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권력을 쥐려던 야만의 시절 1979년 겨울, 소리 소문 없이 발표된 한 편의 시가 동시대 사람들을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어떤 이는 부끄러움에 자책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 시를 핑계로 쓰디쓴 소주를 목안 깊숙이 털어 넣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란 묘한 제목의 시였다. 늦깎이 시인 김광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며 이 한 편의 시는 보통 사람들에게 성큼 다가왔다. 평생 시를 모르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조차 그가 발표한 이 시를 읽고 부끄러움과 회한에 빠져들게 된다. 지난 30여 년간 소리 없이 수많은 사람을 울린 시인 김광규(75·사진) 교수가 최근 이탈리아 문화예술계의 초청으로 2개월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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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행도 궁금하지만 우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부터 얘기해야겠다. 이 시를 가만히 읽노라면 매캐한 최루가스 속에서 깨진 보도블록을 던지던 스무 몇 살의 청춘들이 생각난다.

“이제는 아득한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 시는 1979년 ‘창작과 비평’ 가을 호를 통해 발표될 예정이었다. 제본이 끝나고 발간 직전 계엄령이 선포되고, ‘문지(문학과 지성)’ ‘창비(창작과 비평)’ ‘뿌리깊은 나무’ 등 비판적 계간지들이 줄줄이 폐간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이듬해인 80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되어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왔다. 당시 계엄사 육군 장교가 ‘늪으로 발을 옮겼다’는 구절을 두고 ‘술을 마시면 집으로 가야지 왜 늪으로 가냐’고 빨간 줄을 쳐 둔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시 자체는 시대적 상실감, 좌절감을 담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절망의 노래다. 4·19 세대의 부끄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가 수록된 나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은 그 후 20쇄 이상 찍어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여러 언론 매체에서 이 시가 인용된다. 원래 4·19 관련 시는 김수영·신동문·김춘수 등 선배 시인들이 주역이었다. 그런데 80년대부터 4·19가 되면, 20년 늦게 발표된 내 시가 단골로 들려왔다. 심지어는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시 한 편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려니 원작과는 많이 다르게 되었다. 몇몇 시편은 중·고교 교재에 실렸고, 몇 해 전에는 ‘국어사랑 교사모임’의 추천으로 시를 인쇄한 티셔츠까지 나왔다. 평이한 내 시가 굴곡 많은 현대사를 어렵게 살아온 보통 한국인들에게 폭넓은 공감을 주고 있기 때문일까.”

 

-제목이 묘하다. 제목만 봐서는 선생 개인의 희미해진 옛사랑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60년 봄 문리대에 입학했을 무렵 영국의 비틀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다방에 가면 비틀스의 ‘I want to hold your hands’를 줄곧 틀어대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이사이에 섞여 중남미 민요 ‘루나 예나’(‘달빛’이란 스페인어)도 들려왔다. 아주 청승스러운 노래였다. 블루 벨스 사중창단과 박인희·이필원의 뚜아 에 무아가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루나 예나의 한국판 노래 제목이었다. 79년 10·26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는 부산대 교수였다. 시위 학생들을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낸 10월의 어느 날 밤, 동래 온천장의 하숙집에서 이 작품을 썼다. 4·19 세대인 나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회한이 담겨 있다.”

 

-건강해 보인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은 어땠나.
“골골 평생이라고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워낙 조심스레 살아 온 탓에 그래도 이만큼의 건강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은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장거리 해외여행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됐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베네치아 카포스카리대학의 공동기획으로 라이터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두 달 동안 한국 현대시 관련 특강과 작품 발표 8회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왔다. 그중 2회는 규모가 큰 국제문학축제에서 내 시를 낭송했고, 원어민 낭독자가 이탈리아어 번역문을 읽었다. 현지 세종학당에서는 ‘산유화’ ‘향수’ ‘가고파’ 등 예술가곡으로 변한 시를 골라 해석하고 낭송하고 또 노래를 듣는 시간도 가졌다. 청중의 진지한 수강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선생의 시는 일기 같기고 하고 독백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 같지 않은 시라는 비판까지 등장했었다. 평생 천착해 온 일상시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일상시를 도입한 초기에는 간혹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시작이 그런 것 아닌가. 나는 시를 쓸 때 난삽한 메타포의 사용이나 구문의 자의적 파괴를 피하고, 지금 이곳의 현실을 진솔한 일상어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일상어란 보통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의 차원을 뜻한다. 여기에 담긴 현실체험의 폭은 매우 넓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일상을 넘어 깊은 산속의 절이나 바다 밑의 해조류, 그리고 잠자다가 꾸는 꿈의 영역까지 포함된다. 일상시의 단순성과 명징성을 획득하기 위해 나로서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아직도 난해한 부조리시를 현대시의 지표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후배 시인들이 일상시의 자장을 넓혀가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시인이다.
“올해로 고희의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65세 정년이 지나면 누구나 주류사회에서 떠밀려 나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뒤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저세상으로 밀어내는 것 같다. 몸이 아플 때는 빨리 가라고 등 뒤에서 쿡쿡 찌르는 기분이다. 아무런 허세도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그러나 좀팽이처럼 살아 왔다. 좀팽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나다, 나답게 살자’가 내 인생의 좌우명이다. 1년에 20편쯤 시를 발표하고 4년마다 1권쯤 시집을 펴낸다. 주로 문학과 지성사 한 출판사에서만 냈다.”

 

-흔치 않은 서울 토박이다.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나 피란 시절을 제외한 30년 가까이를 인왕산 아래 서촌에서 살았다. 그 뒤 서대문구 홍제동 안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골목 맞은편 연립주택 신축으로 인해 오후 3시면 해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지은 이 집에 애착이 간다. 이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냥과 낚시, 축구와 유도를 즐기던 구한말 한량이셨다. 북유럽 문학에 대한 동경이 있어 독문학(서울대)을 선택했다. 서울고 시절 소설가 김광식, 시인 조병화 선생에게 국어·작문을 배웠다. 그분들이 나를 칭찬하고 북돋워 주었다. 아내도 서울 토박이다. 이화여고 출신인 아내 정혜영과는 서울 문리대 입학시험 때 만났다. 나중에 보니 같은 동네 살더라. 내가 눈이 좀 작다. 그래서 눈이 큰 여자에게 반했나 보다. 아내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부부 교수로 평생을 지냈다.”

 

-선생의 시는 한국시 중 가장 세계화됐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독일어·중국어·스페인어 등 10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시집 『상행』은 아랍어로도 번역돼 이집트에서 출간됐다고 들었다. 나라밖 사람들이 이처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언어권별로 반향에 차이가 있었지만 아마도 몇몇 평자들이 지적한 대로 나의 시가 지닌 문학적 보편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독일어권에서 나온 번역시집 두 권에 대한 반향이 특히 좋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와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에 서평이 크게 실렸고, 어느 원로 시인이 ‘쥐트 도이치 차이퉁’의 칼럼에서 내 시를 다루기도 했다. 미국과 중국·스페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도시의 작품 낭독회에 초대받기도 했다. 2002년에 스페인어권인 남미 콜롬비아 메데진의 야외 원형극장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 서정시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때 개막식 이튿날 현지 유력 일간지가 행사 보도를 하면서 뜻밖에도 ‘안개의 나라’ 스페인어 텍스트를 컬러판으로 실었다.
연전에는 영국 BBC 라디오 방송 문학프로 ‘Poetry Please’에서도 이 시를 방송했다. ‘어느 돌의 태어남’은 미국 일리노이주 교과서 ‘Great Expectations’에 실렸다. ‘가을 하늘’이라는 작품은 베이징대 대학원 입학시험에 나온 적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나뭇잎 하나’라는 작품이 2009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었다. 그런데 내가 문제를 풀어 봤는데, 다섯 문제 거의 다 정답을 맞히기 힘들었다. 시를 시험문제로 만드는 대신 차라리 외국에서 하듯이 초·중·고 시절에 시 100편을 외우게 하는 것이 시 교육에 크게 기여할 것 같다.”

선생과 나는 교류한 지 30년이 넘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꽃다운 20대, 선생은 중후한 40대 중반. 그런데 지금도 그대로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아한 몸가짐, 조용한 미소, 무념무상, 무욕의 생활 등 가끔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될 만큼 곱게 살아 오셨다. 서서히 쇠잔해 가는 선생과의 젊은 날을 추억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큰 슬픔이 된다. 늙어가는 선생만큼 나이든 앞마당 대추나무에 한 무리의 능소화가 초복의 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