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마을 소식들

스물 다섯살 차 詩人부부…"우린 새벽의 나무 둘처럼 행복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23. 12:06

스물 다섯살 차 詩人부부…"우린 새벽의 나무 둘처럼 행복하다"

입력 : 2016.01.23 08:07

[결혼식 대신 책 펴낸 장석주·박연준 부부]
 

연애가 꽃다발이라면 결혼은 잡초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조금 낯설 수도 있다.

남편은 언젠가 아내에게 이메일로 이런 말을 건넸다. "네 이름을 발음하는 내 입술에 몇 개의 별이 얼음처럼 부서진다." 아내는 화답했다. "내 사랑에 대한 첫 독서는 당신이라는 책이었다." 두 사람은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행복하다"고.

남편은 1955년생인 시인 장석주. 아내는 1980년생인 시인 박연준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스물 다섯. 십 년을 연애했고, 작년 초 혼인 신고를 했다. 문단 내에서도 이들의 결혼과 연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신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책을 한 권 펴냈다. 한 달 동안 호주 시드니에서 머물렀던 이야기를 담아낸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다. 책으로 결혼식을 갈음한 셈이다. 책이 출간된 12월 24일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 됐다. 부부를 이달 초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저기 보고 자연스럽게 웃어. 응, 다리는 그렇게 엇갈려도 좋겠다." 장석주는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하는 박연준에게 일일이 동작을 코치해주고 옷매무새까지 만져줬다. 박연준은 결국 "웃겨서 사진을 못 찍겠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박연준의 저 웃음을 장석주가 빚어낸 셈이다. /이태경 기자

스승과 제자에서 詩로 묶인 두 男女
스승이 남자로 보이며 감정이 싹 터
10년간의 연애 끝에 혼인신고 결심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온 10년

두 사람은 처음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장석주가 동덕여대에서 '현대소설의 이해'나 '소설창작론'을 강의할 때 박연준은 이 수업을 듣는 문예창작과 학생이었다. 장 시인은 "박연준은 소설을 정말 잘 쓰는 학생이었다. '소설 한 번 써보라'고 권할 정도였다"고 했다.

졸업 후 박연준은 홀로 시인 등단 준비를 한다. 2004년 '얼음을 주세요'라는 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고 그 무렵 장석주와 우연히 재회했다. 장석주는 "박연준의 시를 그때 처음 읽었다. 시가 좋아서 놀랐고, 시를 보고 나니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성(異性)으로 바라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했다. 박연준은 "어떤 모임에 나갔는데 그가 있었다. 그날 장석주 시인이 남자로 보여서 당황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감정이 싹텄지만 남자는 겁이 많았다. 장석주는 "이 관계에서 난 영원한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만나자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는 말을 여러 번 했고, 2~3년 정도 헤어져 지낸 적도 있다. "박연준 시인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제가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장석주 시인. /조선일보 DB

 

 

용감하게 관계를 견인해온 건 여자였다. 박연준은 "내가 오히려 바보 이반처럼 용감했다"고 했다. "좋은 걸 어떡하나 싶었죠. 연애기간 동안 장석주 시인이 저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괜한 소문의 주인공이 될까봐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지냈으니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거부할 순 없었죠. 하필 이 사람을 만나 속절없이 반했으니까요.(웃음)" 장석주는 "헤어져 있는 몇 년 동안 특히 박연준 시인이 힘들어 했는데, 그때 쓴 글을 보면 무척 어둡고 아프다"고 했다.

실제로 박연준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과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산문집 '소란' 등을 읽어보면 그가 지난 10년 동안 연애하면서 느꼈던 좌절과 슬픔이 곳곳에 흥건하다. '가끔 당신 생각이 들려 귀를 잊으려 했지요('소란' 中)'라거나, '삼키다 도로 뱉어놓은, 당신의 이름은 흰 공간 속에서 떨다 죽는다(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中)' 같은 대목이 그렇다. 박연준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사랑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는 안 해본 사람은 잘 모를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10년 동안 밀도 있는 연애를 지속했다"고 했다.

2015년 초 박연준은 결단을 내린다.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장석주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것. 박연준은 "사실 결혼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계속 지내려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상대가 아파서 병원을 같이 가도 보호자 사인조차 해줄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싫었어요. 여기는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니까, 한국에서 이 사랑을 계속하려면 결국 법적으로 서로를 묶어놓을 필요는 있겠다 싶었죠."

홀어머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좋다"라고 대답했다. 박연준은 "주위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우리를 힐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복해줬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것과 싸워왔구나' 싶을 정도였다. 세상이 그새 참 많이 달라진 걸 느꼈다"고 했다. 인터뷰가 있던 이날 박연준은 고모에게도 처음으로 장석주와의 결혼을 전화로 알렸다고 했다. 고모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장석주 시인인데, 이게 웬 기쁜 소식이니! 축하한다. 그리고 고맙다, 연준아."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전문 중 한 구절. 장석주가 쓴 것이다.

 

시드니에서 따로 또 함께 걷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대신해 펴낸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사실 무척 바쁘게 찍어낸 책이다. 난다출판사 편집자인 김민정 시인이 "시드니 여행기를 각자 글로 쓰면 그걸 내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주겠다. 그게 두 사람을 위한 내 결혼선물이고, 그 책이 나오는 날은 결혼기념일로 삼자"고 제안하면서 시작했다.

작년 9월 시드니로 떠나서 한 달을 머물렀고 10월에 돌아오자마자 11월까지 각자 글을 썼다. 12월 24일 발행일에 맞추기 위해 밤새 교정을 보고 서둘러 편집하고 또 인쇄를 했다. 장석주는 "서로의 글을 읽어볼 시간조차 없었다. 책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글을 읽어볼 수 있었다"면서 웃었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두 사람이지만, 각자가 쓴 글은 놀랄 만큼 다르다. 박연준 글이 시드니의 바람과 이슬비, 스쳐 지나가는 연인의 긴 입맞춤을 바라보는 경탄(驚歎)을 녹여낸 온탕(溫湯)이라면, 장석주 글은 시드니 구석구석을 걸으며 매일 문장노동자처럼 글 쓰는 남자의 하루를 담아낸 냉탕(冷湯)에 가깝다. 박연준은 "그래서 제 글은 붉은 색으로, 남편의 글은 푸른 색으로 인쇄됐다"고 했다.

장석주는 "한 달이라는 시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의 관계가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고 했다. "올해는 그래서 오키나와로 또 떠나볼까 해요. 어차피 결혼이라는 건 결국 서로가 같은 방향을 보면서 걷는 게 아닐까요. 한쪽 발은 한데 묶고 다른 한쪽 발은 놔두는 2인3각의 형태로요."

책으로 결혼 알린 장석주,박연준 부부 시인. /이태경 기자

다른 세대를 거쳐 생겨난 작은 틈을
서로 간의 존중과 배려로 메워

 

오늘 당신이 제일 좋다

결혼은 그래도 현실이고 생활이다. 부부로 산 지 1년, 살다 보면 '이 사람이 이랬었나' 싶을 때가 그래도 있을 것 아니냐고 물었다. 처음엔 "우리는 늘 한결같다"고 대답하던 두 사람도 여러 번 채근하자 답을 내놨다. 장석주는 "박연준이 어떤 상황에 몹시 놀라면 정말 물리적으로 1~2분 정도는 앞을 못 볼 때가 있더라. 처음엔 그걸 보고 무척 놀랐다. 또 요즘 세대라서인지 한자를 뜻밖에 잘 모르더라. 서정주 전집 같은 걸 읽을 땐 내가 옆에서 한자 음을 일일이 달아준 적도 있다"고 했다. 박연준은 "남편은 음식 남기는 걸 몹시 아까워한다. 그걸 볼 때면 그와 내가 확실히 다른 시대를 거치며 자랐구나 싶다"고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오늘 당신이 제일 좋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장석주는 매일 새벽 3~4시에 깨어 동틀녘에 글을 쓰고 대신 일찍 잔다. 박연준은 반면 아침 9시쯤 눈 뜨고 글은 보통 새벽 1~2시까지 쓰는 편이다. 생활 리듬도 취향도 사실 꽤 다르다. 박연준은 "그렇게 달라서 오히려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연애할 때 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 슬펐다면 결혼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비로소 같은 방향을 보고 꿈을 꿀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장석주·박연준 부부가 펴낸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소개하는 영상. /온북TV 유튜브 채널

 

 

장석주에게 '박연준은 당신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석주는 "아직 펼쳐보지 않은 책"이라고 대답했다. "아직도 닿지 않은 박연준의 심연이 있다고 믿어요. 그걸 향해 가는 게 우리의 결혼이겠죠." 그는 "사실 매일 밤 잠든 박연준의 겨드랑이를 한 번씩 더듬어 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날개가 대체 어디 있나, 싶어서요. (웃음)"

박연준은 이렇게 대답했다. "온전히 사용하고 싶은 얼굴"이라고. "이 사람의 모든 걸 꼼꼼하게 사랑하고 싶어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 육체와 영혼뿐 아니라, 비겁함과 비루함, 어두운 미래와 헝클어진 과거까지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아무래도 이들을 10년 뒤 다시 만나 한 번 더 인터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