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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에 있어서의 슬픔의 역설적 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6. 8. 10:34

현대시에 있어서의 슬픔의 역설적 힘

박 진 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슬픔이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기쁨만이 가득한 세계일까. 행복이 지속되는 세계일까.

2015년 여름,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기쁨, 슬픔, 소심, 까칠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의인화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주제 또한 이러한 질문과 동궤에 자리한다. 기쁨은 긍정적 감정으로 행복에 연결되고 슬픔은 그 대척되는 지점에 자리하는 부정적 감정으로 불행에 연결된다는, 일반적 인식을 두고 과연 그러한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의 대립을 떠나 전통 서구 사상에서는 아예 감정 내지 정서 자체를 이성과 대립되는,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가치하위의 것으로 고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정서가 이성보다 열등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정서의 본성과 힘에 대한 진의를 탐구했던 이가 스피노자이다. 스프노자에게 있어 정서란 단순한 느낌이나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변용과 물리적 변용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 다시 말해 이성의 영역과 신체적인 영역에 모두 상호관련성을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정서에 대해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했던 스피노자 또한 슬픔을 부정적 감정으로 분류했다. 코나투스, 즉 인간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힘을 감소시키는 감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기쁨의 정서는 쾌감이나 유쾌함으로, 그 반대의 경우인 슬픔의 정서는 고통이나 우울함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도는 언뜻 보아도 너무 단선적인 분류로 느껴진다. 스피노자 사상의 보다 전체적인 틀 속에서 살펴야만이 그 진의가 드러날 것이나 여기서 길게 설명할 일은 아니다. 범박하게나마, 보다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는 ‘고귀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메시지를 기억하면 그만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에서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라고 했다.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길, 더 나아가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란 힘들고 드물지라도 끝내 고귀한 것을 향해 나아갈 때 열리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슬픔은 오히려 진정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극복을 통한 자아 고양의 측면도 그 의미 중 하나일 것이나 가장 큰 의미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진다. 타자로 인한 슬픔, 더 구체적으로는 타자의 고통으로 인한 슬픔이 그것이다. 시인들이 그토록 슬픔에 천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란 근원적으로 존재에 대한, 세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사랑하는 대상의 고통이나 슬픔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느냐던 백석의 언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백석은 시인을 일컬어 “슬픈 사람”,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으로 규정한 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이란 슬픔의 대상이 만물에 이르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성속귀천을 떠나, 생명의 유무를 떠나 모든 존재에 이르는 슬픔을 포회하고 있는 것이 시인의 혼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슬프지 않을 일도 시인이라면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아니 슬퍼하게 된다는 뜻이다. 맨 처음 울기 시작해 맨 마지막까지 우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시인은 누구보다도 슬픔에 예민한 존재이며 또 그러한 시인의 슬픔은 넓고도 깊은 것이다.

 

‘슬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박재삼이다. 박재삼은 “가장 슬픈 것을 노래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 시’의 정수를 ‘슬픔’으로 보고 시인이란 슬픔을 오히려 ‘바라고 키우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가난으로 인한 한의 정서를 박재삼 시의 특징으로 꼽지만 그것은 표층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그의 시에서 슬픔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공동체 지향적 측면에서 윤리적 감각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존재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 슬픔이 스스로 의지하는 능동적 정서로 드러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정서를 이토록 폭넓은 음역에서 의미화 하고 있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슬픔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결핍 내지 상실에서, 혹은 사랑하는 대상의 고통에서 슬픔이 발생하는 것이다. 슬픔이 아름다움일 수 있고 윤리적 감각과 연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난으로 인한 서글픔을 노래하고 있는 박재삼의 시에서도 서정적 자아의 시선이 가 닿아 있는 것은 주로 ‘울엄매’, 아버지, 형, 오누이 등 사랑하는 가족의 처지와 심정이었다.

근래 들어 슬픔의 이면 혹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다룬 영화나 책 등이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 시사에서는 이처럼 일찍부터 미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슬픔의 정서를 고려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의식은 한 시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래의 시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시인의 경우 박재삼의 시와 형식이나 분위기에서는 다르지만 가난 속에서의 혈육에 대한 사랑과 슬픔이라는 동일한 정서를 그리고 있는 이로 함민복을 들 수 있다.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전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 1996.)

 

슬픔이 타자의 고통에서 오는 것일 경우 타자와의 관계가 긴밀할수록 감내해야 할 슬픔 또한 깊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다양한 관계 중에서 어머니와 자식 간의 관계만큼 근원적으로 긴밀한 관계는 없을 것이다. 타자와의 영육의 합일이라는 불가능한 현실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어머니와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러한 관계에서 발현되는 웅숭깊은 슬픔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리는 과정에서 생긴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이 시에서 슬픔은 가난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한 처량한 처지가 시의 배경이 되고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슬픔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시적 자아와 어머니와의 관계성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를 먹으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어머니가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아들은 이를 따른다. 아들을 위해 자신의 육체적 고통쯤은 아무렇지 않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 시적 자아는 기꺼이 철없는 아들이 된다. 이 시에서 슬픔은 이처럼 서로를 위하는 행위로 인해 어머니는 귀를, 아들은 마음을 앓게 되는 아이러니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가난’이 아니라 ‘사람’이 슬픔의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이와는 다른 차원의 슬픔을 나호열의 시에서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이를 ‘타인의 슬픔’이라 이름한다.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나호열, 「타인의 슬픔 1」전문 (『타인의 슬픔』, 연인M&B, 2008.)

 

‘제 풀에 주저앉은 의자’는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져버린 존재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견고했던” 존재가 무너져 내린 이유는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에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슬픔”이란 어떤 의미일까. 타인으로 인한 슬픔일까, 혹은 나의 슬픔이 되지 않는, 다시 말해 공감할 수 없는 타인만의 슬픔인 것일까.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라는 시구에서 그 의미를 간취해 보면 “타인의 슬픔”이란 진정한 ‘나’의 슬픔이 아니라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서 학습된, 혹은 주입된 슬픔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라캉의 언표와도 일맥상통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 대상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조작된 결핍에 의한 것이다. 경쟁적으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자신의 욕망 대상으로 오인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러한 거짓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더욱 자신을 채찍질해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타자의 욕망’,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 앞에서 겪게 되는 슬픔 또한 진정한 자신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타인의 슬픔’은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정호승의 대표시 중 하나인 「슬픔이 기쁨에게」는 나의 무관심으로서의 ‘타인의 슬픔’을 의미화 하고 있는 경우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전문(『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3.)

 

인용한 시는 슬픔이 사랑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을 때 슬픔은 ‘타인’의 것, 즉 ‘타인의 슬픔’일 뿐인 것이다. 이 시에서 기쁨은 슬픔을 모르는, 세상의 온갖 슬픔들에 무감각한 인간 군상을 표상한다. 또한 슬픔은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존재에 대한 넓고 깊은 사랑으로 의미화 되고 있다. 슬픔이 “사랑보다 소중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슬픔의 얼굴’을 ‘평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평등’이란 주체와 대상 간의 위치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슬픔은 주체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슬픔은 공감이고 그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평등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경험은 공감을 가능케 한다. 슬픔을 가져본 적이 있는 자만이 온전히 슬픔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 이것이 바로 시인이 생각하는 “슬픔의 힘”이 아닌가 한다. 우리 사회에서 작용하는 정치·경제·문화적 서열의 경계를 무화시킬 수 있는 것은 거리를 상정한 채 그저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보다 직핍하게 공감하고 기투하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연민’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감정이다. 아무리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도 뉴스에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것처럼.

슬픔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각인된 자신의 것이기에, 슬픔에 동참할 때 스스로도 슬픔의 주체가 되는 것이기에, 슬픔의 극복 내지 해소 또한 ‘슬픈 타인’과 동일한 보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슬픔의 차원에서 기쁨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시에서 ‘슬픔’은 슬퍼하지 못하는 ‘기쁨’과 “눈 그친 눈길”을 “함께 걷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현실적으로 기쁨으로 표상되는 인간들로만, 혹은 슬픔으로 표상되는 인간들로만 이 세계가 구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둘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슬픔’이 이와 대척되는 의미의 ‘기쁨’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가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기쁨’에 가 닿을 것이다. 사랑에는 슬픔과 함께 기다림도 포회되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너와 함께 걷겠다”는 의지가 시인이 생각하는 ‘슬픔’의 태도인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슬픔의 얼굴을 평등으로 언표했지만 김수우의 시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슬픔의 주체와 객체의 위치를 전복시키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만나는 일

 

거미 먹은 개구리 삼키는 왜가리 보듯

 

내 것보다 더 큰 당신의 슬픔에 엎드리는 일

 

목불의 미소를 찾아 동으로 간 눈 깊은 승려를 기다리듯

 

당신보다 더 큰 너구리의 슬픔에 도착하는 일

 

수년 유충이다, 단 하루 하늘을 나는 하루살인듯

 

너구리보다 더 큰 여뀌의 슬픔을 응시하는 일

 

신이 가장 잘 알아듣는 언어는 침묵이듯

 

물든다는 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

 

신발이 있든 없든,

햇살이 돌아보든 돌아보지 않든,

가을이 오든 오지 않든,

 

- 김수우,「단풍든다」전문(『시안』제54권, 2011.)

 

김수우 시인은, 인간 존재가 진실로 살아있다는 것은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만나는 일”이라 단언하고 있다. ‘거미를 먹은 개구리’, ‘개구리를 삼킨 왜가리’, 왜가리는 또 다른 맹조류의 먹이가 된다고 할 때, 거미와 개구리, 왜가리 중 어느 것의 슬픔이 더 크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서 김수우가 인식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의 진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 슬픔의 ‘평등’이란 결코 같은 위치에서 같은 무게를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슬픔을 “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내 것보다 더 큰 당신의 슬픔에 엎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인이 생각하는 ‘슬픔의 평등’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가 진행됨에 따라 슬픔의 정조는 점점 고조되지만 ‘당신’에서 ‘너구리’, ‘너구리’에서 ‘여뀌’ 등으로 슬픔의 주체는 점점 미미해지는 양상이 바로 ‘슬픔의 평등’을 이루는 형식이 되는 셈이다.

 

슬픔은 ‘물드는 것’이다. ‘당신의 슬픔’보다 ‘너구리의 슬픔’이, ‘너구리의 슬픔’보다 ‘여뀌의 슬픔’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존재에게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 듯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냐던 백석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발이 있든 없든, 햇살이 돌아보든 돌아보지 않든, 가을이 오든 오지 않든” 관계없이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 기투할 수 있다 할 때, 그것은 ‘타자의 욕망’과도 ‘타인의 슬픔’과도 거리가 먼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고귀한 것’이자 슬픔이 진정한 기쁨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다시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기쁨은 긍정적 감정이면서 행복이고 슬픔은 부정적 감정이자 불행이라 할 수 있는지.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에서 결말은 행복한 기억에 기쁨이 단독적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슬픔에 공감과 위로가 따를 때 비로소 기쁨이 자리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슬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슬픔은 부정의 영역에서 그것의 극복을 통해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로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일 수 있다. 슬픔의 공유는 타자들 간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평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위무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은 회귀하게 마련이다. 슬픔도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의 주체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위로 받으며 스스로 슬픔을 녹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 국가적 차원이라고 다르지 않다. 경제적 손익의 논리를 앞세워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삐걱이는 슬픔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함께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기다려주는 것이 예의다. 우리 사회에 통곡의 역사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은 슬픔을 제대로 슬퍼하거나 위무하지 못하고 없던 것으로 덮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의 내용을 만들어내는 정서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정서가 시대의 주조가 되거나 혹은 어떤 시인의 정서 깊숙이 내재하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달리 구현될 것이다. 정서의 깊이가 없는 시를 두고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서 가운데에서도 우리 시인들이 부단히 천착해 온 정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슬픔이다. 이 감성은 흔히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우리 시사에는 슬픔의 역설적 힘을 통찰한 시인들이 꾸준히 있어왔음을 살폈다. 이러한 역설적 발상이 시의 깊이와 외연을 확산시키는 데 훌륭한 매개가 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에 있어 슬픔이라는 정서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성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성이자 작품의 의미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 긍정성으로 작용해왔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