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돌담은 만리장성보다 길다
오마이뉴스 입력 2014.04.06 14:21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화산활동으로 땅 대부분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 땅도 돌도 모두 검다. 마치 벌레 먹은 듯 구멍이 숭숭 나있다. 바람은 왜 그리 많은지, 남쪽에서 불어오는 마파람, 서풍인 하늬바람, 모슬포에서 와흘로 부는 서깔바람, 함덕에서 부는 높새바람, 바람도 많고 부르는 이름도 많다. 돌담, 벌레 먹은 검은 돌과 바람이 함께 빚은 독특한 풍경이다.
▲ 검은 돌, 현무암벌레 먹은 듯 구멍이 숭숭 나있다(애월리 밭담)
ⓒ 김정봉
지슬(감자의 제주말) 같은 제주 땅에는 한라산과 360여 개의 오름이 봉긋봉긋 솟아있다. 오름은 큰 땅을 나누고 돌담은 작은 땅을 나눈다. 검은 돌들이 오름 사이 사이로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쉬엄쉬엄 이어가 땅을 나누었다.
▲ 돌담오름은 큰 땅을, 돌담은 작은 땅을 나눈다(구좌읍 하도리 밭담)
ⓒ 김정봉
돌담은 제주 전체를 휘감아 10만 리가 되었다. 누가 제주 돌담을 흑룡만리라 했나? 제주대 고성보 교수 연구에 따르면 밭담은 5만5천리, 돌담 총길이는 대략 10만리라 했다. 킬로미터로 36000km, 거의 지구 한 바퀴 길이다. 5만리, 만리장성보다 길다.
▲ 돌담돌담은 쉬엄쉬엄 이어가 제주 땅을 휘감고 있다(애월리 밭담)
ⓒ 김정봉
돌담은 언제부터 쌓았을까? 문헌상으로 800년 전 고려 때 밭담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기록을 앞서는 법이다. 사람이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돌담을 쌓지 않았나 싶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인들이 제주에 터를 잡은 건 기원전 8000년 전. 토기와 성형석기까지 사용한 그들이다. 밭을 일굴 때 나온 막돌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게다. 제주 땅에 첫발을 내디딘 한참 뒤에 쌓기 시작했다 가정해도 돌담의 역사는 수백 년 전이 아닌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주의 땅은 척박하다. 제주의 바람은 척박한 땅을 더욱 척박하게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땅속에 박힌 돌을 골라 땅을 고르고 그 돌로 담을 쌓아 바람을 막는 일밖에 없었다. 제주 돌담은 인류 최대 최고(最大最古)의 인공구조물 중 하나인 셈이다. 커다란 땅에 만들어진 '대지예술'이요, 거친 노동에 의해 완성된 '노동예술'이다.
제주 돌담은 아름다운가? 모두다 아름답다고 한다. 이를 '돌담의 미', '돌담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한다. 미학적으로 제주 돌담을 얘기하려면 좀 더 복잡해진다. 거기에는 미 이전의 미, 제주민의 타고난 본성이 담겨있으며 그냥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밭담은 바람의 길, 밭길은 사람의 길
▲ 돌담돌담에는 미 이전의 미, 이웃과 공생하려는 제주민들의 타고난 심성이 담겨있다(구좌읍 하도리)
ⓒ 김정봉
돌담에는 단순히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떠나 돌담을 쌓은 사람들의 내적인 마음, 철학적인 문제가 담겨있다. 이는 자연을 훼손하고 사물화(私物化)의 심리가 발동하여 내 것만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 이웃과 공생하려는 마음의 문제이자 도덕의 문제이며, 한발 더 나아가 선(善)의 문제와 연결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땅속에 박힌 돌을 골라내 담을 쌓고 아버지가 그 담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대대손손 이어져온 게 밭담이다. 밭담은 어느 한시기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밭담은 세대를 잇고 밭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
밭담은 되게 쌓지 않는다. 숭숭 새가 떠있다. 금세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바람을 막아주는 담이 아니라 바람을 맞이하는 담이다. 밭길이 사람의 길이라면 구멍은 바람의 길이다. 바람이 이 구멍을 통과하면 바람은 순해진다. 수백 년을 지켜온 삶의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다.
땅이 휘어지면 밭담도 휘어지고 땅이 곧으면 밭담도 곧다. 함부로 땅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냥 생긴 대로 쌓아간다. 땅이 시키는 대로 곡선이 되기도 하고 직선이 되기도 한다.
바람이 많은 곳엔 높은 담을, 바람이 좀 덜하여 그래도 살만한 한 곳엔 낮은 밭담을 쌓았다. 된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애월밭담과 높새바람을 견뎌야 하는 구좌밭담은 옷을 여러 겹 입듯 담도 여려 겹쌓아야 했다. 마파람 맞는 대정밭은 비교적 낮은 담을 쌓아 한결 가벼워 보인다.
울담이 이어져 마을길이 되고
▲ 대정밭담마파람 부는 대정은 밭담도 낮다
ⓒ 김정봉
세계가 놀랐다. 얼마 전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밭담을 세계 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했다고 발표했다. 세계가 제주 돌담의 미학·인문·사회·경제적 가치를 주목하고 인정한 것이다.
사람이 살만한 곳에 집들이 모여 마을이 생기고 마을 집들은 바람이 들세라 웅크린 채 옹기종기 뭉쳐있다. 울담과 울담이 이어져 마을길이 된다. 혼자서는 모진 바람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삶의 지혜에서 온 것이다.
돌담을 부르는 이름도 가지가지여서 초가외벽에 쌓는 돌담을 축담, 집을 둘러싸는 돌담을 울담, 큰 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양쪽의 돌담을 올레담, 집에 붙어있는 텃밭에 쌓는 돌담을 우영담, 돼지우리 돌담을 통싯담이라 부른다.
죽은 자를 위한 담, 산담
▲ 애월 하가리 올레담큰길에서 이어지는 올레담길이다. 초가아래 돌담은 밑은 작은 돌로 쌓고 위는 큰 돌을 쌓은 잡굽담이다
ⓒ 김정봉
또 쌓는 방법에 따라 한줄 담은 외담, 두 줄 담은 접담, 밑은 작은 돌로, 위쪽은 큰 돌로 쌓는 담은 잡굽담, 또 넓게 쌓는 담을 잣벡담이라 한다. 돌문화가 발달한 독특한 제주 돌담 이름들이다. 외국어마냥 어려우면서 흥미롭다.
밭담과 축담은 산자의 생활공간을, 산담은 죽은 자의 공간을 나눈다. 무덤을 밭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밭은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수시로 신과 교감하고 신앙과 일상이 밀접한 제주사람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수도 있다. 그들은 밭일하며 무덤을 돌보고 산담 곁에 앉아 쉬며 자손의 안녕을 빈다. 소·말을 키우고 밭일, 뱃일하며 모진 세월을 살다간 사람에게 죽어서라도 대접해야한다는 그들의 지극정성이 담겨있다.
▲ 산담밭과 무덤은 산담으로 구분한다. 신과 수시로 교감하는 제주인에게 삶의 터전인 밭에 무덤을 두는 것은 자연스러울 지 모른다
ⓒ 김정봉
목장담도 돌담이다. 잣담(잣성)이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잣담으로 조선 초기 중산간에 국영목마장을 설치하면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쌓은 상잣, 중잣, 하잣성이 있다. 예전의 하잣은 훼손이 심해서 찾아보기 어렵고 중잣성은 아직도 남아있다. 중산간 삼나무나 소나무 숲속에 듬성듬성 쌓여 있는 중잣성을 보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 잣담조랑말박물관 목장에 있는 잣담, 근래 쌓은 잣담이나 예전 잣담 쌓는 방법으로 쌓아 볼만한 것이다
ⓒ 김정봉
돌의 쓰임새는 가지가지,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제주섬 해안 곳곳에 돌담을 쌓아 섬을 지켰다. 환해장성이다. 중궁의 만리장성에 빗대어 얘기하곤 하는데 길이는 300여리, 제주의 반을 돌로 쌓은 셈이다. 일하면서는 밭담을 쌓았고 싸우면서는 장성을 쌓았으니 모질고 고된 삶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곳은 10리 남짓 된다. 성을 쌓으면서 쓰러져 갔던 6000명 장정들의 몸처럼 장성도 하나씩 스러졌다.
▲ 애월 환해장성고된 삶이었다. 일하면서 밭담을 쌓고 싸우면서 장성을 쌓았으니 말이다
ⓒ 김정봉
돌담은 바다까지 이어진다. 고기 잡는데도 돌을 이용했다. 얕은 바닷가 주변에 바다를 돌로 막는 갯담을 쌓았다. 땅 쪽을 높게 쌓고 바다 쪽을 얕고 비스듬하게 쌓아 밀물 때 들어왔다가 썰물 때 제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고기를 잡았다. 돌담이 거대한 그물인 셈이다.
▲ 애월 갯담돌담은 바다까지 이어진다. 갯담을 쌓아 고기를 잡았다
ⓒ 김정봉
돌담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세대와 세대를 잇고 나와 남, 이웃과 이웃을 잇고 제주북쪽사람과 남쪽사람을 잇는 생명줄과 같은 존재다. 돌담은 한 시기에 한세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 이면에 역사와 문화가 배어있는 것이다. 핏줄처럼 제주 곳곳에 뻗어있는 돌담을 훼손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생명줄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잘 보호하고 관리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화산활동으로 땅 대부분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 땅도 돌도 모두 검다. 마치 벌레 먹은 듯 구멍이 숭숭 나있다. 바람은 왜 그리 많은지, 남쪽에서 불어오는 마파람, 서풍인 하늬바람, 모슬포에서 와흘로 부는 서깔바람, 함덕에서 부는 높새바람, 바람도 많고 부르는 이름도 많다. 돌담, 벌레 먹은 검은 돌과 바람이 함께 빚은 독특한 풍경이다.
ⓒ 김정봉
지슬(감자의 제주말) 같은 제주 땅에는 한라산과 360여 개의 오름이 봉긋봉긋 솟아있다. 오름은 큰 땅을 나누고 돌담은 작은 땅을 나눈다. 검은 돌들이 오름 사이 사이로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쉬엄쉬엄 이어가 땅을 나누었다.
ⓒ 김정봉
돌담은 제주 전체를 휘감아 10만 리가 되었다. 누가 제주 돌담을 흑룡만리라 했나? 제주대 고성보 교수 연구에 따르면 밭담은 5만5천리, 돌담 총길이는 대략 10만리라 했다. 킬로미터로 36000km, 거의 지구 한 바퀴 길이다. 5만리, 만리장성보다 길다.
ⓒ 김정봉
돌담은 언제부터 쌓았을까? 문헌상으로 800년 전 고려 때 밭담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기록을 앞서는 법이다. 사람이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돌담을 쌓지 않았나 싶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인들이 제주에 터를 잡은 건 기원전 8000년 전. 토기와 성형석기까지 사용한 그들이다. 밭을 일굴 때 나온 막돌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게다. 제주 땅에 첫발을 내디딘 한참 뒤에 쌓기 시작했다 가정해도 돌담의 역사는 수백 년 전이 아닌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주의 땅은 척박하다. 제주의 바람은 척박한 땅을 더욱 척박하게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땅속에 박힌 돌을 골라 땅을 고르고 그 돌로 담을 쌓아 바람을 막는 일밖에 없었다. 제주 돌담은 인류 최대 최고(最大最古)의 인공구조물 중 하나인 셈이다. 커다란 땅에 만들어진 '대지예술'이요, 거친 노동에 의해 완성된 '노동예술'이다.
제주 돌담은 아름다운가? 모두다 아름답다고 한다. 이를 '돌담의 미', '돌담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한다. 미학적으로 제주 돌담을 얘기하려면 좀 더 복잡해진다. 거기에는 미 이전의 미, 제주민의 타고난 본성이 담겨있으며 그냥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밭담은 바람의 길, 밭길은 사람의 길
ⓒ 김정봉
돌담에는 단순히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떠나 돌담을 쌓은 사람들의 내적인 마음, 철학적인 문제가 담겨있다. 이는 자연을 훼손하고 사물화(私物化)의 심리가 발동하여 내 것만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 이웃과 공생하려는 마음의 문제이자 도덕의 문제이며, 한발 더 나아가 선(善)의 문제와 연결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땅속에 박힌 돌을 골라내 담을 쌓고 아버지가 그 담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대대손손 이어져온 게 밭담이다. 밭담은 어느 한시기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밭담은 세대를 잇고 밭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
밭담은 되게 쌓지 않는다. 숭숭 새가 떠있다. 금세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바람을 막아주는 담이 아니라 바람을 맞이하는 담이다. 밭길이 사람의 길이라면 구멍은 바람의 길이다. 바람이 이 구멍을 통과하면 바람은 순해진다. 수백 년을 지켜온 삶의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다.
땅이 휘어지면 밭담도 휘어지고 땅이 곧으면 밭담도 곧다. 함부로 땅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냥 생긴 대로 쌓아간다. 땅이 시키는 대로 곡선이 되기도 하고 직선이 되기도 한다.
바람이 많은 곳엔 높은 담을, 바람이 좀 덜하여 그래도 살만한 한 곳엔 낮은 밭담을 쌓았다. 된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애월밭담과 높새바람을 견뎌야 하는 구좌밭담은 옷을 여러 겹 입듯 담도 여려 겹쌓아야 했다. 마파람 맞는 대정밭은 비교적 낮은 담을 쌓아 한결 가벼워 보인다.
울담이 이어져 마을길이 되고
ⓒ 김정봉
세계가 놀랐다. 얼마 전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밭담을 세계 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했다고 발표했다. 세계가 제주 돌담의 미학·인문·사회·경제적 가치를 주목하고 인정한 것이다.
사람이 살만한 곳에 집들이 모여 마을이 생기고 마을 집들은 바람이 들세라 웅크린 채 옹기종기 뭉쳐있다. 울담과 울담이 이어져 마을길이 된다. 혼자서는 모진 바람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삶의 지혜에서 온 것이다.
돌담을 부르는 이름도 가지가지여서 초가외벽에 쌓는 돌담을 축담, 집을 둘러싸는 돌담을 울담, 큰 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양쪽의 돌담을 올레담, 집에 붙어있는 텃밭에 쌓는 돌담을 우영담, 돼지우리 돌담을 통싯담이라 부른다.
죽은 자를 위한 담, 산담
ⓒ 김정봉
또 쌓는 방법에 따라 한줄 담은 외담, 두 줄 담은 접담, 밑은 작은 돌로, 위쪽은 큰 돌로 쌓는 담은 잡굽담, 또 넓게 쌓는 담을 잣벡담이라 한다. 돌문화가 발달한 독특한 제주 돌담 이름들이다. 외국어마냥 어려우면서 흥미롭다.
밭담과 축담은 산자의 생활공간을, 산담은 죽은 자의 공간을 나눈다. 무덤을 밭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밭은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수시로 신과 교감하고 신앙과 일상이 밀접한 제주사람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수도 있다. 그들은 밭일하며 무덤을 돌보고 산담 곁에 앉아 쉬며 자손의 안녕을 빈다. 소·말을 키우고 밭일, 뱃일하며 모진 세월을 살다간 사람에게 죽어서라도 대접해야한다는 그들의 지극정성이 담겨있다.
ⓒ 김정봉
목장담도 돌담이다. 잣담(잣성)이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잣담으로 조선 초기 중산간에 국영목마장을 설치하면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쌓은 상잣, 중잣, 하잣성이 있다. 예전의 하잣은 훼손이 심해서 찾아보기 어렵고 중잣성은 아직도 남아있다. 중산간 삼나무나 소나무 숲속에 듬성듬성 쌓여 있는 중잣성을 보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 김정봉
돌의 쓰임새는 가지가지,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제주섬 해안 곳곳에 돌담을 쌓아 섬을 지켰다. 환해장성이다. 중궁의 만리장성에 빗대어 얘기하곤 하는데 길이는 300여리, 제주의 반을 돌로 쌓은 셈이다. 일하면서는 밭담을 쌓았고 싸우면서는 장성을 쌓았으니 모질고 고된 삶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곳은 10리 남짓 된다. 성을 쌓으면서 쓰러져 갔던 6000명 장정들의 몸처럼 장성도 하나씩 스러졌다.
ⓒ 김정봉
돌담은 바다까지 이어진다. 고기 잡는데도 돌을 이용했다. 얕은 바닷가 주변에 바다를 돌로 막는 갯담을 쌓았다. 땅 쪽을 높게 쌓고 바다 쪽을 얕고 비스듬하게 쌓아 밀물 때 들어왔다가 썰물 때 제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고기를 잡았다. 돌담이 거대한 그물인 셈이다.
ⓒ 김정봉
돌담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세대와 세대를 잇고 나와 남, 이웃과 이웃을 잇고 제주북쪽사람과 남쪽사람을 잇는 생명줄과 같은 존재다. 돌담은 한 시기에 한세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 이면에 역사와 문화가 배어있는 것이다. 핏줄처럼 제주 곳곳에 뻗어있는 돌담을 훼손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생명줄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잘 보호하고 관리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