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평론

첫눈에 반해버린 미대 거리… 이젠 피끓는 청춘들로 가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2. 19. 23:27

첫눈에 반해버린 미대 거리… 이젠 피끓는 청춘들로 가득

  • 노은주·임형남 가온건축 공동대표

입력 : 2016.02.18 04:00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교동 '홍대 앞'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교동 '홍대 앞'
그림=임형남
서교동 '홍대 앞'에는 다양한 기억이 존재한다. 예전에 조용했던 주택가를 기억하는 사람, 미술대학의 영향이 짙었던 자유로운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 클럽에서 밤새워 흥청거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등 각자의 기억이 칠해진 안경을 쓰고 그곳을 바라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다른 감상과 추억을 토해내는 것과 흡사하다.

서교동이라는 지명에는 다리(橋)의 서(西)쪽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다리는 지금은 없어진 잔다리라는 이름의 다리이다. 잔다리는 양화진이나 선유도로 갈 때 건너던 다리였는데 작고 폭이 좁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지도인 수선전도를 보니 '세교'는 잔다리의 한문 표기이다. '아랫잔다리'라 부르기도 했고 '서세교리'라고 부르기도 하다가 서교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마을이나 동네의 이름은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낸 것이 아니다. 대부분 오랜 시간 쌓인 동네의 연륜이 지명에 남겨진다. 그 안에는 유래가 있고 역사가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없애고 도로명으로 바꾸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원래 서교동은 한적한 대학가이면서 잘 지은 주택들이 길을 따라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동네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듯 젊음이 드글드글 끓어 넘치는 곳이 되어버렸다.

내가 서교동을 처음 간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서교동에 볼일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갔는데, 더운 여름날이라 친구가 큰 인심 쓴다며 홍익대 앞 서림제과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고등학생들이 놀던 장소는 주로 제과점이라 부르던 '빵집'이었다. 성능이 좋은 에어컨을 설치했는지 온몸을 휘감고 있던 땀들이 한순간에 몸속으로 다시 들어갈 정도로 서늘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이지만 모던하고 시원한 서교동의 첫인상은 서교동 서림제과가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학교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니 크고 멋진 집들이 마치 영화제에 도열한 잘생긴 배우들처럼 길가에 쭉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이런 동네에서 살아 봐. 멋있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길을 걷다가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듯 그 자리에서 홍익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동네를 가로지르는 철길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철길은 원래 예전에 주요 전기 공급원이었던 당인리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공급하는 열차가 다니던 길이었다. 그러다 1976년 무렵 연료와 운송 수단이 바뀌며 할 일도 없이 남겨진 철길은 어정쩡하게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홍익대 앞은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학생들의 메카였다. 화방이 여러 군데 있었고, 미술학원도 많아서 인근뿐 아니라 전국의 고등학생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그 일대가 주택 주차장이나 건물의 지하에 생겨난 미대 혹은 건축학과 학생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과제도 하는 작업실로 그득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충동적으로 선택한 홍익대에 들어갔고, 집에는 거의 안 가고 학교 앞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홍대 앞 풍경 속에서 나 또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80년대를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며 홍대 앞을 떠났는데, 내가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 새로운 진주군이 들어앉았다. 지하에 공연을 위한 클럽이 생기고 인디밴드라고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그 안에 채워졌다. 클럽에 열광하는 역동적인 젊음이 홍대 앞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색채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참하게 있던 주택들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는 클럽을 유치할 만한 크기의 빌딩들로 치환이 되었다.

주차장이나 지하를 차지하고 있던 가난한 예술가나 가난한 학생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는 흥청거림이 주된 테마인 업종으로 채워진다. 젊음이 몰려온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업종이 홍대 앞으로 몰려든다. 옷 가게, 화장품 가게, 커피숍, 노래방, 주점…. 급행열차를 탄 것처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젊은이들을 불러 모았던 클럽들은 오히려 그런 시설에 밀려 문을 닫고, 동네에는 예술과 문화 대신 소비와 유흥이 범벅된 채 밤새 불빛이 반짝거린다.

그 동네를 관장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많은 유동 인구의 유입을 굉장한 호재로 받아들인다. 여러 번에 걸친 연구 용역을 시행하고, 그 결과로 지구 단위 계획과 다양한 설치물이 가득한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낸다. 모름지기 걷고 싶은 거리란 천천히 사색을 하며 걸을 수 있도록 쾌적해야 하겠지만, 반대로 소음과 굉음이 버무려지고 요란한 간판과 전단이 뒤엉켜 있는 걷기 불편한 거리가 된다.

그러나 그 또한 홍대 앞의 또 다른 풍경이 되었다. 금요일 저녁에 홍대 앞 지하철역이나 그 근처로 가보면 발을 디딜 틈이 없이 모여든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는 마치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처럼 몸이 끼인 채로 휩쓸려 다니게 된다. 전기를 만들기 위해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길 위로 피 끓는 젊음이 가득 실린 채 어디론가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