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왜 아름답다고 인식될까. 아름다움이란 인식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철학이 시작되면서부터 인간을 고민하게 만든 주제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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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은 사랑받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테오그니스, 기원전 6세기)
‘아름다움은 천재의 한 형태다. 아니, 설명이 필요 없어 천재보다 우월하다. 그것은 햇빛, 봄, 어두운 바다에 반사하는-우리가 달이라 부르는-은빛 껍질 같은 이 세상의 현실 중 하나다. 의심할 필요 없으며 그것만의 신성한 권리가 있다. 아름다움이 있어 인간은 왕자가 될 수 있다.’(오스카 와일드)
우선 아름답지 않은 것들부터 생각해 보자. 시체, 썩은 음식, 배설물…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대부분 사람이 당연히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추하고 역겹게 만드는 것일까? 대부분 우리 몸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만지거나 냄새 맡고 먹을 경우 건강에 치명적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가능한 한 멀리해야 한다. 미처 몰라 먹거나 만졌다면 이미 늦다. 위험한 행동을 하기 전, 가능한 한 최대한 먼 거리에서 이들을 알아보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멀리서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진화된 방법은 아마도 냄새 분자들의 화학적 구조를 분석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바로 코를 통해 주변 분자들을 빨아들이는 후각적 인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분자 확산’을 통해 전달되는 지독한 냄새라도 먼 거리에선 정확히 구별하기 어렵다. 더구나 우리가 피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추하고 역겨운 분자들이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 아니었던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자. 죽은 동물이나 썩은 음식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청각적 구별은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방법은 어떨까? 우선 멀리서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시각은 물체에서 반사되는 광자들로 인식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병균이나 질병들은 광자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인간은 보는 것만으론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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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보는 것’이 촉감·후각·청각을 통한 인식보다 뛰어나 인간 같은 영장류는 뇌의 3분의 1 이상을 시각정보 처리에 활용한다. 시각이야말로 진화하는 생명체의 최첨단 무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추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시각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초음파를 통해 세상을 인지하는 박쥐나 콧수염을 통해 주변을 알아보는 쥐에게 아름다움과 추함이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지각이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인간에게 추함과 아름다움은 대부분 시각적이라 생각해 보자.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움은 눈의 판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일랜드 시인 헝거포드(Margaret Wolfe Hungerfod)가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안에 있다’고 했듯 말이다. 그만큼 인간에게 아름다움이란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뒤샹(Marcel Duchamp)은 그렇기에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전통 예술을 ‘망막의 예술’, 고로 단순히 망막을 자극하는 장난이라고 조롱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은 마음과 정신의 창문일 뿐이다. 눈과 망막은 세상을 보지만,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과 정신이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보고 생각하는 자의 마음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아름다움이란 결국 인간이 두뇌 안에 있는 개념 중 하나라고 생각해 보자.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보는 자의 마음에 있다는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예를 들어 장미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망막에 꽂히는 장미라는 ‘광자적 확률 분포’에 이미 우리가 갖고 있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추가되는 것일까? 이것이 중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이 수백 년간 다투었던 개념의 보편성 문제다.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가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장미는 수도 없이 많다. 비슷하게, 세상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적 장미’와 ‘개념적 아름다움’은 그중 어느 것일까? ‘실념론(實念論Realism)자’로 불리는 대부분 중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따라 개념이란 보편성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이슬람 최고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설가 아베로에스(Abu I-Walid Muhammad bin Ahmad bin Rusd, 라틴어 Averroes, 1126~1198) 역시 개념적 장미는 물리적 현실에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장미가 아닌 플라톤식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장미의 이데아’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이데아 중의 이데아’라고 부른 바 있다. 아름다움이란 독립적 개념이 아닌 우주의 모든 이데아들의 질서를 좌우하는 원초적 이데아라는 것이다. 5세기 신학자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스(Pseudo-Dionysius Areopagitas, 기원후 5세기)’는 플라톤의 ‘이데아 중 이데아’는 결국 ‘신’을 의미하므로 논리적으로 ‘신=아름다움’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플라톤식 이데아 세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순간 난감한 문제들이 생긴다. 도대체 이데아 세상이란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보이지도 느끼지도 지각할 수도 없는 이데아 세상이 물질적 세상과 어떻게 원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 단순한 말장난으로 문제를 풀려는 게 아닌가?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kam, 1287~1347)은 반대로 “개념은 개체를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 불리는 이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유대 철학자 마모니데스(Moses Mamonides 또는 RaMBaM, 1135~1204)가 주장했듯 ‘개념적 장미’란 우리가 경험한 모든 장미들의 집합이라 가설한다. ‘개념적 아름다움’ 역시 경험적으로 아름다웠던 모든 개체들의 공통점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기억해 보자. 책에서 주인공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은 당연히 윌리엄 오브 오컴과 셜록 홈즈 시리즈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합친 이름이다. 소설로서도 흥미롭지만, 이 책은 유명론적 스토리 구성으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유명론적 철학에 치명적인 질문을 하나 던진다. 즉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개체의 공통점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어쩌면 수많은 장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장미’라는 이름 하나만일 수도 있다. 12세기 수도사 클루니 베르나르(Bernard of Cluny) 역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어제의 장미는 이름만이네. 우리 손에 남는 건 빈 이름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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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추한 것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우리가 피하려 한다는 점이다. 끝없는 진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것들의 형태를 회피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싶은 것,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정하면 어떨까? 모딜리아니의 ‘빨간 누드’는 진화생물학적 (남성)본능에 너무나도 충실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콜라병 같은 몸매, 공작의 멋진 부채꼴 모양 꼬리, 고릴라의 넒은 가슴…나름대로 모두 생존에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것들에 대한 표현이다. 비현실적으로 큰 눈을 가진 만화 주인공들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눈이 큰 어린아이를 돌봐야 하는 유전적 모성애를 바탕으로 할 것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미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균형과 조화 역시 대부분 진화적 기원으로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얼굴과 몸의 좌우 균형은-적어도 간접적으론-유전적 ‘품질 보증’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 사람은 다양한 얼굴의 평균값으로 만들어진 얼굴을 가장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균값 얼굴’의 진화적 장점은 무엇일까? 개체적 얼굴보다-단순히 수학적인 이유 덕에-더 조화로워질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어떨까? 영장류인 인간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제공하는 풍요한 녹색 환경은 아름답다. 반대로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어두운 늪지는 두렵고 추하다.
중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실념론 대 유명론’ 대립을 현대 과학을 통해 풀 수 있을까? 우리의 개념들은 물론 물리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유명론자들이 주장했듯 말이다. 반대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개념의 ‘미적인 질’은 보편성에서 온다. 하지만 인간의 보편성은 플라톤의 ‘고매한’ 이데아 세상에서 오는 게 아니다. ‘진화’라는 긴 과거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눈을 뜨고 장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수천만 년 동안 태어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실망하고, 사라진 우리들 모두의 조상과 공감하는 것이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