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의 첫 한·일 공동연극 ‘강 건너 저편에’를 할 때였다. 당시 교과서 문제로 분위기가 안 좋았다. 그런데 팔순 가까운 백성희 선생이 연습하는 두 달 내내 일본인들을 감동시켰다. 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일본 배우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무대 밖 인품과 무대 위에서의 열정, 연습에 임하는 자세를 본 일본 제작진이 ‘저런 배우가 다 있나’ 하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잠시 편찮으신 적이 있었는데 일본 제작진이 어찌나 극진히 모시던지…. 평론가들도 극찬한 덕분에 ‘아사히 연극상’을 받았는데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소중한 예술적 자산이라고 느꼈다. 백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연극계의 자존심이자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상징하는 존재였다.”(안호상 국립극장장)
한국 연극계의 큰 별이 졌다. 원로 연극인 백성희(본명 이어순이)씨가 8일 오후 11시18분쯤 서울 한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7세 때 연습생으로 들어간 빅터무용연구소를 졸업한 뒤 빅터가극단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으로 입단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한 뒤 올해까지 73년간 무대를 지켰다. 56년에는 영화 ‘유전의 애수’에 배우 최무룡(99년 작고)과 함께 출연했지만 ‘봄날은 간다’(2001년) 외에 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고인은 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해방 후 연출가 이해랑의 극단 신협에서 활동하다 50년 신협이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되면서 국립극단 창단 배우가 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현존한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원로 단원이었다. 72년 국립극단 사상 최초로 시행된 단장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 단장으로 선출됐고,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91년 다시 한번 국립극단 단장에 추대됐다.
2010년에는 동료 배우이던 장민호(2012년 작고)와 함께 국내 최초로 배우의 이름을 딴 극장인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주인공이 됐다. 국립극단은 이듬해 3월 이 극장의 개관작으로 두 배우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담은 창작극 ‘3월의 눈’(작 배삼식·연출 손진책)을 무대에 올렸다.
생전에 고인은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걸 신조로 삼았다. 평생 400여 편의 무대에 올랐다.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등이 대표작이다. 몇 년 전까지도 ‘3월의 눈’(2013), ‘바냐 아저씨’(2013)에 출연하며 무대 열정을 불살랐다. 그의 연기는 “정석이었고 기본에 충실했다”는 평을 들었다. 후배들에게는 “평범하거나 상투적인 캐릭터 분석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곤 했다고 한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동아연극상(1965), 대통령표창(1980), 보관문화훈장(1983),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4), 이해랑연극상(1996), 대한민국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10) 등을 받았다.
지난달 고인의 삶을 조명하는 『백성희의 삶과 연극, 연극의 정석』이 출간됐다. 원로 연극인 백성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립극단이 마련한 심포지엄 ‘국립극단 65년과 백성희’가 지난달 말 열리기도 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체계적 연기 훈련 방법이 없을 때 모든 걸 스스로 터득하신 의지의 연기자”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김 감독은 “지난해 9월 낙상 후에는 줄곧 병원에 계셨지만 그전까지도 ‘3월의 눈’을 다시 한번 하고 싶다고 하셔서 그러자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2004년 ‘백성희 연극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자전적 연극 ‘길’에 함께 출연한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인 배우 김소희씨는 “연극배우의 격을 높인 분”이라며 “항상 맑고 정갈한 모습으로 격조를 지키는 모습이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 아들 나결웅, 딸 나미자씨가 있다. 장례는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30분, 영결식은 오전 10시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열린다.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노제도 진행된다. 장지는 분당메모리얼파크다. 02-3010-2232.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