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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의 위의 威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4. 8. 14:10

 

<월간문학 5월호 월평>

시의 위의 威儀

나호열

 

오는 듯 마는 듯 하다가 금세 가버리는 것이 봄이다.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꿈은 그래서 아쉽고 아프다. 더군다나 인생의 봄을 저만치 떠나보낸 시인들에게 봄은 삶의 복기 復棋이면서 비가 悲歌이다. 혹독한 겨울의 경험 없이 봄의 찬란함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4월호에 실린 대다수의 작품들이 봄을 위주로 하여 계절의 소회를 다루고 있음은 각 계절과 대칭되는 오늘날 우리의 삶이 신산 辛酸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단순한 상춘 賞春이 아니라 생명의 복원을 꿈꾸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삶의 복기와 비가는 지난 세월로의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편의 시가 곧바로 복음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닐 터. 시가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감상 感傷으로 떨어질 위험은 상존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단순히 묘사하는 시, 사소한 개인적 이야기를 침소봉대하여 진술하는 시, 생략과 압축의 시의 전형적 묘미를 살리지 못하는 시는 시로서의 위의 威儀를 지켜내지 못하는 잡문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시의 위의는 무엇인가? 주제가 무엇이든, 소재가 무엇이든 간에 비장미 悲壯美가 결여된 시는 허세의 미망을 벗어나기 힘들다. 비장미는 인생을 진지하게 시로서 탐구하려는 시인의 품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언어로 펼치는 현상의 묘사는 영상매체의 극명함에 미치지 못하고, 사소한 이야기의 침소봉대는 한 줄의 잠언에도 모자라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의 독백이고, 그 독백은 시인의 숨겨진 자아의 표출인 동시에 깨달음으로 가는 도정에 불과하다. 쉽게 이야기 한다면 시는 전말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부분으로 전체를 짐작케 하는 사유의 여백을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 사유의 여백은 시인의 절제력과 결부되는 것으로서 현실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신분을 사상한 채 프로메테우스의 숙제를 걸머진 고독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으로 존재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 때, 박영숙의 시 비 『碑무덤』 은 허명에 들뜬 시인들에 대한 냉소를 토로한다. “삼천리 금수강산 기름진 이 땅 위에/ 천년만년 주춧돌이 되어 보겠노라고/ 너도 나도 줄을 서서 시인이 기둥을 세운다... 중략...시인은 죽어서도 말하는 선구자라고/ 골마다 나들목에 뿌리박고 비 碑무덤을 잡는다.”는 이 땅의 유행은 참으로 부질없고 허망한 일이다. 저 고래 古來의 「공무도하가」 나 「정읍사」의 작자가 누구였던가? 스스로 시인이라고 일컬으며 이름을 내세웠던 사람들이었던가? 절절한 삶의 아픔과 고통을 피 토하듯 읊었던 까닭에 천 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시의 원형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관점에서 채환석의 「인생 2막」은 도가적 관점에서 인생을 조망하는 풍모를 보여준다. ‘바람에 귀를 맞추고/ 노을 빛에 눈을 닦는’ 경지에 이르려고 분투하는 것이 시인의 바람직한 시인의 행로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무위자연 無爲自然에 이르는 길은 자연에 대한 다양한 탐색과 사유가 선행되지 않으면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출세간을 감행한 도인에게는 가능하지만 세간에 몸을 둔 시인은 그 깨달음에 이르는 참담한 도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해줄 수 있다. 무위에 이르기 위한 유위의 진상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자연에 대한 찬미보다 몸서리쳐지는 전율의 기록이 무위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김동환의 「큰기러기는 어디서 날개를 펴나」, 신장련의 「맥문동」, 한승민의 「자판기 앞의 벌」 등은 인간문명에 훼손되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간의 각성을 호소하는 작품들이라 볼 수 있다.

 

겨울나기는 청보리 같고

고비사막에 가도

모래턱을 베고

푸른 웃음 마르지 않을

맥문동

- 신장련, 「맥문동」 부분

 

이 무슨 몽니인가

우리가 뭐라

AI의 좀비들을 떨궈놓고 간다고

 

수만 마리 대열지어 살처분장으로 가는 오리 떼

 

- 김동환, 「큰기러기는 어디서 날개를 펴나」 부분

 

벌 들도 커피를 마신다

 

꽃 속에 파묻혀야 할 시간

아침부터 널부러진 종이컵 속

인공 향에 취해 개미가 된다

 

- 한승민, 「자판기 앞의 벌」 1, 2연

 

맥문동은 한자어 麥門冬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약초 藥草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유익함을 주는 맥문동이 매연에 쓰러지며 푸른 꽃을 피워낼 수밖에 없는 도시문명에 대한 안타까움, 고병원성 조류인풀렌자(AI)의 원흉으로 천 만 마리가 살처분된 오리와 닭들, 전염의 우려 때문에 감시의 대상이 되어버린 큰기러기의 창공에서의 배회는 따지고 보면 인간의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힘들게 꽃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자판기 종이컵 속에 남아있는 설탕물에 눈 멀어 벌의 이름을 버리고 개미로 살아가는, ‘느릿느릿 걸어 종이컵 하나면/ 세상에 부러울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하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교란의 죄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소비의 욕망은 자연에 대한 착취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도시의 가로에 뿌리를 내린 맥문동은 잘못이 없다. 먹이와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 인간이 만든 간척지와 호수에 찾아든 큰 기러기와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하여 대량 사육된 오리나 닭에게는 잘못이 없다. 꽃과의 상호 보완관계를 버리고 종이컵의 설탕물에 탐닉하는 벌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와 같은 미물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애정은 일회적인 연민이나 비분강개로 그쳐서는 안된다. 시인은 자연의 훼손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존엄을 지켜야 하는 책무를 스스로 걸머질 수 있는 용기와 실천을 각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각성은 말없는 자연의 목소리와 몸짓을 자신의 삶 속에 삼투시켜 보다 희망적인 낭만의 서정으로 승화시킬 때 시의 비장미를 고조시킨다.

 

꽃, 그리움이 아니라

희망이 아니라

형벌임을 알겠다

... 중략

 

고향을 찾은

꽃의 발들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노을 속의 점

별인가?

꽃이 만개한 나무에서

지는 한 잎

지는 별똥.

 

- 임인숙의 「꽃의 알림장」 부분

 

 

이 하룻밤

봄날 오후 깜박 다녀가는

나비잠이라 하자

... 중략

 

어둠이 숨겨 놓은 망막한 망양 밤바다

207 마일 펜션의 외등 빛에

졸다가 깨다가

끌어안다가 돌아눕다가 다시 마주 보는데

...하략

 

- 김기연, 「바다 문지방에서」 부분

 

위의 두 편의 시는 훼손되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과 비감과는 거리를 두고 자연에 내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바닷가 백사장을 흉내를 내고 있는 강’이며 ‘위로의 말이 의미 없는’ 꽃을 피우는 곳이다. 그러나 피안에서 차안으로 건너가는 다리에서 바라보는 그 꽃들은 지친 우리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별이고 지는 잎이어서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 이국적인 ‘207마일’이라는 바닷가 숙소에 머문 도시인은 외등 불빛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도시를 떠나 잠깐의 탈출을 감행했으나 순전히 어두운 바다와 몸 섞지 못하고 ‘지상의 물고기’이며 ‘어두운 해’ 인 전기(외등)에 잠식될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렇다! 자연으로부터 빚진 외로움은 자연의 섭리 속에서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자각할 때 완성된다. 김용언의 「겨울 사람, 겨울 숲 앞에서」 는 한 인간이 시간 속에 내재한 겨울을 맞이하는 것과 순환하는 자연의 겨울을 대비한다.

 

겨울 나무들은 외로움을 단절하였다

모여 있으면 외롭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차려

가을부터 준비한 씨눈을 가지 끝에 매단 채

어머니가 길 떠나시던 날, 건네주던 손수건 같이

눈물을 감춰 버렸다.

「겨울 사람, 겨울 숲 앞에서」 4 연

 

자연의 섭리는 냉엄하다 못해 외로움을 단절할 만큼 몸서리치게 무섭다. 종말을 향하여 가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건조대에 걸려있는 빨래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만 겨울 숲은 또 다시 생명을 잉태하는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하여 외롭다. 그렇다면 ‘밥상에 떨어진 밥알을 줍는’ 생명을 향한 절실함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베워야 할까?. 나무는, 숲은 스스로의 몸으로 계절을 기억한다. 몸으로 탄생을 거듭하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김용언의 각성은 자연의 회생력을 통하여 일회적 인생의 현실을 냉철하게 반추하려는데서 출발한다. 시인의 각성은 무조건적인 희망이나 달관이 아니라 자연과의 대비를 통해서 인간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식함으로서 달관이 아니라 체념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역으로 정화시키려는 열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맞이하는 겨울이 생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 겨울로 말미암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봄을 밪추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화양연화의 꿈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