘휘 둘러보니 피할 수 없는 ‘제2의 화살’이 날아오는데 이를 또 어찌할 것인가. 지리산에서 생의 한 철 잘 놀았으니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환경운동을 하는 지리산 지킴이를 자처하고, 토벌대와 빨치산 형제를 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정화수를 올리듯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수경 스님과 도법 스님과의 인연으로 지리산과 낙동강 도보순례와 새만금 삼보일배, 생명평화 탁발순례와 대운하반대 생명의 강 순례, 오체투지 등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있어 문학은 언제나 이전이 아니라 이후였다. 시는 눈앞에 있는 게 아니라 돌아보면 한참 뒤에서 발자국 위에 미아처럼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내 삶의 전위부대는 시가 아니라 물집 잡히는 발바닥 아니면 바람 속으로 내달리는 모터사이클이었다.

지리산에 와서 뭔가 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단지 많이 걷고 많이 달리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쪽 곳곳을 줄잡아 3만 리 길을 걸으며 세상사 안부를 묻고, 또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100만km 이상을 달리며 세상사 두두물물에게 눈인사라도 했으니 거리상으로 지구 25 바퀴 이상을 돈 셈이다. 마침내 국도와 지방도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는 ‘인간 내비게이션’ 수준이 되었다.

날마다 이곳저곳 걷거나 혹은 달리면서 속도와 반속도의 경계를 넘나들고,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의 정면으로 달리거나 혹은 측면의 바람에 온몸을 기대는 일이 어찌 시를 쓰는 일과 다르겠는가.

세상사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으니 삶의 급격한 경사를 만나면 내 몸과 마음도 그만큼의 긴장을 팽팽히 유지하고, 코너를 만나면 또 그만큼의 기울기로 유연하게 내 몸을 던져야만 비로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나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절절한 시창작의 태도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할 뿐이다.

 

다만 가더라도 머리가 먼저 가면 교만이라는 지식의 올가미에 걸리기 쉽고, 또 가슴이 먼저 가면 격한 싸움 뒤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가더라도 먼저 발이 가고 온몸이 가고 머리와 가슴이 뒤따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긴 해도 아마 행선(行禪)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을 들어 먼 곳을 탐색하기보다는 맹인 김씨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발바닥에 집중하는 것,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렇게 걸어보면 발바닥 아래 풀씨가 꼬물꼬물 움트고 마침내 발자국마다 꽃이 피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 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졸시 <족필(足筆)> 전문

날마다 겨드랑이가 아닌 발바닥이 간질간질 가렵다.

나는 그동안 108마력의 슬픔으로 이 세상을 걸어서 왔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보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내가 걷고 달려온 길 위에 쭈그려 앉은 나의 시들에게 좀 더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악수를 건네는 것이다. 예감컨대 나이 오십세를 넘기면서 내게도 참한 벗 하나 생길 것도 같다.

온 몸이 한 자루 붓이 되어 지리산에 그 둘레가 850 리인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1년에 단 한 글자 밖에 쓰지 못한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매일 가는 길도 이렇게 처음 가는 길이라면 날마다 꽃길이 아니겠는가. 가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사람의 걸음걸이가 마치 날아온 것처럼 엄청난 속도의 비보(飛步)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니, 탐진치에 걸려 나자빠지지 않는 무애의 길 위에서 돌아보면 발바닥이 곧 날개요,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휘휘 세상을 둘러보노라면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리하여 더더욱 리우 환경경회의의 선언은 문학적으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 ~”. 나는 이 한마디와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을 경전으로 삼아 환경운동을 넘어 생태주의로, 그리고 마침내 생명평화 운동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물론 문학적인 위치적 기반 또한 지리산으로 고정해 놓고, 지리산의 푸른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써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일화(世界一花)를 날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 지구적 상상력의 신(神), 날마다 밤마다 가시처럼 콕콕 쑤시는 시의 맨 얼굴이 아직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다만 그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맹인 김씨의 자세로 아주 천천히 걸어 가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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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시 3편>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겁나게와 잉 사이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달빛을 깨물다

 

살다보면 자근자근 달빛을 깨물고 싶은 날들이 있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빨 빠진 합죽이였다

양산골 도탄재 너머 지금은

문경석탄박물관과 ‘연개소문’ 촬영지가 된

은성광업소, 육식공룡의 시체 같은 폐석더미에서

버린 탄을 훔치던 수절 삼십 년의 어머니

마대자루 한가득 괴탄을 짊어지고

날마다 도둑년처럼 십 리 도탄재를 넘으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청상의 어금니가 폐광의 동바리처럼 무너졌다

 

하루 한 자루에 삼천 원

막내아들의 일 년치 등록금이 되려면

대봉산 위로 떠오르는 저놈의 보름달을

남몰래 열두 번은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봉창 아래 머리 맡의 흰 사발

늦은 밤의 어머니가 틀니를 빼놓고

해소 천식의 곤한 잠에 빠지면

맑은 물속의 환한 틀니가 희푸른 달빛을 깨물고

어머니는 밤새 그 달빛을 오물오물 되새김질하는

이빨 빠진 합죽이가 되었다

 

어느새 나 또한 죽은 아버지 나이를 넘기며

씹을 만큼 다 씹은 뒤에

아니, 차마 마저 씹지 못하고

할 만큼 다 말한 뒤에 아니, 차마 다 못하고

그예 들어설 나의 틀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어머니의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장례식 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털신이며 속옷이며 함께 불에 타다가 말았을까

지금도 그대로 무덤 속의 앙다문 입 속에 있을까

 

누구는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사흘을 울었다는데

동짓달 열여드렛날의 지리산

홀로 고향의 무덤을 향해 한 사발의 녹차를 올리는

열 번째 제삿날 밤이 되어서야 보았다

기우는 달의 한쪽을 꽉 물고 있는 어머니의 틀니

 

이원규(李元圭)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84년 『월간문학』, 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등 6권.

신간/ 육필시집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2015년, 지만지)

산문집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 등 3권

신동엽창작상, 평화인권문학상 수상.

현재 순천대 문창과, 지리산행복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