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갑질’이라는 말이 풍미하더니, 이제 이 말은 조금 덜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사이 짧은 동안에 인간관계가 조금 더 인간적이 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심리가 비판에 민감하고, 그것을 수용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일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것이 여론의 힘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시정돼 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중에 쉬지 않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부패사건도 그럴 것으로 생각해본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기 쉬운 상태가 되어 있는 시대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마음가짐의 기반이 불확실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떻게 하여 확실한 것이 될 것인가?

 

갑질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정신문화의 여러 현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조금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갑질은 말할 것도 없이 갑과 을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있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을이 갑질을 견뎌내는 것은 이 끊을 수 없는 관계 때문이다. 갑과 을 사이에는 또 하나의 항목, 병(丙)이란 게 있을 수 있다. 이를 X와 Y 사이의 Z라고 하자. 병은 갑과 을의 관계 또는 그들 모두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갑과 을 두 사람이, 좋든 나쁘든,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Z는 간단히 말해서 X와 Y를 함께 묶는 관계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함께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회사의 규정 또는 계약 조건이 요구하는 일일 수도 있고, 국가의 행정 체계가 명령하는 일일 수도 있다. 일을 하는 데에 제일 바람직한 것은 서로 밀고 당김이 없이 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일의 처리에 참여하는 경우, 서열과 명령의 관계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겨나는 상하 질서가 반드시 개인적인 상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Y가 명령을 받는 입장에 있다면, 그 명령은 X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Z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X도 Z의 명령에 복종한다. 사실은 두 사람 다 Z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태여 ‘갑질’이라는 형식의 표현을 쓴다면, 갑이나 을이나 다 같이 ‘병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적 인간관, ‘경제인간’의 가설 당연시

그런데 어찌하여 갑질에 대한 불만이 높은가? 이 불만은, 간단히 말하면, 갑질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갑질은 억지스러운 일의 강제를 뜻한다. 또는 하라는 일이 예의 없이 강제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의는 사회 소통의 관습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놓여 있다. 이 존중이 있을 때, 해야 하는 일에는 일하는 사람의 자발적인 동의가 전제된다. 물론 예의는 명령을 보다 부드러운 언어로 전환하는 기능을 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사회 소통의 언어로서의 예의는 의무와 동의를 수월하게 하나가 되게 한다.

 

갑질은 개인이나 집단이 독단적인 의지를 타자(他者)에게 강요하려는 것을 새로운 속어(俗語)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가 많은 것은 우리 사회 도처에 그러한 강요의 의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에서도 그러하지만,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이리가 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라는 홉스적 인간관, 또는 경제이익의 추구가 삶의 근본적인 추동력이라고 하는 ‘경제인간’의 가설이 당연시되는 것이 오늘날이다.(그리하여 성악설이 오늘을 지배한다. 그런데 사실적 명제는 쉽게 당위가 된다.) 정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평등한 인간관계가 별로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관습이다. 직함의 높고 낮음, 연령이나 학번의 선후배 서열과 같은 것이 없이는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남녀 사이에서 ‘오빠’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도 이러한 사회 규범의 희화적(戱畵的)인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여기에서 그 반대의 동아리 문화, 파벌 문화가 생겨난다.)

 

평등한 인간관계 별로 없는 우리 사회

다시 갑과 을을 하나가 되게 하는 공통분모로 돌아가서, 그것은 수행해야 하는 공동의 작업을 의미한다. 이것은 회사 조직이나 관료 조직 안에서의 직무일 수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그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이 따르면, 그것은 작업이나 직무를 조금 더 원활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일의 의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관계자가 자신의 작업 수행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인다면, 그 경우에도, 일은 별 차질이 없이 수행될 것이다. 사실 모든 일을 해내는 데에 동기의 한 부분은 의무감이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윤리나 도덕에 관계없는 일에도, 적어도 반은, 윤리 의식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일 자체가 윤리적 성격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사고 현장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경우, 일 자체가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호작업에 집단적 조직이 필요하고 서열과 명령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갑질 논란을 일으키지는 아니한다. 집단의 존립, 명예 또는 집단적 정의의 원칙 등, 해야 하는 일의 명분이 완전히 공적인 것일 때, 또는 인권이나 자선과 같이 보편적 인간 이상이 작업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일 때, 거기에는 갑을의 권력 관계가 개입될 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나 민족·정의 또는 다른 보편적 인간 이상의 명분에도, 자신의 권력 의지나 이익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끼어들 수는 있다. 그러나 마땅히 수행되어야 할 의무의 정당성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전적으로 공적인 의미를 가진 일들에서는 명령관계가 갑을의 불평등 관계로 크게 부상되지 않는다. 가령 종교 조직의 성직자의 경우, 그들이 수행하는 의무의 작업을 갑질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것은 교사나 교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교사의 요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오늘에 있어서도 그의 일을 갑질이라고 규정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성직자나 교직자가 세속적인 의미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 이득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라면, 그들이 받는 보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들도 다른 모든 직업인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밥벌이가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상의 일부는 밥벌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의 본질적 의의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바르게 수행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보람 있는 자기실현이 되기도 한다.(여기에서의 자기실현은 조금 높은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되지만, 이것은 일상적으로도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필자가 읽은 일화를 되풀이하면, 어떤 사람이 아침의 산책길에서 늘 마주치는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아침 인사말을 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인사하는 사람의 지인이 왜 답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렇게 인사를 하는가 하고 말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왜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행동하는가?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의를 스스로 지킬 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켜야 할 예의를 스스로 지킬 뿐

그런데 참으로 묻고 싶은 것은 정치인이 이에 비슷하게 극기(克己) 봉사하는 사람의 테두리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본질적 의미를 따져 본다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지역이든 국가든 소속된 모든 사람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명분 이외에, 정치에 어떤 다른 명분이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의 안녕이란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안녕이다. 위에 말한 정신적 직업에서 인간적 안녕이 문제된다면, 그것은 다분히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와 욕망을 금욕적으로 억제할 것을 또는 적어도 그것들 사이의 균형을 전제로 한다. 정치인은 반드시 그러한 금욕을 보편적 요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금욕주의자처럼 많은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할 수 있는 절제와 수련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인은 사회 전체의 보편적 안녕을 목표로 하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실천적 정치 행동에서 사람들의 앞장에 설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적으로 야심을 가지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인들은 서로 모순된 자질의 종합을 요구하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세속적 권력의지를 갖는다고 해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권력의지를 가지면서 동시에 그 초월이 가능한가? 하나의 설명은, 정치 공간의 특별한 역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필자는 정치는 공공 행복을 얻는 일이라는, 하나 아렌트의 정치 개념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공공 행복은 행동자들이 함께 그리고 경쟁적으로 공적 공간에서 그들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데에서 오는 삶의 기쁨이다. 뛰어남이란 높은 인간적 능력의 발휘를 말한다. 그것은 윤리적인 뛰어남을 포함한다. 공적 공간은 공적 덕성을 강화하게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확인되는 공공성이 국민의 복지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은 물론이다.(다만 아렌트는 정치와 복지 또는 경제적 번영의 직접적 연결에 대하여 유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치 행동의 공공성의 기준을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추구해야 할 것은 공적 행복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공공 능력은 반드시 뛰어난 인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민주 시민은 정치 공간에 참여하여 공공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민주적 공공 공간이다. 그러면서 정치 지도자가 탄생하는 것은 정치의 현실 논리의 한 결과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있고 따르는 자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권력 의지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 추구하는 것도, 정치적 상승의 기회가 아니다. 이상적으로 말하여, 그들이 얻는 공적 행복 그리고 자아실현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그들이 얻는 보상이다.

 

계약관계의 수행에 있어서나, 삶의 정신적 영역에 있어서나, 정치적 상호 경쟁에 있어서나,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개인 의지에서 나오는 갑질 의지가 아니라, 사실적 상황. 정신적 규범의 원리 그리고 공공 이념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행동에 일정한 규범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범은 높은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차원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삶의 필요이다. 위에서 본 인사 예절을 지키는 사람의 경우처럼, 그것은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의 과제는 어떻게 이러한 삶의 자연스러운 경향이 일반적 문화로 정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선도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의 모범이다. 정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보는 스포츠이기도 하고, 실제로 모든 사람의 삶의 조건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결정적 사건이기도 하다. 새로이 출발하는 국회에서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