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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오리는 겁이 많은가.

매를 만난 유럽의 찌르레기 떼가 들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란하게 날아오르듯, 아침저녁으로 호수의 어스름 하늘을 수놓는다. 철새가 모인 호수를 기웃거리는 맹금류는 보통 낮에 활동하는데, 수십만을 헤아리는 가창오리는 장엄하면서 변화무쌍한 군무를 해 질 녘이나 해 뜰 녘에 펼친다.

수면 가득 새까맣게 점점이 앉은 무리. 가는 실처럼 녹은 한 숟가락의 설탕이 커다란 솜사탕으로 부풀 듯, 몇 마리가 물을 박차고 오르면 기다렸다는 양, 수면을 연이어 스치어 일제히 날아오르며 거대하게 덩어리지는 가창오리 떼. 아까부터 그 순간을 기다리던 탐조객은 그만 넋을 잃는다.

가없는 호수를 덮을 듯 퍼졌다 앞선 무리를 따라 물결치듯 솟아오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주저 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군무. 부서지는 파도 같은 날개 소리를 하늘에 퍼뜨리며 호수를 휘감으며 물결치다 소용돌이치며 솟아오르더니 수면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내려가다 비단치마 폭처럼 펴진다. 한줄기 짙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블랙홀에 휩쓸리던 군무는 이내 뭉게구름이 되어 너울거리다 하늘로 던진 투망처럼 흩어지고, 두 개의 강력한 자석에 끌리며 나누어지던 거대한 무리는 이내 방향을 바꾸며 느닷없이 교차하더니 다시 물결치며 치솟다 어머니 치마폭처럼 수면 위를 덮을 듯 퍼진다.

 

일사불란한 군무는 감동 그 자체
어스름하거나 여명이 밝아오는 호수의 하늘을 맘껏 수놓던 가창오리 떼는 누구의 지휘를 받는지 한 마리도 부딪히지 않는 5분여의 군무를 마치고 어둠 저편 하늘로 고요하게 사라진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경이로움에 탄식하던 탐조객은 시려오는 뺨을 그제야 두 손으로 감싸며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을 뇌리에 남긴다. 벅차오른 감동을 주체할 길 없는 탐조객은 비로소 발길 돌리는데, 문득 시장기를 느낀다. 가창오리들도 멀지 않은 농경지로 낙곡 주우러 떠났을 터.

동 트기 전, 적막해진 호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가창오리들은 저녁쯤이면 화려한 군무를 다시 펼칠 텐데, 그때까지 쌀쌀한 호숫가에 머물 수 없는 탐조객은 삼삼오오 버스에 올라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압도되었던 연속 장면을 지우지 못하는 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생태관광 안내자에게 말문을 연다. “몇 마리나 되었을까요?” 가창오리 떼가 모두 몇 마리로 이뤄져 있는지가 궁금한 건 아닐지 모른다. 군무에 참여한 가창오리 수의 크기보다 조금 전의 감동을 되새기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안내자인들 정확히 알겠는가. “한 20만 마리쯤 될까요?” 20만 마리가 겨울철 한국으로 날아온 가창오리의 전부는 아니다.

 

국내 도래 규모 해마다 들쭉날쭉
시베리아의 크고 작은 호수, 특히 바이칼호 주변에 흩어져 사는 가창오리는 혹한이 시작되기 전, 90% 이상의 개체들이 우리 서해안의 호수로 날아와 내려앉는다. 전북 고창의 동림저수지에 20만 마리가 넘게 북적이던 가창오리는 찬 바람이 며칠 일자 일제히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전남 영암 쪽으로 이동한다. 천수만과 삽교호 주변에 머물다 금강 하구 둑으로 이동하고, 주남저수지 주변에서 추위가 물러갈 즈음까지 머물다 번식지 시베리아로 돌아가던 가창오리. 천수만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군무는 특히 유명하다. 주남저수지의 수위가 오르면서 먹잇감을 찾을 수 없어진 가창오리들이 인근에 들판이 넓은 천수만 일대로 다시 몰려들기 때문이다.

갯벌을 매립해 조성한 평야가 드넓은 천수만은 이들의 서식지로 괜찮은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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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한국을 찾은 일본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댄 국내 조류학자들은 전국 14군데 월동지역에 65만8000마리의 가창오리가 도래했고 그 중 90% 이상이 금강에 내려앉았다고 보고했다. 실로 대단한 숫자다. 전 세계에 3000여 마리 밖에 남지 않은 저어새처럼 가창오리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과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수록된 희귀종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이 곳에 엄청난 수가 몰려드는 가창오리가 멸종위기라니. 한국의 대표적 겨울 진객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걸까.

한때 세계적으로 4만 마리까지 줄었던 가창오리가 2007년 1월 82만 마리가 우리나라로 날아왔다고 국립환경과학원이 밝힌 적 있다. 2006년의 3배가 넘는 수라고 말했는데, 한국을 찾는 가창오리의 수는 해마다 현기증 나게 들쭉날쭉하다. 눈 덮인 시베리아에 남아서 겨울을 견디는 건 물론 아니고 다른 나라로 날아가는 것도 아니라는데, 집단 크기의 변동이 원래 심한 것일까. 이번 겨울에도 각국의 조류학자들이 동시에 모니터링에 나서 우리나라를 찾아온 무리의 크기를 추정하고 있는데, 이동이 잦아 파악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20만 마리가 머물던 동림저수지가 얼어붙자 15만 마리가 군무도 없이 떠난 뒤 영암호에 20여만 마리가 모여들었다는데, 또 어디로 갈지. 그곳은 안전할지.

모니터링에 나선 전문가들은 저수지 주변의 논습지에 먹이가 되는 낙곡이 많지 않다고 걱정한다. 멀리 이동하며 먹이를 찾아 헤매다 보니 저수지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게 되고, 그때마다 군무는 생략할 수밖에 없을 게 아니냐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우리나라를 찾기 시작한 가창오리는 주로 갯벌을 매립해 만든 너른 평야와 그 평야 주변에 조성한 호수에 내려앉는다. 그런데 그런 평야는 화학농법에 의존하고, 주변 호수는 지속적으로 오염된다. 그래도 기계로 농사짓는 까닭에 낙곡이 많았지만 요즘은 아니다. 볏짚 사이에 유산균을 듬뿍 넣고 비닐로 둘둘 말아 축사에 사료로 넘기는 ‘곤포사일로’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4년 1월 동림저수지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했다. 발생 농장에서 반경 3㎞ 이내의 닭과 오리, 그리고 메추리와 같은 가금을 모조리 살처분하는 고역이 반복되었는데, 그 해 겨울 조류독감으로 전국에서 무려 1000만 마리의 가금이 안락사와는 거리가 먼 방법으로 도살됐다. 방역당국은 동림저수지의 가창오리를 고병원성 AI H5N8 바이러스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가창오리들은 여기에 동의했을까. 당시 서슬 퍼런 환경부는 철새 먹이주기 행사도 아예 금지시켰는데, 죽은 가창오리는 20만 마리 중에서 고작 100여 마리에 불과했다. 책임을 뒤집어쓴 가창오리가 억울하다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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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갯벌 매립이 걷잡을 수 없이 이뤄지자 한국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내려앉아 먹이를 구할 곳을 찾기가 점점 어렵게 되었다. 수천 ㎞를 쉼 없이 날아와 몸무게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허기지건만 먹이가 풍부하던 갯고랑이 통 보이질 않는다. 충분한 먹이를 먹으며 봄까지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고 시베리아의 얼음이 풀릴 즈음 건강해진 모습으로 되돌아가 새끼들을 낳아야 하지만 쉽지 않다. 어쩌다 독감에 걸려 내려앉아도 먹이가 많으면 금방 회복되었지만 이젠 먹이를 쉽사리 찾지 못한다.

잡식이지만 주로 낙곡을 찾아 먹는 가창오리의 사정도 비슷하다. 갯벌이 농토로 바뀌면서 먹이가 늘어난 덕분에 커다란 저수지를 다른 겨울 철새와 공유하며 해마다 개체 수를 늘릴 수 있었는데, 이런! 낙곡 마저 그놈의 곤포사일로 때문에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몸이 40㎝인 가창오리는 암수가 확연히 다르다. 멀리서 보아도 쉽게 구별할 정도로 얼굴이 화려한 수컷(아래 오른쪽 사진)은 갈색 눈의 앞과 뒷부분을 반달 같은 노란색 깃이 태극처럼 휘감고 그 뒤를 흰 테두리가 있는 초록색 깃으로 감싸 ‘태극오리’로 불리지만 온몸이 갈색인 암컷(아래 왼쪽 사진)은 수수하기 그지없다. 눈 아래 흰 점과 턱이 특색인 암컷은 수컷 무리와 섞이지 않는다면 다른 오리 종류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수십만 마리가 모이니 천적의 위협에서 집단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지만 군집성을 지닌 까닭에 집단이 줄어들면 생존하기 어려워지는 특징을 가진다.

 

북미 나그네비둘기 운명 될까 걱정
100억 마리에 달했던 북미의 나그네비둘기는 백인들의 광포한 사냥으로 70만 마리로 줄었다. 미 당국이 뒤늦게 보호에 나섰지만 그 크기만으론 집단이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더니 아예 멸종하고 말았다.

가창오리는 어떤가. 좁은 월동지에 너무 많은 개체가 몰려들자 국제자연보전연맹은 취약종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2012년 5월 개체 수가 많다며 멸종위기 종에서 해제했다. 게다가 AI 유포 혐의를 씌우며 먹이주기까지 엄금했다. 멀리서 스스로 찾아온 진객을 반갑게 맞기는커녕 내쫓으려 성화다.

가창오리는 정말로 AI를 퍼트렸을까.

‘동아시아-대양주 철새 이동로 협력기구(EAAFP)’는 성명을 내고 가창오리가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H5N8 같은 고병원성 AI는 비좁은 공간에서 가혹하게 사육되는 가금류에서나 흔한 질병이며 철새 무리가 가금에 전파한 사례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감염된 철새들은 매우 빠르게 죽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AI 확산은 가금이나 사람의 이동과 비교하면 미미하다”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가창오리가 원인이라면 이들이 도래하기 시작하는 12월 초 이전에 폐사했어야 옳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군집성이 강한 까닭에 가금 콜레라로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희생된 적은 있지만 AI 혐의는 생뚱맞았다.

2008년 10월, 우포늪이 있는 경남 창원에서 제10차 람사총회가 열렸다. 우리도 철새가 찾는 습지를 보전하겠다고 세계에 천명한 것이다. “동아시아-대양주 이동 철새의 주요 월동지인 한국의 환경부는 이들 철새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가창오리는 만족스러웠을까, 여태 AI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창오리가 올 겨울도 잊지 않고 찾아와 군무를 펼쳐주니 고맙고 반갑다. 염치없지만, 내년 이후에도 계속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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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

인하대 생물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 를 받았다. 성공회대·인하대 등에서 강의도 하고 있 다.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이것은 사라질 생 명의 목록이 아니다』 『탐욕의 울타리』 『동물 인문 학』 등의 저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