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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길 / 채종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6. 8. 20:31

단편소설___채종인

 

 

저녁 길

 

채종인



 

누나가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우리 학교 국기 게양대와 그것에 의해 선명하게 두 쪽으로 나눠진 빨간 교회 종탑이 보일 즈음이었다. 국기 강하식을 하는지 조금 초췌해 보이는 사내가 가슴을 철봉에 붙이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우리 학교 소사 강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휴, 저 소리!

 

누나는 신경질적으로 귀를 움켜쥐었다. 단발머리가 정갈하게 팔랑거렸다. 나는 은은하게 들려오는 애국가와 그 사이 은밀하게 다가오는 북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누나가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북소리 때문일 것이었다.

 

초췌한 사내는 가슴팍까지 끌어내린 국기를 접어 파랗게 단장된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걸어들어 갔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누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애국가가 사그라지자 북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누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저게 뭐 같다고 생각하니?

 

누나는 애써 어른스러워 보이려는지도 몰랐다. 누나의 목이 수수깡 속처럼 하얗게 드러났다.

 

“솜 같아. 코피날 때 막는 솜 말이야.

 

나는 먼 산기슭으로 내리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는…….

 

그 때 누나는 나를 쏘아보았는데 누나의 눈동자는 포도알처럼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는 양팔을 벌려 제트기 흉내를 내며 뛰어갔다. 북소리가 둥둥거리며 따라왔다. 쉬엄쉬엄 징 소리도 들려왔다.

 

누나가 보아주지 않는 제트기는 언제나 힘이 없었다. 나는 곧 날개를 접고 누나가 오기를 기다렸다. 누나는 정갈한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하늘만 보고 걸었다. 해는 이미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지구 저편 어느 나라로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어디까지 왔니?

 

나는 눈을 감고 힘주어 외쳤다.

 

“…….

 

“어디까지 왔니?

 

누나는 기어코 대답을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 북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북소리는 보름달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음악시간에 배운 ‘따-안’이 한 박자라면 저 북소리는 반 박자 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은 다듬이질 소리나 도마질 소리처럼 숨이 가빴다. 입술이 빨간 여자의 주문 외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환청인지도 몰랐다.

 

“어디까지 왔니?

 

나는 실눈을 하고 외쳤다. 누나는 어느덧 내 그림자 위로 성큼 다가섰다.

 

“어디까지 왔니?

 

“요기까지 왔다!

 

누나는 예상대로 내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익숙한 살냄새가 묻어왔다. 나는 눈을 뜨고 누나의 어깨 너머로 우리 집을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우린 이미 미루나무 고개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보일 리 없었다.

 

“누나, 어두워지고 있어.

 

누나의 저녁 길은 결코 끝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우리 학교 후문으로 통하는 갈림길을 두고 몹시 신경이 쓰였다. 북소리가 들리는 한 누나의 저녁 길은 계속될 것이고 나의 동행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누나가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저 북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입술에 빨간 칠을 하고 초승달 눈썹을 한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서고부터였다. 마른 해바라기 잎을 꺾고 있는 우리를 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에미를 낫게 해줄 분이란다.

 

그때 누나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는데 해바라기의 긴 그림자가 끝나는 곳에 그 여자가 서서 웃고 있었다. 빨간 입술이 가늘게 늘어졌다. 여자의 손엔 파란 보자기에 곱게 싸여진 북이 들려져 있었고 그 뒤엔 나보다 두어 살 아래로 보이는 머슴애가 힘에 겨운 징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몹시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이가 들고 있는 징만큼 그의 눈도 크고 깊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컸구나.

 

여자가 누나의 손을 잡은 것은 실수였다. 누나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종종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때 나는 할머니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눈빛을 보았다. 낭패감이 서려있었다.

 

누나는 정자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내가 누나의 허리께로 다가서자 누나는 처음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왜 왔니? 바보같이…….

 

그때 나는 누나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다. 기껏 네 살 위였지만 누나는 내 세상 밖에서 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누나의 아픈 마음을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누나 또한 얘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만 돌아갈까 보다.

 

누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고집이 센 누나라도 전설처럼 되어있는 우리 학교 달걀귀신 얘기에는 꼼짝 못할 것이었다. 나는 학교 담벼락으로 벌 떼처럼 달라붙는 어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을 정한 누나의 발걸음은 빨랐다. 나는 누나의 손아귀에 손목을 잡힌 채 어둠이 내려앉는 자갈길을 서둘렀다.

 

“굿을 한다고 어머니 병이 나을까?

 

등골에 땀이 흐른다고 느낄즈음 누나가 불쑥 물어왔다.

 

“낫겠지 뭐.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잖아. 그 여자가 굿하면 낫는다고.

 

나는 생각 없이 중얼거렸지만 곧 두서없는 나의 행동에 후회하고 말았다. 누나의 신경을 돋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정말일까?

 

누나의 반응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차분했다.

 

“으응…….

 

나는 누나의 손바닥에 빠지직 땀이 흐르는 것은 느끼며 짧게 대답했다. 개구리가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 자식 눈 참 크더라.

 

나는 오랜만에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

 

누나의 단발머리가 어둠 속에서 나풀거렸다.

 

“낮에 그 자식 말이야. 징 들고 있던…….

 

“……으응…….

 

누나는 먼 회상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단음조로 알은 체를 했다.

 

“나보다 키가 더 크겠더라.

 

“그렇기야 하려구…….

 

누나는 그 아이에 대해선 관심도 없다는 듯 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나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역시 누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조금 전 외롭던 고집을 꺾었듯이 이제 누나의 마음도 풀렸을지 모른다.

 

“징은 누가 칠까?

 

북소리에 간헐적으로 묻어오는 징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물었다.

 

“그 여자겠지 뭐.

 

누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난 꼭 그 자식이 두드릴 것 같아. 자식 눈이 꼭 징 같이 생겼거든.

 

“호호호…… 징 같이 생겼다는 눈은 처음 들어보는 소린데.

 

누나는 오랜만에 웃었는데 나는 왠지 가슴에 막혀있던 솜뭉치가 넘어오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누난 그 여자하고 아는 사이야?

 

나는 오줌이 마려웠지만 어금니를 깨물었다.

 

“……응.

 

누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어쩌면 누나는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의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다.

 

여자가 우리 마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도붓장수라고 불렀다. 그녀는 사흘에 한번 꼴로 우리 마을을 찾았다.

 

그녀는 포목은 물론 온갖 잡화도 함께 가지고 다녔는데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물건은 참빗과 벼룩 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참빗으로 머리에서 이를 긁어냈고 그럴즈음 누나는 찰랑한 단발머리를 가진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로부터 그녀의 존재는 점점 확고해져 갔다. 어쩌다가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 날은 공연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다음날이면 그녀는 더욱 정갈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세월 가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나타나는 날은 언제나 떠들썩했다. 읍내에 곡마단이 들어왔다는 얘기, 그들이 판 약이 염소똥이었다는 얘기, 전신전화국이 생겼다는 얘기, 공설운동장에서 체육대회가 있을 거라는 얘기, 어느 마을에 신작로가 뚫렸다는 얘기, 거기로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이 지나갈 거라는 얘기, 쌀값이 내렸다는 얘기, 올해는 극심한 가뭄이 들 거라는 얘기…….

 

그녀는 누나 또래의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손에 하나씩 쥐어주는 눈깔사탕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름날이면 정자나무 밑에서 아이들과 한나절을 보내곤 했는데 그녀가 들려주는 링컨 이야기며 에디슨 이야기, 백설공주며 신데렐라 이야기는 아이들의 정신을 홀리고도 남았다.

 

그녀는 얘기 솜씨 못지않게 이발 솜씨도 좋았다. 기계충이 산사태처럼 나 있는 머슴아들은 그녀를 꺼렸지만 누나 또래의 계집아이들은 참한 단발머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럴 즈음 아이들은 그녀에 대한 비밀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를 못 낳는 바람에 시집에서 쫓겨나 혼자 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누나가 학교에 염증을 느낀 것은 아버지에 대한 점잖지 못한 소문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누나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는데 그 도붓장수 여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소문에도 아랑곳 않고 마을을 찾았고 누나 또한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뒤, 아이들의 소문은 누나의 두 눈 앞에서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철늦은 가을비가 부슬거리는 날, 아버지는 기어코 숙직을 핑계로 집에 오지 않았다. 다음날 누나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몰래 학교를 찾았다. 빨강, 노랑, 파랑, 분필 자국들이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변소 모퉁이를 돌아 숙직실로 향하던 누나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푸석푸석 잠에서 깨어난 여자가 막 숙직실을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는 정신없이 교정을 뛰쳐나왔다. 그 다음 날도 여자는 여전히 우리 마을을 찾았다. 누나는 외톨박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누나는 아이들이 무서워졌다. 아이들의 눈이 모두 우리 집을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이들의 소문을 믿지 않았다. 누나는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소문도 하나 둘 제풀에 꺾여갔다. 그러나 아버지가 숙직을 서는 날은 점점 늘어갔고 어머니가 밤잠을 설치는 날 또한 많아졌다. 누나는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버릇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우리 마을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어느 겨울이었다. 싸락눈이 하얗게 쌓인 동구 길을 들어서고 있는 여자에게 어머니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이년! 사지를 찢어발길 년! 주리를 틀어 죽일 년! 빈대도 낯짝이 있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여자의 머리채가 어머니의 손아귀에 쥐여진 건 순식간이었다.

 

“보자보자 했더니…… 벼락 맞아 죽을 년!

 

여자의 반항은 미미했다. 여자의 손은 어머니의 신들린 손길을 하릴없이 따라붙을 뿐, 모든 것을 단념한 듯했다. 여자는 머리채를 어머니한테 맡긴 채 싸락눈 위를 개처럼 끌려 다녔다.

 

얼마 뒤 누나의 투명한 눈물 속으로 언덕배기를 내려가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파란 도붓짐을 힘없이 덜렁거리며 넋나간 사람처럼 걸어갔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은 그녀를 믿지 않았다. 링컨 이야기며 에디슨 이야기, 백설 공주 이야기며 신데렐라 이야기도 신통력을 잃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화냥년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화냥년의 물건을 모두 내다버린 건 어머니의 눈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참빗이며 옷감이며 비누며…… 심지어 머리에 꼽고 있던 핀까지 도랑물에 던져버렸다.

 

잠잠하던 소문이 다시 고개를 치켜든 것은 얼마 뒤였다. 화냥년이 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아버지의 씨라는 것이었다. 누나는 어머니를 따라 간 장터에서 소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여자는 나타났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여자는 광주리를 이고 있었다. 사과를 팔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막 시장통을 나서고 있었는데 그녀의 등에는 소문대로 갓 돌을 지났을 성싶은 머슴애가 업혀 있었다. 어머니와 여자의 눈길이 마주친건 순식간이었다. 여자가 먼저 눈길을 떨어뜨렸다. 어머니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런 뻔뻔스런 년! 여태 죽지 못했구나! 오늘 내 손으로 죽여주마!

 

여전히 여자의 반항은 미미했다. 광주리가 나뒹굴고 사과가 나뒹굴었다. 어머니의 신들린 손은 어느새 악을 쓰고 울어대는 머슴애를 향하고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헛소문은 아니었구먼!

 

어머니의 손이 머슴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안 돼요! 얘만은 안 돼요! 얘만은 안 된단 말이에요!

 

여자는 흐느끼며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때 누나는 그 여자가 몹시 불쌍하게 여겨졌는데 그것은 등에 업혀있던 머슴애의 울음소리가 유난히도 슬펐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대들었지만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누나는 사랑방에서 할머니의 옛날 얘기에 이를 악물고 귀를 모았지만 그날따라 할머니의 얘기 솜씨는 야속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 첫닭이 울 때쯤 아버지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그 여자 참 불쌍한 사람이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톨이오. 전쟁통에 외톨이가 되어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보다 빨리 시집을 갔다오. 그런데 자식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말았오. 그래 발붙일 곳 없는 그가 홀로 시작한 것이 도붓장수였다는 거요. 그런데…….

 

“그런데 당신하고 눈이 맞았다 이 말이오?

 

“변명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내 얘기, 마저 들어주구려. ……그 아이, 그 아이 말이오. 그 여자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소. 한을 푼 셈이오. 그 여잔 병신이 아니였던 게요. 하지만 이제 걱정마오. 그 여자 생각일랑 다신 안 할 테니까. 잊어버려요. 까짓것 불쌍한 여자 돕는 셈치고 잊어버려요. 허허허허…….

 

하지만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였다. 그 날 밤 어머니에게 맹세하던 그 약속은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그 여자를 잊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증명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우리 가족을 버렸다. 그리고 자신마저 불 속에서 사위어갔다.

 

“그 화냥년하고 같이 자다 집에 불이 났대.

 

“그년 참 목숨도 길지.

 

“그 머슴애도 살아남았다지?

 

누나는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여자가 세들어 있던 전셋방에 불이나자 아버지는 여자와 아이를 차례대로 구해내고 자신은 불 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에 대한 욕설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꽃상여를 떠나보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누나가 그녀를 다시 본 것은 온 산비탈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산소 옆에서 소꼴을 뜯던 누나는 웬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안개꽃 한 다발을 던져놓고 오래도록 흐느껴 울었다. 그 옆에는 유난히도 눈이 큰 머슴애가 장난감을 딸랑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벌레였다. 찌든 벌레였다.

 

“아이구, 내가 죽어야지. 죄 없는 네가 고생이구나!

 

어머니는 죽는다는 소리를 하루에 수십 번씩 하면서도 죽지를 못했다. 어머니는 아직 몇 군데 남아있는 신경으로 자신의 배설을 확인하고는 누나를 찾았다. 누나는 해체되어 가고 있는 어머니의 몸을 모로 눕히고는 무릎이 양가죽처럼 빠닥빠닥해질 때까지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걸레질을 했다. 어머니는 삶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다만 허물어진 의식을 주워 모아 버릇처럼 중얼거리는 게 있다면, 그건 하루에도 두어 번씩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누나는 밤이면 마루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는 게 버릇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보살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건 최근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고추보살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입술이 유난히도 붉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녀는 잘 익은 고추처럼 빨간 입술로 주문을 외워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한다고 했다.  읍내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했다. 그녀는 어쩌면 신神의 딸인지도 몰랐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신의 딸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을 아이들도 이제 그녀를 화냥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도붓장수라고도 하지 않았다. 링컨 이야기며 에디슨 이야기, 백설공주 이야기며, 신데렐라 이야기보다 더 신비스런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이들은 옛날 도붓장수가 아닌 신비스런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혼이 여자에게 씌었다고 했다. 내처 침묵으로 인내하고 있던 할머니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여! 누가 방정맞은 소릴 지껄여! 그 불여우 같은 년한테 내 아들의 혼이 씌다니…… 택도 없는 소리여!

 

하지만 할머니의 그 말은 거짓말인지도 몰랐다. 할머니는 곧 전지전능한 신의 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할 수 없구나. 에미를 살리는 길은 이 길밖에 없어. 고추보살을 불러야겠다!

 

할머니는 누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는데 나는 할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 그렇게 되길 빌었다.

 

북소리는 이제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려왔다. 나는 처녀 귀신이 목을 놓고 운다는 미루나무 고개를 남겨두고 몹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밉지 않니?

 

누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건 왜?

 

“……그냥…….

 

누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난 무섭지 않아?

 

“……뭐가?

 

“……뭐긴…….

 

“얘는,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니?

 

누나는 역시 내 친구로만 남아있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누나는 이제 막 피어나는 젖봉오리처럼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풀숲에서 반딧불이 긴 선을 그으며 미루나무 등걸 사이로 사라져 갔다.

 

반딧불이 무슨 불인지 아니? 한의 불이란다. 그래서 저렇게 파랗단다. 누나가 보충수업을 받던 날, 함께 걷던 저녁 길에서 누나는 말했었다.

 

누나는 별자리를 찾는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저녁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어머니 병이 나을 수 있을까?

 

조금 전 누나가 내게 물었듯이 나도 심각한 목소리로 누나에게 물었다.

 

“바보.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잖니. 그 여자가 굿을 하면 나을 거라고.

 

누나의 입김이 나의 목덜미에 뽀얗게 내려앉았다.

 

“그 아인 어떤 이름을 가졌을까?

 

눈이 꼭 징처럼 큰 아이를 떠올리며 나는 말했다.

 

“…….

 

누나는 여전히 그 아이에 대해선 재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 게임 할까?

 

“무슨?

 

“이름 맞추기.

 

“누구?

 

“그 아이 말이야.

 

“……좋아.

 

시커먼 정자나무 가지 사이로 빨간 불빛이 새어나왔다. 입술이 붉은 여자의 주술일까. 신명들린 목소리도 들려왔다. 사람들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둥둥 둥둥……. 북소리도 신명이 났다. 마을 아이들은 신의 딸을 보기 위해 우리집 마당에 벌 떼처럼 모여있을 것이었다.

 

“네가 먼저 맞춰 봐.

 

마을 어귀를 들어서면서 누나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의 이름이 불리기 전에 우린 대문을 들어설 것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눈물이 많은 누나는 그의 고운 두 뺨을 벼락같은 눈물로 적실 것이었다. 하지만 난 절대 울지 않을 것이었다. 벼락같은 눈물 대신 그 여자의 옷자락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빌고 또 빌 것이었다. 제발 우리 엄마 병만 낫게 해달라고. 

 


 

  채종인 / 196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단편소설집 『사랑의 사막』이 있고 제7회 김유정 소설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