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선거가 끝났다. 매체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어 앞으로 정국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 전에 많이 이야기되었던 것은 정치에 대한 일반 국민의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역시 국민의 주권 행사가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소 이야기되던 정치 불신이 줄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불신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는 더욱 반성해보아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나은 국민의 삶을 위해서 국회가 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데서 불신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생각은 19대 국회가 별로 이룩한 것이 없었다는 판단에 관계될 것이다. 또 정치 수행(遂行) 핵심 기구인 정당들이 그 행태나 준비에 있어서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불행의식’ 널리 퍼져

공자의 말에 “무위이치(無爲而治)”라는 게 있다. 물론 이것은, 순(舜)임금과 같은 성군(聖君)의 덕이 크고 백성이 이를 따른다면, 임금은 의례가 정하는 바에 따라 남면(南面)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정치는 절로 잘 되어 간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무위이치가 되는 것은 정치가 잘하려고 해보아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어서, 정치가 없거나 약해지는 경우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요순시대가 왔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제발전과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고용, 빈부 격차, 사회복지, 사회적 신뢰 등의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듣는 바이다. 삶의 질에 대하여 국민이 높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자주 이야기된다. 사회에 널리 불행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하게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지금의 정치체제 하에서는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화라는 그간의 과제는 전체적인 테두리를 바로 잡는다는 점에서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발전도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라 할 수 있다. 다만 경제의 경우, 거기에 작용하는 복잡한 요인들로 하여 정부의 정책만으로 바로 가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동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한 여러 방책을 내 놓은 바가 있었다. 4월 초에는 ‘네이버 열린 연단’의 강연, ‘국가의 현실, 개인의 현실’에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다시 피력하였다. 지금의 정치체제가 대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체제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이념을 내걸고 민주화 운동을 추진했던 사람들과 그 정열을 이어받은 집단의 발언이 드높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실질적 내용을 갖춘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보다 다양하고 많은 현실적인 집단과 계층의 입장이 정치체제 속에 편입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집단의 의견을 정치에 투입할 수 있는 기구가 정당이다.

 

여러 계층과 집단들, 정치로부터 소외

그런데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강한 국가권력 그리고 그에 밀착되어 있는 재벌 기업들이 전유해 왔다. 다른 중요한 계층과 집단들은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최 교수는 농민이나 노동자 계층의 조직화가 절실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정당과 관련시킬 때, 이들의 입장을 강조하는 정당은 곧 사회당 또는 사회민주당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강연에서 최 교수가 말한 것은 혼합정체였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 이외에도, 중산계급은 물론 다른 여러 결사체들의 관점이 정당과 정치에 투입될 수 있는 체제이다.

이 혼합체제론에서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이다. 최 교수는 이점에 대한 그의 생각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로부터 도출한다. 헤겔에 있어서 하나의 사회체제는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로 이루어진다. 이 세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이다. 중산계층이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는, 한편으로는, 모든 이익 관계가 그러하듯이 갈등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갈등을 초월하는 타협과 화해의 본보기가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헤겔에게 인간 개발의 과정이고 교육의 과정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필요와 그것을 위한 작업, 또 다른 사람과의 협동의 필요, 이러한 것들의 상호 연관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보편적 개념이 있어야 한다. 가령 사람의 경우, 특정인으로서의 개인은, 이러한 연관 속에서, 보편적 의미의 인간이 된다. 그리고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 생겨난다. 법이나 정의 같은 개념의 등장도 이러한 보편의식이 있어서 가능해진다. 추상 개념과 사실의 관계는 거꾸로도 작용한다. 시민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관계는 이러한 보편적 개념을 단순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확실한 내용을 가진 사실이 되게 한다. 최 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실질적인 내용을 가진 상호관계이다. 이것이 국가체제에 도입되는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최 교수의 관심사이다.

 

그런데 현실적 내용이 집단적으로 수용되는 경위를 조금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방금 말한 바와 같이 공동의 규범, 윤리, 정신 그리고 공동체적 목표가 생겨난다. 헤겔에 있어서 인간집단을 하나가 되게 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것은 윤리이다. 가족 관계의 유대로서의 윤리는 주로 감정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완전한 이성적 의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이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시민사회에서의 윤리 의식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그것은 신체적 안전이나 재산의 보호라는 현실목적에 의하여 제한된다. 이에 대하여, 인간의 자의식이나 이성적 의식이 한껏 전개된 결과가 국가이다. 개인에게도 그러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가의 절대화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헤겔의 이러한 국가 이념은 단지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어떤 지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 그리고 거기에서의 정치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이상을 표현하는 만큼, 그것은 인간 의지의 표현이고, “실질적 자유”의 실천이다. 한 표현에 따르면,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덕성은 독자적으로 사유된 목적을 (자유) 의지의 목표로 하는 것이다.” (『법철학』 257 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 또는 인간 정신이다. 위에 말한 현실적 상호관계를 중재하는 원리도 궁극적으로 여기에 기초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집단의 존재이유가 된다. 어떤 경우에나 집단이 움직이는 데에는 그것을 통괄하는 집단적 목표가 필요하다. 적(敵)의 존재나 전쟁이 국가를 하나로 하는 데에 중요한 기제가 된다는 정치이론이 있지만, 국가 방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국가 그것이 정당한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동원의 핵심적인 명분이 되는 민족의 이념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 필요를 넘어 보다 궁극적인 기초는 자유와 윤리의 근원으로서의 사유하는 보편 정신이다.

위에서 개별적 결사체들의 실질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러한 요구의 수용과 조율의 매체가 되는 것은 이러한 정신에서 나오는 이성일 것이다. 섬세한 조율은 문제에 대한 유연한 고려 능력이 있어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주체적 이성이다. 그것이 부분을 조율하면서 부분을 전체에 통합한다. 이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능력이라고도 하겠지만, 사회에 존재하는 정신적 자원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해진다. 오늘의 문제는 이러한 사회 전체,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한 의식의 바탕이 희미해진 데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적·개인적 자원은 어쩌면 무의식적인 바탕으로 존재하여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정치의 유일한 지침이 된 경제

지금의 시점에서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는 경제적 평등의 문제이다. 오늘의 불행의식이 반드시 거기에서만 연유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제가 그 기초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평등이나 복지에 대한 요구가 자주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필요와 그것을 위한 노동, 그리고 협동의 연계는 이성적 인간 이해의 기본이다. 삶의 필요의 충족에 대한 요구는 사회의 모든 계층을 위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요구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의 하나는 이러한 정당한 요구를 넘어 경제적 이점의 추구가 삶의 강박적 내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소비경쟁 또는 물질가치의 절대화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그러하지만, 국가의 목표로서도 그러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널리 불행의식을 갖게 하는 문제들이 반드시 경제적인 것만은 아닌 경우에도, 사회는 경제 그리고 그 점에서의 우위를 위한 경쟁으로부터 주의를 돌릴 여유를 갖지 못한다. 넓은 고려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문제 하나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경제 정책의 목표로서 ‘성장 없는 번영’이라는 것을 말한 경제학자가 있다. 이것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의 하나로 또 진정한 인간적 행복을 생각한다는 관점에서 내세워진 목표이지만, 정치인이나 개인이 이것을 적극적인 목적으로 삼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사회 심리이다. (물론 이것은 국제 정치의 환경에도 관계된다.) 경제적 이익 이외의 더 넓은 관점에서 삶의 문제들을 고려해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행복을 소비생활에서 찾으라는 것이 오늘의 사회적 압력이다. 여러 집단의 여러 요구들이 정치에 반영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소비생활의 요구로 환원될 가능성이 크다. 소비의 삶은 끊임없이 새로이 찾아야 하는 쾌락의 삶이다. 오늘의 인간이 원하는 것은 행복 가운데에도 가벼운 쾌락의 행복이다. (물론 그것이 막대한 지출을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행복을 넘어가는 보다 큰 요구는 삶을 무겁게 한다. 공동체의 인간적 균형에 대한 고려에 순응한다는 것은 매우 무거운 삶을 떠맡는 일이다. 민주화는 사회공동체의 전체에게 주어진 공공목적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희생을 무릅쓰는 결단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은 동참자나 방관자나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치가 공공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물론 최선의 공공 목적은 개인의 참다운 인간됨에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그러한 정치에서 의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경제는 오늘의 정치의 유일한 지침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의 차원에서 그것은 소비적 삶의 허영에 맞는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있다면, 정치는 없어도 좋다. 무위이치, 즉 정치가 없는 정치가 오늘의 사회가 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진정한 무위이치는 큰 정치를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무위이치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