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3.02 06:00 | 수정 : 2016.03.02 06:01
['남해의 봄날' 정은영 대표]

2013년 여름, 경남 통영에 내려간 적이 있다. 바닷가의 작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 서울의 큰 출판사 500여 곳을 제치고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공모전 최고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해의 봄날이 제출한 출판 기획안 제목은 '가업을 잇는 청년들'. 모두가 대도시·대기업을 바라보는 시대, 다른 길을 걷는 청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해의 봄날 정은영(45) 대표를 3년 만에 다시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지역 작은 출판사의 분투가 궁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이상 고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내리막 시대의 대한민국, '자발적 낙향'을 선택한 남해의 봄날은 과연 생산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서울의 속도와 경쟁에 지친 나머지, 이들의 미래를 지나치게 낭만적 혹은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싸늘한 에세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도 있지 않은가.
우선 바닷가 생활의 '로망'이나 '판타지'로 남해의 봄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정 대표의 고백부터.
"직원들 월급 꼬박꼬박 주면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감은 무겁고, 지역 출판의 한계를 뛰어넘는 마케팅 묘수를 고민하다 보니 머리가 반백(斑白)이 되었어요."(웃음)

통영 바닷가 작은 출판사지만
지난해 다녀간 사람만 2000명
"우리 경험을 책에 담아 소통하자
어느새 '서울 깍쟁이'서 벗어나"
지역에서 조용히 살려고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책 만들기 이상으로 파는 게 중요한지 알았다면 절대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 책 눌러 담은 배낭 짊어지고 서울과 통영 왕복한 횟수가 첫해에만 20번이 넘었다고 했다. 전혁림미술관 옆 남해의 봄날과 광화문 교보문고 사이의 거리는 약 380㎞. 20회 왕복이면 대략 지구 반 바퀴 거리다. 남들은 지역 출판의 대표 주자라고 칭찬하지만, "지난해에야 처음으로 수익과 지출의 '똔똔'을 맞췄다"고 털어놓을 만큼 악전고투였다. 5분만 걸어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우아한 무대인 건 사실이지만,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수면 아래 백조의 발놀림을 떠올려 보라는 반박이다.
그렇다면 이 백조는 내리막 시대의 대안이 아닌 걸까. 정 대표는 "통영에서 출판을 통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었다"고 했다.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 '춤추는 마을 만들기'. 지금까지 남해의 봄날이 펴낸 책의 리스트이자 저성장 시대의 생존법이다. 그는 "우리가 펴낸 책들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삶의 범주 안에서 기획이 시작된다"면서 "우리 삶과 우리 책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책에 더 힘이 실리고, 독자들이 그래서 더 귀 기울여준 것 같다"고 했다.
- 과거 인터뷰
- 통영의 작은 출판사, 대형 출판사 500곳 꺾다

2014년 10월에는 게스트하우스 '봄날의 집'과 작은 서점 '봄날의 책방' 문을 열었다. 같은 골목 안 폐가(廢家)를 직접 페인트칠하며 6개월 만에 완성한 프로젝트. 건축하는 남편과 출판사 식구들이 발벗고 뛰어 가능한 일이었다. '화가의 방' '작가의 방' '장인의 방' 등 '봄날의 집'은 통영의 문화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또 책방 규모는 기껏해야 4평.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서점 축에 들겠지만, '책방지기'의 월급을 주고도 남을 만큼 책이 팔린다고 했다. 지난 한 해 다녀간 사람들만 2000명을 넘었다는 것. 그는 "처음에는 책을 계속 낼 수 있는 수익원 역할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통영의 삶과 예술, 우리의 문화적 경험을 함께 나누는 소통의 공간이 됐다"면서 "소통의 기쁨을 알게 되면서 '서울 깍쟁이'라는 지역에서의 내 별명도 스르륵 사라졌다"고 했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캐릭터 도우너를 닮은 이 '서울 깍쟁이'는 지금 통영의 책 만드는 편집자이자 책 파는 서점 주인이고, 책방 간판 페인트칠하는 아티스트이면서, 새 책 북 콘서트 공연 기획자도 겸하는 일당백의 르네상스 맨. 물론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지속가능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걱정마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도 고생은 좀 하겠지만, 통영에서 책 팔며 소통하는 일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조용한 심장도 때론 두근두근 뜀박질을 할 정도이니 쉽게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에도 이력이 붙어서 어떤 경제적 압박에도 초연해졌다는 '통영 깍쟁이'의 웃음이 3월의 통영 하늘처럼 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