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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외연 外延을 찾아가는 탐색의 기록/ 김상숙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6. 26. 21:25

 

생명의 외연 外延을 찾아가는 탐색의 기록

나호열

 

1.

 

뭉크 Edvard Munch는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그러나 해결이 불가능하고 어쩌면 외면하고 싶어 하는 문제를 그림으로 드러냈다. 어려서부터 겪어야만 했던 친족의 죽음은 그의 그림을 통하여 실존의 고독과 고통스런 공포를 안고 살아야하는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짐짓 의식의 심연에 눌러 놓았던 죽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쾌한 전율을 각성한다. 그러나 이 각성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지루하게 무한 복제 되는 일상의 권태로 말미암아 빚어진 삶의 소중함이 이 죽음의 각성으로 환기되고 충전된다는 점에서, 비록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나 초월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소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무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죽음을 체험 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존재는 죽음을 증언할 수 없는 당위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른 통로로 죽음에 대한 증언을 인간계가 아닌 초월계의 영역의 문제로 돌려놓는다면 초월계를 주재하는 신神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삶이라고 전언하므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킨다. 사물의 본질이나 현상을 일관된 원리로 확정하려는 과학이나 철저한 연역演繹의 사고로 의식 자체를 규명하는 철학, 오로지 초월의 영역을 강조하는 종교는 다 같이 우리에게 결단과 결연한 의지의 표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동일하게 응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적 지식을 갖지 않아도, 충분한 사유방식에 익숙해지지 않아도, 더군다나 눈앞에 주어진 현상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위와 같은 처방은 유력한 대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결연한 의지의 결단이 없어도 끈질기게 의식에 달라붙는 정서적 반응, 즉 우리의 오욕칠정은 제어할 수도 추방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남아 있는 통로는 예술 행위일 뿐이다. 어쩌면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매몰되어버릴지도 모를 정서적 반응을 예술은 억제하고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히 드러냄으로서 창작자 자신은 물론 그 모든 작품을 향유하는 대중들에게 물음과 각성을 던진다. 프로이드에게는 과도한 콤플렉스의 반응으로 보일지도 모를 작가의 물음과 각성은 문제의 경중을 떠나서 숙명적인 것이 아닐까? 뭉크가 그랬던 것처럼 해답을 구하고자 하나 정답이 없는 실존을 지옥의 문 앞에 쭈그려 앉은 ‘생각하는 사람’처럼 불편하게 모색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섣부른 달관이나 상상의 날개를 믿은 무모한 페가수스의 유혹을 견디는 자. 자신만의 화두를 걸머지고 이정표 없는 길을 홀로 걷는 자. 여기 ‘죽음’이라는 화두를 놓고 결코 목으로 넘어가지 못할 질긴 고기를 저작하는 그런 시인이 있다.

 

2.

 

시력 詩歷에 비해 과작인 김상숙의 시세계는 활달한 상상력이나 재치 있는 필치 筆致보다는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얼개와 꼼꼼한 비유를 통하여 끈질긴 화두 하나를 붙잡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 화두는 단언컨대 ‘죽음’이다. 김상숙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앞서 언급했던 논의를 상기해 보자. 죽음은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을 박탈하는 현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죽음은 생명의 한계이며 그 한계는 존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누구도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데, 죽음이란 실제로 죽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지만, 죽음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를 입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에피큐로스의 논점을 상기하는 까닭은 죽음에 대한 예술적 논의도 죽음 그 자체를 다룰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 그 자체를 자신의 추체험 할 수는 있으나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타자의 죽음이 야기하는 정서적 반응을 기록하거나 표현하므로서 초월이나 체념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많은 시인들이 삶에 대한 달관의 시를 썼으나 그 진위 여부는 따질 수 없다.) 문득, 세조의 왕위찬탈에 맞서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성삼문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읊었다는 절명시가 떠오른다.

 

擊鼓催人命 북소리는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 머리 들어 보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黃天無客店 황천 가는 길에 주막조차 없다는데

今夜宿誰家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필자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黃天無客店/今夜宿誰家의 결구는 막연하게나마 죽음에 대한 불안과 아쉬움의 정서를 표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충절을 지키려는 의지와는 별개로 타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움을 어떻게 형용할까? 저승에는 주막이 없다는 처연한 고백을 저승 그 너머에까지 이승의 주막을 끌고 가는 정서의 반응으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3.

 

김상숙의 7편의 시는 형태상의 다양함 속에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버무러져 마치 시인의 바로 옆에 있는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이 친밀함이란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동화의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시인이 시 속에 무채색으로 감추어둔 것은 ‘죽음’이라는 사소하면서 거대한 주제이다. 경전을 읽는 것도 아니고 수행을 감행하는 것도 아닌 채로 시인은 담담히 죽음의 현장을 기록하고 심장 속에 집어넣는다. 말하자면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죽음, 죽음 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의 핏줄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 것처럼 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모순판단을 단호히 거부하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잠은 우리에게 휴식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가사假死의 상태이기도 하다. 잠에 빠져 들어가 있을 때 우리는 살아 있음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감옥, 오래된 율법, 꿈틀거리는 늪, 깊숙한 식욕으로 치환된 죽음은 늘 우리가 마주치는 ‘불편한 잠’이다. (시 「불편한 잠」 참조) 이렇게 삶 속에 삼투되어 있는 죽음은 경계가 없고 ‘젖은 흙을 열고 나온/ 커다란 왕 지렁이/ 기어간 만큼 죽음이다’(시 「슬픈 도형」 첫 연)라는 반대개념을 이끌어낸다. 흙속에 숨어 살아야하는 지렁이는 때로는 지표면으로 올라와 할 때도 있다. ‘기어가는’ 지렁이는 살아 있지만 바로 기어가는 그 사실 때문에 기꺼이 다른 생명체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삶/죽음 이라는 등식은 일반적 상식이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상태가 존재한다. 일상적 활동이 정지된 식물인간은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죽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경계가 모호한 세계를 인식함으로서 죽음은 체념과 달관도 아닌 또 다른 경지의 삶임을 시인은 슬며시 일러준다. 죽은 언니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내 심장에 스키드마크처럼 줄이 그어지던’(시 「불편한 잠」 부분)그 기억 속에서 죽은 언니는 살아 있다!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당신이 내게로 왔다가 간일을 은폐하느라

내 몸으로 통하는 모든 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과거형일수록 슬픔은 무거워

나는 나를 자주 꺼내 읽지 못 한다

눈물이 실연의 어깨를 친다

콧잔등 타고

물컹한 목젖을 흘러내리는

당신은 4할 5푼의 젖은 독약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별들이

당신 밖으로 미끄러진다

당신이 내게로 와

돌아갈 사랑을 잃었을 뿐인데

내 몸은 바짝 마른 강물의 형상이다

건기 주의보다

- 시 「안구 건조증」 전문

 

이 시에서의 ‘당신’이 연인이든 아니면 그 어떤 존재이든 간에 이 세상에 부재한 당신임에는 틀림없다. ‘당신’을 죽음으로 읽던, 시간으로 읽던 확실한 것은 ‘당신’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런 존재의 부재로 인하여 눈물이 흐르고, 슬픔을 가눌 수 없기에 몸으로 통하는 모든 길에 자물통을 채운다. 그렇다고 해도 내 안에 ‘당신’이 기억되는 한 그 ‘당신’이 삭제될 수는 없다. 이 시는 묻는다. 눈물이 사라진 몸은 살아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의식의 확장은 생물/ 무생물, 남/여, 동물/ 식물 등의 모순개념을 무너뜨리고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남과 여의 그 사이에 무량한 공간을 허여 許與한다. 시 「한 몸, 변주곡」은 식물인 등나무가 무생물인 정자 亭子를 휘감고 도는 모습을 통하여 원초적인 성 행위를 연상하게 한다. 격렬한 몸짓으로 서로를 감싸고 애무하는 것으로 등나무와 정자를 연상하는 시인은 생명의 원천에 대한 의문과 경외를 금하지 못한다. 반복적으로 시에 나타나는 ‘손도 없는 것이 발도 없는 것이, 코도 없는 것이 저 몸도 없는 것이, 눈도 없는 것이 한 가닥 눈썹도 없는 것이, 맛도 모르는 것이 멋도 모르는 것이, 촉각도 없는 것이 미각도 없는 것이, 귓불도 없는 것이 혀도 없는 것이’와 같은 진술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생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인식의 무망함, 경계의 무화 無化를 강조하며 우회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인식의 전도 顚倒를 요구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구멍 속은 궁금하다/ 구멍들은 온기를 품고 있다’( 시「구멍가게」 부분)는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으로서의 생명과 그 생명의 에로티즘을 직시하는 시인의 성찰은 생명 영역의 확장을 통하여 무한히 죽음을 밀어내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지난 해 이른 봄 필자는 시인들과 어울려 신두리 사구에 간 적이 있었다. 수수만년 바람과 바다와 모래가 하염없이 퇴적해낸 사구는 많은 시인들의 영감을 불러 일으켜 명편 名篇들을 이루어내기에 충분했다. 보기에 따라서 그 어떤 생명들도 깃들지 못할 황량한 벌판으로, 인공 人工에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으로, 낭만과 추억을 남기는 발자국의 그림판으로 읽혀지는 신두리 사구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천국이거나 지옥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삶이 시들해져 절벽 끝에 섰다면 이곳에 와서 온몸을 던져도 좋으리

파랑이 밀어올린 모래를 두근두근 감싸 안고 견디는 것을

달아나던 걸음 돌려 태풍에 맞서 무릎 안쪽이 다 까져있는 것을

청천벽력, 하늘의 무게를 한껏 받아 안고 뒹굴고 있는

저 중력을 보라! 포크레인 발톱 따라

갯메꽃 해당화 통보리사초 갯그렁 해방풍 순비기꽃 소리쟁이 어질어질

남미에서 떠밀려온 달맞이꽃까지 가뭄에도 젖가슴 마를 날 없다

서두르지 말고 주홍거미 개미귀신 물장군 금개구리 맹꽁이 큰주홍부전나비 문신한

어미의 팔에 안겨 보라 끊임없이 모래를 주고받아 건재한,

집 없어 머리 둘 곳 없다면 이곳으로 마실 한 번 와도 좋으리

넘실거리는 모래물결이 가난한 순례객들의 드넓은 행간이 되어 삶을 달굴 것이다

쉽게 삼키고 뱉는 세상이라지만 진력나지 않는 예도 있다

깊고 먼 심해에 심지를 두고 있어 총기聰氣 가득한 해안은 건기가 없다

  - 시 「사구砂丘를 읽다」 전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신두리 사구는 그 희소성으로 말미암아 몸살을 앓고 있다. 인적을 따라 사구 입구까지 들어선 팬션들, 유흥시설들, 사구를 관통하는 둘레길 데크, 외래식물을 없앤다고 포크레인으로 모래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무지한 공권력으로 신두리 사구는 태고의 모습을 잃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구砂丘를 읽다」는 이와 같은 오늘의 문제를 꼼꼼이 적시하면서 자연이 던져주는 묵시록으로 사구를 읽고 있다. 자연의 훼손과 뭍 생명들의 소리 없는 멸종이 순환하는 황량함 속에서 생명의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은 시의 위의를 드높이는 값진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김상숙 시인이 도달한 생명의 경계는 ‘물’이라는 원천으로 회귀한다. 광포함과 유연함이 뒤섞인, 야만과 문명이 날줄과 씨줄로 얽힌 강은 모든 생명의 요람인 동시에 무덤이다. 바다로 흘러간 물은 물안개로, 구름으로 몸을 바꾸면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죽음을 몸으로 받는다.

 

 

거대한 짐승이다

묵직한 몸을 들어 올리며 기어가는

바람의 은신처다

깡마른 들판에 옷자락 찢기고 손등을 할퀸다

방향을 잃고 머리를 처박는다

은빛 비늘에 두껍고 단단한 가죽을 두르고

거만한 짐승 한 마리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꼬리인지 머리인지 만져본 적 없지만

아무도 저 짐승의 길을 막지 못한다

수억만 평의 대지를

일필휘지(一筆揮之)하고 있는

 

하늘 위, 날개 달린 짐승도

거대한 무게를 감당 못할 때

빛의 이마를 가르고

빗살무늬 가죽을 두르고 내려온다

- 시 「강」 전문

 

5.

 

주마간산으로 살펴본 김상숙의 일곱 편의 시는 섣부른 직관과 필연성이 떨어지는 공허한 말의 잔치로 끝나는 요즘의 경향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이 화두로 삼은 죽음의 주제를 관념으로 흩트리지 않으면서 다양한 시의 얼개로 만들어내는 공력은 오직 시인의 관찰과 투철한 사색의 결과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더딘 발걸음과 많은 시인들이 도외시한 생명의 경계를 넓혀가는 탐구의 시편은 그 어떤 생태주의자보다 생태적이다. 앞으로 시인 김상숙의 시선이 머물 곳이 어디인지 자뭇 궁금해진다.

◆김상숙 시인의 7편의 시

 

한 몸, 변주곡

한적한 공원 옆

등나무와 亭子가 서로 끌어안고 있다

 

등나무가 두 허벅지 힘으로

정자 기둥을 한껏 조이고 있다

 

이 외설적 체위에 얼른 눈 돌려도

유혹적 몸짓에 자꾸 시선을 빼앗긴다

 

몸을 배배꼬는가 하면 근육질 팔목을 끌어당기는

손도 없는 것이 발도 없는 것이

 

날리는 머리카락 매만지며

목덜미를 쓰다듬는가 싶더니 젖무덤을 파고든다

코도 없는 것이 저 몸도 없는 것이

 

서로의 호수에 살폿 빠져 바르르 떨고 있다

눈도 없는 것이 한가닥 눈썹도 없는 것이

 

한 몸에 거느린 간절한  

돌이킬 수 없는 체위. 깊숙한

맛도 모르는 것이 멋도 모르는 것이 

긁는 곳마다 꽃을 피운다

촉각도 없는 것이 미각도 없는 것이

 

등꽃 잎사귀

발그레 흔들리는 뜻 모를 진동

귓불도 없는 것이 혀도 없는 것이

 

안구 건조증

 

당신이 내게로 왔다가 간일을 은폐하느라

내 몸으로 통하는 모든 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과거형일수록 슬픔은 무거워

나는 나를 자주 꺼내 읽지 못 한다

눈물이 실연의 어깨를 친다

콧잔등 타고

물컹한 목젖을 흘러내리는

당신은 4할 5푼의 젖은 독약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별들이

당신 밖으로 미끄러진다

당신이 내게로 와

돌아갈 사랑을 잃었을 뿐인데

내 몸은 바짝 마른 강물의 형상이다

건기 주의보다

 

구멍가게

 

강원도 홍천 지나고 내면 지나

허름한 산골 가게

언제 열고 닫는지

깨진 창문에 비뚤비뚤

장난치듯 써있는 이름

구.멍.가.게

구멍 속은 궁금하다

구멍들은 오래된 온기를 품고 있다

바람이 바람을 빠져나오느라 입술 부르틀 때

소문이 가랑이 사이를 물고 늘어질 때

혼자된 여자가 조그만 구멍을 열며 닫으며

허리춤을 팔았다고는 하나

낙엽이 보았다고는 하나

한 번도 구멍 밖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떠도는 것이기는 하나

낭설이 구멍을 꽉 채운다

빗줄기에 젖는다

 

 

불편한 잠

 

 

잠은 감옥이다

감옥 안의 불타는 이불이다

불타는 이불이 밀어 올리는 뜨거운 창살이다

 

원통형으로 뒹구는 잠속에 갇힌 내가 있다

잠은 낮은 바닥을 어깨로 받치고

종신형을 사는 곳

어깨가 뜨겁다

썩으면서 즐겁게 피어난다

잠은 오래 된 율법이다

부패의 시작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잠을 찍어먹어 본다

잠이 나를 흘리고 있다

나와 내가 잠시 입술처럼 겹쳐진다

잠은 정리되지 않는다

낯선 발꿈치를 거침없이 문다

제 머리를 스스로 삼켜버린다

잠은 꿈틀거리는 늪이다, 미끌거린다,

깊숙한 식욕이다

 

강 

 

 

거대한 짐승이다

묵직한 몸을 들어 올리며 기어가는

바람의 은신처다

깡마른 들판에 옷자락 찢기고 손등을 할퀸다

방향을 잃고 머리를 처박는다

은빛 비늘에 두껍고 단단한 가죽을 두르고

거만한 짐승 한 마리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꼬리인지 머리인지 만져본 적 없지만

아무도 저 짐승의 길을 막지 못한다

수억만 평의 대지를

일필휘지(一筆揮之)하고 있는

 

하늘 위, 날개 달린 짐승도

거대한 무게를 감당 못할 때

빛의 이마를 가르고

빗살무늬 가죽을 두르고 내려온다

 

사구砂丘를 읽다

 

삶이 시들해져 절벽 끝에 섰다면 이곳에 와서 온몸을 던져도 좋으리

파랑이 밀어올린 모래를 두근두근 감싸 안고 견디는 것을

달아나던 걸음 돌려 태풍에 맞서 무릎 안쪽이 다 까져있는 것을

청천벽력, 하늘의 무게를 한껏 받아 안고 뒹굴고 있는

저 중력을 보라! 포크레인 발톱 따라

갯메꽃 해당화 통보리사초 갯그렁 해방풍 순비기꽃 소리쟁이 어질어질

남미에서 떠밀려온 달맞이꽃까지 가뭄에도 젖가슴 마를 날 없다

서두르지 말고 주홍거미 개미귀신 물장군 금개구리 맹꽁이 큰주홍부전나비 문신한

어미의 팔에 안겨 보라 끊임없이 모래를 주고받아 건재한,

집 없어 머리 둘 곳 없다면 이곳으로 마실 한 번 와도 좋으리

넘실거리는 모래물결이 가난한 순례객들의 드넓은 행간이 되어 삶을 달굴 것이다

쉽게 삼키고 뱉는 세상이라지만 진력나지 않는 예도 있다

깊고 먼 심해에 심지를 두고 있어 총기聰氣 가득한 해안은 건기가 없다

 

슬픈 도형

 

젖은 흙을 열고 나온

커다란 왕 지렁이

기어간 만큼 죽음이다

 

죽음은 경계가 없어

앞과 뒤가 축축한 곡선이다

 

어릴 적 산수시간

삼각형 사각형 다각의 뿔 달린

도형을 그려나가다 보면

 

무덤처럼 닫히던 도형이 슬펐다

내 심장에 스키드마크처럼 줄이 그어지던

폐곡선 속의

죽은 언니가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