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우리가 한 때 자주 거론한 책이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는 제법 친숙한 책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손자병법에서 말이야…”라면서 책의 내용을 이야기해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손무(孫武)다. 그는 중국의 군사(軍事)와 전쟁, 전략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인물이다. 중국이라는 문명의 개체가 막 기지개를 펴고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에 군사와 전쟁에 관한 사유를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중국의 전쟁을 위한 사고, 즉 병법(兵法)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강태공(姜太公)이 병법의 사유 자락인 모략(謀略)의 전통을 열어젖힌 사람이라면, 손무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여러 사고의 가닥을 한 데 모아 집성(集成)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런 업적으로 인해 그의 성씨인 손(孫) 뒤에 ‘선생님’ 쯤으로 풀 수 있는 자(子)를 붙여 손자(孫子)라고 적는다. 공구(孔丘)라는 인물이 종내는 공자(孔子)라는 존칭으로 중국 유학의 최고 성인 대접을 받는 맥락과 같다. 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거대한 업적을 쌓고, 이를 다시 후대에 길이 전한 사람에게나 붙이는 존칭이다.

 

孫子, 군령 어긴 궁녀 둘 가차없이 처형

그런 손자도 처음부터 잘 나가지는 않았다. 자신의 긴장감 넘치는 병법을 알리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던 적이 있으나 그를 받아들이는 춘추시대의 제후국은 별로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갔던 그가 오(吳)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오나라 임금은 합려(闔閭)였다.

그는 우선 합려에게 자신이 지은 병법 13편을 건넸다. 자신을 임용해 달라는 일종의 유세(遊說)였던 셈이다. 결국 합려는 손자를 만나준다. 그러나 시큰둥했다. “다 읽어보기는 했는데, 내 앞에서 실연(實演)해 볼 수 있느냐?”고 먼저 물었다. 그러면서 토를 달았다. “여인들을 데리고 해보라”는 주문이었다.

손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궁녀들을 불러 모아 두 대열로 나눴다. 이어 합려가 총애하는 궁녀 둘을 각 대열의 ‘팀장’으로 지명했다. 합려는 높은 누각에서 손자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자는 ‘우향우’ ‘좌향좌’ 등을 어떻게 하는지 먼저 일렀다.

궁녀들은 그의 지시를 순순히 들었다. 이어 실제 훈련에 들어갔다. 우향우를 알리는 북소리가 났다. 그러나 궁녀들은 “킥킥~”거리면서 웃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손자는 “충분히 일러주지 못한 점은 장수의 실책”이라며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명령의 내용을 알렸다.

다시 시작한 훈련에서도 궁녀들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좌향좌의 북소리 명령을 또 따르지 않고 웃고 말았던 것이다. 손자는 “두 번 내린 명령이 옮겨지지 않은 것은 각 대열의 지휘관 책임”이라며 ‘팀장’을 맡았던 궁녀 둘을 불러내 죽이려고 했다. 높은 누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합려는 놀라 뛰어내려 왔다.

“이제 당신의 실력을 알겠으니 내가 총애하는 두 궁녀를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손자는 이런 말을 남기고 궁녀 둘을 죽인다. “장군이 전쟁터에 있으면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을 수 있다(將在外, 君命有所不受).” 군령(軍令)의 엄격함을 단호하게 집행한 일화다.

합려는 자신이 총애하는 궁녀 둘을 죽인 가혹한 군령의 집행자 손자가 탐탁지 않았으나 결국 그를 대장으로 임명해 강력했던 초(楚)나라를 꺾고 춘추시대 강국으로 부상한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전하고 있는 손자의 이야기다.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명한 병법서 『귀곡자(鬼谷子)』를 다시 편집한 현대 중국 서적이다. 중국 서점에는 이런 병법서가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늘 올라있다.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명한 병법서 『귀곡자(鬼谷子)』를 다시 편집한 현대 중국 서적이다. 중국 서점에는 이런 병법서가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늘 올라있다.

 

황석공 병법서 얻은 ‘모략의 聖人’ 장량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과 그 참모였던 장량(張良)의 스토리는 전 회에서 잠깐 소개했다. 이 장량이라는 인물은 흔히 장자방(張子房)으로도 불린다. 그 또한 중국의 모략 세계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조국이었던 한(韓)을 없앤 진시황(秦始皇)에게 복수를 하려다 여러 곳을 전전한 적이 있다.

그는 어느 지역의 한 다리 부근에서 이상한 노인과 조우한다. 괴팍한 늙은이였다. 일부러 다리 밑으로 신발을 떨어뜨린 뒤 장량에게 “신발을 주워와”라고 명령조로 말한다.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경우다. 그러나 참을 줄 알았던 장량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다 준다.

노인은 점입가경이었다. 자신의 발에 신발을 꿰라고 다시 명령했다. 용케도 화를 참았던 장량은 그대로 했다. 그러나 노인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가다가 다시 돌아와 “5일 뒤에 여기서 보자”고 했다. 약속한 날 제 때 도착한 장량은 미리 와있던 노인에게 “나를 기다리게 만들어? 못 된 놈! 5일 뒤에 다시 와”라는 호통을 듣는다.

그러기를 다시 반복했고, 결국 세 번째로 약속한 날 아예 밤부터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량은 한결 부드러워진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자네, 참을 줄 아는 젊은이야. 이 책 받아 잘 읽어보게”라면서 책을 건네더니 표연히 사라진다. 중국인들은 때로 장량을 ‘모성(謀聖)’이라는 단어로 적는다. 모략의 성인 급 인물이라는 뜻이다.

많은 중국인들은 장량의 그런 천재적인 모략, 전략 구성의 재능이 노인에게서 받은 책으로부터 나왔다고 믿는다. 그 노인의 호칭은 황석공(黃石公), 거의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천하를 경략하는 비법(秘法)을 지녔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손자와 장량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둘을 꺼낸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짓거나, 남으로부터 얻은 병법서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한반도의 역사에 등장하는 병법서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있다고 해도 손으로 꼽을 만하고, 그마저 대개 전해지지 않는 실전(失傳) 상태다.

 

겸재 정선의 야수소서(夜授素書). 중국 진나라의 병법가 황석공이 장량에게 ‘소서(素書)’를 전수했다는 고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겸재 정선의 야수소서(夜授素書). 중국 진나라의 병법가 황석공이 장량에게 ‘소서(素書)’를 전수했다는 고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중국의 병법서적을 헤아려 본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에 전해지는 병법서적은 일부 집계에 따르면 2308부다. 이름만 있고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 병법서적은 약 1000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3000종이 넘는 병법서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낱말은 우리에게 제법 친숙하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탄생한 중국 문명 초기의 휘황찬란한 사상의 경연(競演)이 빚은 결과물이었다. 모든 꽃이 피어나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기였고, 모든 이가 나서서 재능을 뽐내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절이었다.

그런 제자백가의 원류(原流)는 어디에 있을까. 단정하기 쉽지 않은 물음이다. 그러나 병가(兵家)를 모든 사상가의 뿌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법가(法家)와 묵가(墨家), 농가(農家)와 명가(名家) 등 종류가 퍽 많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가 있다. 대부분이 전쟁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공자와 맹자(孟子)가 간판을 이루는 유가의 사상에서도 “먼저 예, 다음은 싸움(先禮後兵)”과 “하늘의 때, 땅의 이점, 사람의 조화(天時地利人和)”, 정의로운 전쟁(義戰) 등을 이야기했다. 노자(老子)는 언뜻 개인의 자유와 일탈(逸脫)만을 언급한 듯 보이지만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以柔克剛) 일, 엇갈린 모순(矛盾)의 상황을 뒤바꾸는 방식 등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그의 『도덕경(道德經)』 자체가 완연한 한 권의 병법서라는 의심을 받는다.

공격과 방어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묵가의 사상체계 또한 전쟁과 병략(兵略)을 빼놓고서는 넘어갈 수 없다. 권력과 세력, 술수(術數)의 개념을 동원해 사람을 다스리고 이용하는 방법에 관해 아주 빼어난 사색을 담고 있는 법가의 대표작 『한비자(韓非子)』 역시 사람 사이의 다툼, 더 나아가 전쟁의 흔적이 뚜렷한 작품이다.

춘추전국의 제자백가가 담고 있는 실제 풍경이 그렇다. 그들은 대개 전쟁을 언급했고, 때로는 그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 또는 그를 회피하는 방도를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병가가 제자백가의 일파이면서도 실제로는 대다수 사상가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쟁을 언급하면서 보였던 제자백가의 이 같은 조바심·우려·긴장감·불안감은 실제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적인 상황이 속출하며 걸핏하면 전쟁의 불길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참극(慘劇)이 빚어졌던 춘추전국의 역사적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노자 『도덕경』 자체가 병법서라는 의심 사

그 뒤에 등장한 중국의 역사 상황도 마찬가지다. 일어섰다 주저앉은 아주 많은 수의 국가와 권력, 중국 전역을 지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며 극심한 혼란과 전쟁을 불렀던 통일왕조, 전쟁이 빚는 참화를 피해 이동했던 수많은 사람과 그들을 적대시하며 칼과 화살을 들어야 했던 지역의 원래 주민과의 싸움…. 이런 상황은 중국 역사의 고정 출연자요, 단골 캐스팅이었다고 봐야 옳다.

그런 장구한 흐름에서 중국의 병법서는 줄곧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3000여 종의 병법서가 나온 이유를 그로써 이해할 만하다. “세계에서 전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게 중국 지식사회의 자평(自評)이다. 그런 병법은 결국 모략이자 전략이며, 책략이고 지략이며, 권모와 술수일 것이다.

급히 부상하는 중국의 속도가 현기증을 부른다. 땅이 붙은 연륙(連陸)의 한반도는 그런 중국에 어지럼증이 더 하다. 중국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하는 시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와 통계만으로 중국을 보다가는 큰 코 다친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중국의 모략과 유구한 전통을 피해가는 일이 가능할까.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
ykj335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