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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란 무엇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9. 7. 22:39

현대시란 무엇인가?

강사 : 황정산

1. 시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말들을 해왔다. “시는 인생의 모방이다”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도 있었고 “시는 감정의 넘쳐남”이라고 얘기한 워즈워드 같은 시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말 중 어느 것 하나가 정답이라고 딱잘라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문학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정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라는 말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자신을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걸로 보아 문학이 예술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음악이 소리를 재료로 하고 미술이 선과 색 같은 시각적인 것을 재료로 하듯이 문학은 말을 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언어, 즉 말의 예술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에 별로 설명되는 내용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말을 좀더 충분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언어 즉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1) 언어의 지시적 기능과 환기적 기능

 

말이 뭐냐고 학생들에게 물었을 때 그 중 좀 똑똑한 학생은 “말이란 실제 있는 물건을 대신 나타내는 기호 아닐까요?”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 대답이 완전히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틀린 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모든 말들은 그 말이 나타내는 사물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은 영어로는 water, 중국 사람은 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실제 물이라는 사물은 아니고 그것을 대신하는 기호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 있는 사물을 대신하는 것이 말이라고 한다면 말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건 그 자체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무를 말하고 싶을 때 ‘나무’라는 말보다는 실제로 길 옆에 세워진 나무를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할 것이고, 물을 말하고 싶을 때 흐르는 물을 손으로 퍼다가 다른 사람의 얼굴에 냅다 끼얹으면 아주 확실하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말이란 지금 없는 물건, 어려운 말로 ‘부재하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공부 끝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집에는 어머니도 안계시고 배는 고프다면 무슨 생각들을 할까? 갑자기 머리 속에 잘 구워서 배달된 따끈한 피자가 생각나면서 “아, 피자 먹고 싶다.”라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오지 않을까? 그랬을 때 ‘피자’라는 말은 지금 눈앞에 있는 피자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 속에만 있는 그러나 지금은 없는 피자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그 피자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피자의 진한 맛과 고소한 냄새 그리고 피자와 함께 배달될 콜라의 시원한 맛이 떠오르면서 잠시 행복해짐을 느낄 수 있게 될 거다. 바로 말이란 이렇게 없는 것을 대신하는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있는 물건, 즉 존재하는 사물을 표현하는 말의 기능을 지시적 기능이라고 하는 반면에 이렇게 없는 것을 대신하는 말의 기능을 환기적 기능 또는 마술적 기능이라고 한다. 환기라는 말은 없는 것을 불러낸다는 뜻이다. 마술공연에서 마술사가 아무것도 없는 보자기 안에서 비둘기를 꺼내고 신문지로 꽃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불로 변화시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텐데 이와 비슷하게 말을 통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말의 마술적 기능이다.

 

2) 시와 언어의 환기적 기능

 

시는 바로 이러한 말의 환기적 기능을 주로 사용한다. ‘시는 말의 예술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금은 없는 것 그러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불러내는 마술적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하나 생각해 보자. 다음은 김소월의 시 <금잔디>의 한 부분이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핀 금잔디

 

이 시의 ‘금잔디’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김소월이라는 시인은 금잔디가 있다는 사실, 금잔디가 아름답게 피어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쓴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금잔디는 실제 있는 금잔디라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해 즉 지시적 기능을 위해 쓰여 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학생들도 이 시를 읽고 조금은 눈치를 챘겠지만 시인은 무덤가에 피어 있는 금잔디를 보고 무덤 속에 누워있는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금잔디는 지금은 가고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즉 금잔디라는 말은 없는 님을 불러내는 마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통 쓰는 말과 달리 말을 이렇게 특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3) 말의 지시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

 

 

있는 사물을 나타내는 기능 즉 지시적 기능을 할 때 그 말의 의미를 지시적 의미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이슬’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과학 시간에 배웠다시피 이슬이란 이

른 아침에 공기 중의 습기가 차가운 물체에 부딪쳐 맺히는 물방울이다. 이런 이슬의 뜻이 바로 지시적 의미이다.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슬에 옷이 젖는다.”라고 말했을 때도 이런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일 게다.

 

하지만 이런 의미만으로 ‘이슬’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이슬처럼 사라져간 인생”이라고 말했을 때는 이슬은 쉽게 사라진다, 덧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영롱함’이나 ‘반짝이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이슬이 눈물을 연상하여 이슬이라는 말에서 슬픔을 떠올리게도 해준다. 말이 가져오는 이런 부수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적(또는 함축적) 의미라 한다.

 

앞서 설명한 말의 마술적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말의 이런 내포적 의미를 잘 이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없는 사물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다른 사물들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해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렇게 말의 내포적 의미를 잘 이용하여 말의 마술적 기능을 잘 살린 말의 쓰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의 마술적 기능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도나 주문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주술사의 주문은 뜻을 전하기 위해, 또는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신을 불러내기 위한 언어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염원과 소망을 채우고자 한다.

 

문학은 사실 그 기원에 있어 이런 주문과 큰 관련을 맺고 있다. 신라 시대 만들어졌다는 구지가처럼 주문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기도 하고,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은 대부분 주술적인 행위들에서부터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언어의 환기적 기능에 대해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해 보기로 한다. 학생들의 국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진달래꽃>이라는 김소월의 시를 생각해보자. 아니 한번 다시 읽어보도록 하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일단 제쳐두고 ‘진달래꽃’이라는 꽃 이름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 시인은 왜 하필이면 제목을 “진달래꽃”이라 했고 또 가시는 님의 발 아래 다

른 꽃도 아니고 꼭 진달래꽃을 뿌리겠다고 했을까?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진달래꽃이라는 말의 내포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만약에 이 시에 등장하는 꽃이 진달래꽃이 아니라 하얀 국화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까? 아마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나보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얀 국화꽃은 장례식을 연상시키기에 하얀 국화에는 죽음이라는 내포적 의미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빨간 장미를 뿌리겠다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시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빨간 장미는 아주 정열적인 사랑을 떠올리는데 그것과 이 시의 이별이라는 주제와는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진달래꽃은 봄에 우리나라 모든 산들에 흔하게 피기 때문에 그 꽃의 모습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진달래꽃의 빨간 색은 진한 사랑의 감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달래꽃의 빨간색은 위에 예로 든 빨간 장미의 화려하고 찬란함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 꽃잎은 작고 연약해서 화사한 느낌보다는 슬프고 가련한 느낌을 주고 진달래의 빨간 색도 밝고 뽐내는 듯한 화려한 빨간 색이 아니라 핏빛을 연상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배어 있는 빨간 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같은 시기에 피는 벚꽃이나 개나리꽃처럼 자신의 색깔을 자신만만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는 부끄러움이 또한 배어 있는 색깔이다.

 

이렇게 보면 진달래꽃이라는 꽃 이름이 가져오는 내포적 의미만으로도 이 시의 의미를 대강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느껴지는 가슴 미어지는 마음의 고통과 그것을 지그시 누르고 참으려는 인고의 정신이 함께 들어있는 복잡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이 시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를 이해할 때 수학 문제를 풀듯 그 시의 의미를 애써 찾아가기보다는 그 시에서 쓰인 시어들의 내포적 의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느낌들을 스스로 느껴보는 것으로 시작하면 의외로 쉬워진다.

 

*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메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믄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느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적막한 식욕」, 박목월)

 

2. 현대시란 무엇인가

 

가. 낯설게 하기

 

개념 : 기존의 가치와 유용성에 저항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온갖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문학의 효용에 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은 사실 오래 전부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나 미국의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해 ‘낯설게 하기’(용어해설11)라는 용어로 설명된 바 있다. 낯설게 하기란 기존의 것을 변형 변화시켜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문학에서는 바로 언어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일상적 사용하는 언어적 용법이 아니라 언어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하여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를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특별하게 사용하여 기존의 언어에 수반되는 통념적인 의미 통념적인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다.

 

한 예로 ‘결혼’이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일상적인 의미에서 결혼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생활이라는 관념을 동반한다. 그래서 주위에서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다들 ‘좋겠다’ 또는 ‘깨 쏟아지겠다’ 등의 말을 버릇처럼 내놓는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또 당연히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결혼 생활은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이런 상투적인 생각 때문에 상대에 불만을 가지고 결국 상대를 괴롭히고 그래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시인은 ‘그대는 천사 나라의 비밀 경찰’이라고 결혼식장에 나타난 신부를 표현했다. 행복한 결혼과 아름다운 신부라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관념을 완전히 낯설게 만들고 있다. 이를 통해 어쩌면 사랑의 감옥일 수 있는 결혼 생활의 억압성과 사랑보다는 서로간의 구속과 소유만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 결혼 제도의 실제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이 짧은 시구를 통해서 일상의 상투적 언어에 의해 감춰진 은폐된 진실을 드러낸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닷가 될 수 있을까.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시에서 뭔가 예쁘고 고운 그리고 따뜻한 말을 기대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시들 역시 따뜻하고 안온해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그런 경향의 시들이다. 그런데 위의 최승자의 시는 이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다. 이 시는 마치 세상에 대해 저주를 퍼붓듯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까지 하다. 적어도 시인에게는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을’ 하면 수확과 풍성함과 아니면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느끼는 센티멘탈한 그러나 아름다운 슬픔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것이 가을에 대한 통념적인 생각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는 릴케의 시 구절이나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우리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 등의 유치한 소녀 취향의 낭만적 시 구절 들을 생각할 것이다. 풍성함이나 애잔한 슬픔, 아름다운 이별 등등이 가을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느낌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 가을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매독같이 더럽고 추악한 고통이다. 황혼은 밀레의 만종에서와 같은 경건한 마무리가 아니라 마비와 죽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생명력을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지’는 것과 같이 삶의 지향이 사라지고,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사람들과의 단절과 소외가 심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과거는 폐수처럼 세월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면서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시인이 보기에 가을은 현대 사회의 인간들이 느끼는 이러한 소외와 절망감을 증폭시키는 계절인 것이다.

 

이렇듯 이 시는 ‘가을’의 의미나 거기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몇 개의 말들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통념 속에서의 가을은 왠지 모를 서글픔에 젖은 감상이거나 풍성한 수확이 주는 충만감이거나 그런 것이다. 가을이라는 말에서는 시나브로 떨어지는 낙엽, 풍성한 가을 들판을 연상한다. 그런데 이런 통념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통념으로만 세상을 보게된다. 사실은 그런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가을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는 가을에서 폐수나 매독을 본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척박함을 말하고 있다. 왜 세상이 척박한지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의 경험도 있을 것이고, 사회적 시대적 분위기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가지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여간 가을에 대한 통념을 거부하고 세상의 본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가을은 이런 부정적인 모습으로 ‘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껴 본 것 같은 생각에 공감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통념 때문에 미처 깨닫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삶이 그런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 시인은 이러한 통념을 깨고 세상을 다시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어둠을 고발하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강렬한 열망을 표출한다.

 

나. 현대시와 아이러니

 

1) 아이러니는 거꾸로 말하기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보거나 경험할 때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성직자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표창을 받은 모범 시민이 알고 보니 사기범이었음이 밝혀졌을 때 바로 이런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아이러니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아이러니(Irony)는 우리말로 반어라 한다. 거꾸로 말한다는 뜻이다. 아이러니란 원래의 의도를 숨기고 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그리스의 희극에서부터 온 말이라고 한다. 이 희극에서 에이론(Eiron)과 알라존(Alazon)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약한 에이론이 자신의 겉모습과는 달리 외적으로 강한 알라존을 이기는 데서부터 아이러니라는 말이 왔다고 한다. 사실은 영리하고 똑똑하나 겉으로는 약하고 무식하고 우스꽝스럽게 가벼워 보이는 에이론이 힘세고 진지하고 잘난척하는 알라존을 이긴다고 하는데 에이론이 알라존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가 상반되는 두 태도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존이 자신의 힘과 신념을 맹신하는 데 비해 에이론은 약함과 강함, 영리함과 미련함이라는 두 가지의 대립을 알면서 거기에서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라존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드러나는 것과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의 차이에 기초를 둔 것이 아이러니이다. 즉 반어는 표면적인 의미와 내포된 의미가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A라고 말하고 속으로는 B를 뜻하는 것이 바로 반어다. 비유가 두 사물간의 유사성을 중시여기는 것에 비해 반어는 두 사물의 상반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수사학적으로 아이러니를 이야기를 할 때 의미의 강조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한다. 상반되는 것과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의미를 훨씬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흔히 일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 예쁜 아기를 보고, ‘아이 얄미워라’라고 말한다든지, 잘못한 아이의 행동을 보고 ‘정말 예쁜 짓도 많이 하는구나’ 라고 말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아이러니의 수사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단순히 의미의 강조 효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든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예쁜 아기를 보고 얄밉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대조에 의한 의미의 강조만은 아니다. 너무 예쁜 나머지 얄미운 정도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미묘한 심정의 표현이다. 거기에는 그렇게 예쁜 아이를 가진 그 아이의 부모에 대한 질투심도 들어있고,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해서 그 예쁜 것이 손상될 것 같은 어떤 조바심도 들어있다.

 

2) 아이러니는 현대시의 본질

아이러니는 하나의 단어로는 표현하거나 분명히 단정할 수 없는 다양한 느낌과 생각을 한꺼번에 제시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다. 그렇게 볼 때 아이러니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사물이나 세상을 보고 표현하는 정신적 자세나 태도와 관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는 동물의 보호색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는 수사적인 장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또 표현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아이러니는 균형잡힌 넓은 시야를 성취하게 하고, 삶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불일치의 공존이 삶의 구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러니야말로 시와 예술의 근본적 성격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일한 원리나 확실하고 명확한 신념이 가진 단순화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물의 구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이고 예술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3) 확정적 아이러니와 불확정적 아이러니

이상에서와 같이 아이러니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비를 통한 강조를 나타내는 ‘수사적 아이러니’와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수용하는 ‘포괄의 아이러니’이다. 수사적 아이러니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의 것을 말함으로써 강렬한 대비를 이끌어내는 아이러니이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좀더 확고하게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와 반대로 포괄의 아이러니는 확정지을 수 없는 두 극단의 생각을 동시에 드러내는 아이러니이다. 두 가지의 생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정신적 긴장을 표현해 준다. 그래서 이 둘을 각각 ‘확정적 아이러니’와 ‘불확정적 아이러니’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한 시인이 쓴 서로 다른 두 시의 예를 들어 두 가지 아이러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① 확정적 아이러니의 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 시에서도 아이러니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가 오지 않을수록 나는 너에게 가고 있고, 너와의 만나지 못함이 헤어짐이 아니라 가까워짐이라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너는 일단은 연애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일 것이다. 연인만이 아니라 친구일 수도 있고, 민중일 수도 있고, 민주나 자유일 수도 있다. 어떻든 여기서 너를 만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어떤 완전한 소통을 의미한다. 인간과 인간이 소외를 극복하고 소통을 회복하는 사랑이나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를 지금 시인은 갈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너는 지금 없지만, 즉 인간간의 완전한 소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만이 심화되어 있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넓혀 생각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지금 단절과 소외를 겪고 있지만 역사적 안목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또 사회 속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고 그러한 사회적 활동에서 우리의 단절과 소외가 극복되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한 인식은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가는 행위이다.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의 단절과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들의 관계는 회복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시인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에서 쓰여진 아이러니는 이러한 시인의 생각을 보다 확고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헤어짐과 오지 않음을 통해 만남의 필연성과 가야할 사명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아이러니 사용을 위에 설명한 대로 ‘수사적 아이러니’ 또는 ‘확정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를 통해 확실한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고, 반대의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그런 아이러니이다.

 

② 불확정적 아이러니의 예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페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앞서 인용한 시가 시인이 30대에 쓴 것이라면 이 시는 시인이 50이 다되어 쓴 시다. 이러한 시간과 나이의 차이를 반영하듯 앞의 시는 아직 생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인 데 반해 이 시는 인생에 대한 쓸쓸한 체념이 느껴진다. 그것은 일단 어조에서도 온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시의 어조는 뭔가 갈구하면서 또한 다짐하는 듯한 희망적이면서 적극적인 확신에 찬 어조이다. 그러나 이 시의 어조는 다분히 주저하면서 머뭇거리고 체념하는 듯한 어조로 되어 있다.

 

시의 리듬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 시는 중간쯤의 비교적 짧은 시구들의 반복을 통하여 너에 대한 확신과 믿음과 그리고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의 다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시는 풀어진 산문체로 씀으로써 긴장감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삶에 대한 기대나 바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시의 배경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앞서 인용한 시의 배경은 다방인데 이 시의 배경은 술집이다. 다방이나 술집이나 누군가를 만나는 곳이다. 다방에 혼자 있거나 술집에 혼자 있거나 다 불쌍하고 외롭게 보인다. 누군가 만날 사람을 못 만났거나 어떻게 해서 혼자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다방은 만남의 시작이다. 그러나 술집은 만남의 끝에 존재하는 곳이다. 때문에 다방에서 홀로 된다는 것,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아직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에서 혼자 있다는 것은 누군가 만나리라는 기대도 희망도 남아있을 수 없다. 우리가 다방에서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외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혼자 쉬고 있다거나, 무슨 일로 상대에게 바람을 맞았지만 어느 땐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너무 처연하게 보일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혼자 버려진 너무나 쓸쓸한 한 인간을 보는 듯이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시는 인생에 대한 열패감과 절망감을 표현한 자기 연민의 시로 읽혀진다. 그러나 이는 이 시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한 해석의 결과이다. 이 시의 아이러니는 ‘아름다운 폐인’이라는 구절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과거 70년대나 80년대를 뜨겁게 살아왔던 것처럼 어떤 가치라든가 신념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가치지향이 없는 삶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폐인이다. 그러나 신념이나 가치나 전망이 주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아름다울 수가 있다.

 

‘슬픔처럼 상스럽다’라는 표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상일에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런 것이 사실은 상스러운 감상과 무어 다르겠는가 하는 인식이다. 그런 것을 벗어버린 초연함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절대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의 삶이 억압이고 자기기만이지만 또한 지금의 자기 모습도 ‘뚱뚱한 가죽부대’처럼 퍼지고 주저앉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폐인이다.

 

이 시에서 보여준 이러한 아이러니가 ‘불확정적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앞의 확정적 아이러니에서는 아이러니를 그것을 만든 시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불확정적 아이러니에서는 아이러니를 시인이나 독자 모두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아이러니는 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신이나 운명이거나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때문에 시인은 아이러니컬한 대립 속에서 긴장과 방황을 경험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목소리 높은 신념에 이끌린 바깥의 삶이나 지금 주저앉혀진 자신의 삶, 그 어디에도 진실이나 정당한 길은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사이의 끝없는 긴장과 그 사이에서의 방황에 사실은 우리의 삶이 놓여있고 거기에서 진실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이 시는 아이러니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 원고는 2016년 8월 13- 14일 충남 서천군 문헌서원에서  열린 <<시즐>> 특강 원고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