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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 맞서는 문학의 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6. 1. 13:18

 

 

괴물에 맞서는 문학의 힘

 

  캄캄한 바다 속으로 수장 水葬되는 세월호 世越號를 속수무책 바라보면서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괴물들에 경악했다. 삼 백 여명의 죄 없는 승객을 내팽개치고 제 한 목숨을 구걸하며 맨 먼저 꽁무니를 뺀 선장과 선박직 승무원들, 초동 대처에 우왕좌왕 아까운 구조 시간을 허비한 해양경찰을 비롯한 권위에 사로잡힌 무능한 관료들, 법과 규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재물에 눈 멀어 돈벌이에 급급했던 해운회사와 그 회사를 둘러싸고 있는 비호세력들, 그리고 급기야 그들의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비뚤어진 종교의 일그러진 얼굴이 하나 둘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이 수많은 괴물들이 우리들의 지근거리에 존재하는 이웃임에 또 한 번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런 와중에도 허언 虛言과 공언 空言이 난무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쳐 보겠다는 볼쌍 사나운 세태가 난무하고 있으니, 이러한 우리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이 시대의 자화상을 제 정신으로 바라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신생의 사월 四月이 죽음의 사월 死月이 되어버리고 줄을 잇는 조문 弔問의 행렬과 그에 비례하는 사회적 트라우마는 흘러가는 세월 歲月도 지워버릴 수 없고 세상을 초월하는 간절한 세월世越의 공허한 기도로도 치유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 괴물들은 처단해도 무한 증식하는 좀비와 같다. 괴물들의 퇴치는 결코 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치아의 더러운 관행을 차단하는 법,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안전에 관련된 법이 우후주순 쏟아진다 해도 제2, 제3의 참사를 막을 수 없다는 불신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집단 트라우마의 원인이기에 오늘의 절망은 어둡고 깊다. 노자가 조롱했듯이 법은 인위 人僞에 불과할 뿐이고 인간사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혁명을 주저한다면, 개인의 양심과 건강한 윤리로 지탱되는 사회가 구현됨이 요원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런 사회를 향해 달려나가야 하지 않을까?. 백가쟁명의 난세에 대한 처방은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달콤하게 잊혀지는 꿈일 뿐이다. 이 말은 미비한 법의 보완과 제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 법 또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충분조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칸트는 “너의 인격 및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할 것이며,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무한 경쟁의 시대,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 정치적 식견의 차이에서 오는 극렬한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는 이 사회의 추악함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간의 교류와 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면 타자 他者에 대한 배려와 관용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끊임없이 학습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오늘도 분노하고 절망하고 절규하는 민중들과 함께 문학은 살아 있다. 거리에 나선 시인들이 추모시를 낭송하고 애도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학이 외면 받고 잊혀져 가는 시대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무력함이 고개를 든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고 리턴 Edward George Earle Bulwer-Lytton이 말했던가? 괴물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문학이 해야 할 임무는 무엇일까? 문학은 이 시대의 괴물을 무찌르고 소멸시키는 힘은 없을지 모르나 상처받고 분노하는 민중의 마음을 도닥여 그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지키는 망루가 되도록 만드는 힘은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찬양하고 고취하는 낡은 낭만주의가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유구무언의 늦은 봄에 입 속에 맴도는 말은 이 것 뿐이다.

애이불상 哀而不傷!

 

계간 <<시와 산문>> 20134년 여름호 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