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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는 평화의 꽃나무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3. 18. 20:31

 

<월간문학 2014년 4월호 시 월평>

 

시는 평화의 꽃나무이다

 

나호열

 

  무수히 많은 시의 정의定義는 충분히 음미해야할 가치를 지니지만 그와 동시에 어찌할 수 없이 폐기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구가 그러했던 것 처럼 앞선 정의를 넘어서야하는 것이 창조의 열망을 지닌 시인들의 숙제이기도 하다. 주제의 새로움, 일상적 정보 교환의 언어를 정서의 언어로 치환하는 일, 그리하여 그 누구도 확정할 수 없는 미美의 경지로 올려놓아 원초적 노래로 탄생시키는 작업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백수百壽를 바라보는 황금찬 시인이 “시는/평화의 꽃나무”라고 단언하고 “시여/ 시가 울면 천년이 운다”( 「구름밭의 하늘나무」, 마지막 연)고 읊조릴 수 있는 것은 시가 낭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자연에 대한 찬탄과 부정한 현실의 고발을 넘어 자신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위안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음을 깨닫고 있음에서이다.

 

  그렇다고 한마디로 ‘평화’를 정의하긴 어렵다. ‘평화’의 외연이 워낙 넓은 까닭에 그 단어의 주석은 무한히 확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경계가 사라지고, 분쟁이 해소된 고양된 정신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과학의 임무가 그러하듯이 한 편의 시는 현실계의 사실 fact로부터 빚어지는 감성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그 의의를 실현한다. 깨달음이 아니라 순간순간 체득하게 되는 느낌의 공명共鳴이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슬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외로움에 몸을 떠는 존재이다. 과학과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열렬한 탐구의 방식이 아닌, 정치가가 외치는 달콤한 희망의 말이 아니라 절망의 시선으로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러한 시인의 습성은 “내 그림자는/ 한쪽 팔이 없다/ 그림자를 바꾸어가며 달려 봐도/ 빈 소매를 붙잡을 수가 없다(가인혜, 「붉은 쪽지」 1연)”는 비극적인 불구의 실존과 “잎사귀가 유난히 반짝이고/ 잎이 된 것 같지만/ 잎이 꽃이 될 수 없어”(김영길, 「안시리움」 부분) 이리저리 내몰리는 약자弱者의 현실을 비정하고 냉철하게 증언하는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람 한줌에서 만 권의 경전을 읽겠다는 허황된 소망 때문에 시는 소수의, 가녀린 약자의 투덜거림이나 숨어사는 이의 뜬 구름 잡는 소회로 곧잘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시와 시인에 대한 기우에 불과하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주치는 박은우의 시 「비육우 肥肉牛」 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비육우에 오버 랩 되는 기계화되고 상품화되는 현대인간의 자화상을 통렬히 그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를 통한 증언과 통찰이 전가 傳家의 보도寶刀는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강력한 정보 유통의 수단인 방송 영상매체를 통해서 이미 상식화되어버린 사실의 공유는 공분을 일으키지 못하거나 이야기꺼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득 유령처럼 다가온 고령화시대 가족의 해체와 늙음의 처연함을 세밀하게 묘사한 김종기의 「어느 양철집 노인」도 위와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언급하고 있는 시들은 고통과 회한에 찬 현실의 증언이나 고발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본질적 요소인 정서의 고양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음 인용문의 굵은 문장들은 인용된 시들의 마지막 부분들인데 이 결구들이야말로 화룡점정의 여백미를 보여주는 진경임을 강조하고 싶다. 「어느 양철집 노인」 마지막 연의 “썰물처럼 햇빛이 다 빠져 나가면 그의 일과는 끝이다/ 어제는 뻘죽이 열린 대문으로/ 달빛이 그윽하게 들어와 /편지 대신 아득한 추억 몇 점 훌쩍 던져 주고 갔다”, 「붉은 쪽지」의 마지막 연 “카펫이 깔린/ 구석으로 모인 물들이 바다의 심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서쪽햇살 부서진 담장에/ 심고 온 붉은 쪽지”나 김영길의 시 「안시리움」의 마지막 연 “마음은 가고 없다/ 남아있는 화분에서 다시/ 반짝이는 새살이 돋아/ 시린 마음을 덮어주고 있다/ 안시리움, 안티리움”, 시 「비육우」의 마지막 부분 “가속도가 붙어서 너무 짧아진 하루/ 그 하루를 되새김질하며 달리는 강변길/ 소멸을 알리는 하늘이 참 붉다”, 는 결구結句들은 일상적 언어를 시어로 확장하는 묘미를 살리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편지 대신 아득한 추억 몇 점 훌쩍 던져 주고 간’ 그 이후의 여백, 노을을 비유한 ‘붉은 쪽지’ 속의 전언에 대한 궁금증, ‘안시리움, 안티리움’이 ‘안스러움’과 ‘안타까움’으로 음역되는 즐거움, ‘소멸을 알리는 하늘이 참 붉다’는 속성이 다른 소멸과 붉음의 의미를 전도하는 기법은 시인들의 부단한 공력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의 ‘평화’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완전함을 향해가는 부재의 비장미 悲壯美 를 공유하는 것임을 역설하는 시들을 읽는 즐거움은 오래 여운이 남는다. 가경진의 「소태나무」는 젖이 모자라 젖꼭지에 소태나무 액을 발라야 했던 옛 시절을 회고하는 시이다. 그러나 옛 시절을 그저 회고하는데 머물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인은 묻는다. 묻되 애써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젖 떨어지게 하던 울 엄니의/ 그땐 모르던 비밀이/ 어른이 된 시방은/쓰디쓴 소태나무 맛이/ 왜 사무치게 그리운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우리는 더 오래 살아야 할 것이다. 있었던 것이 부재하는 현실을 통하여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빛을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혜경의 「사마르칸트의 달을 걷다」는 이런 소멸을 거듭한 끝에 확인한 부재에 대한 성찰이다. 실크로드의 경유지였던 도시, 수많은 이민족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었던 경유지의 운명이, 기원祈願의 기도로 가득 찼던 사원의 밤을 가득 채우는 달빛으로 환유되는 몽환은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삶의 지극한 기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저 먼 나라 오아시스에 떠 있던 달이 “바다에 나간 가장 보다도/ 달이 먼저 찾아와/ 마당을 훤히 비추는 동네”, “파도 소리에 깨어나 /파도소리 덮고 잠드는 마을.”(안원찬, 「묵호항 달동네 ․ 1」)에 찾아올 때 삶의 지극한 기쁨이 가난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詩評에 언급된 시들

 

구름밭의 하늘 나무/ 황금찬

 

시는

평화의 꽃나무

 

꽃이 피면

사랑이

열리고

평화의 잎이 문을 연다

 

구름밭의

하늘 나무라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지칭하고 있다

 

시는

어디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가

구름 걷힌

아침 하늘

다시 눈을 뜨고

내일을 보듯

울지 않는다

 

시여

시가 울면 천년이 운다.

 

 

사마르칸트의 달을 걷다 /안혜경

 

한여름

환한 달이 사원을 거닐고 있다

둥근 지붕 위로 아득한 어둠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발이 위태롭다

벽에 새겨진 풀들이 꿈틀거린다

누군가의 울음소리

사정없이 벽을 내려친다

까닭없이 분주하게 몰려오는 날들

읽어 낼 수 없는 신호, 신호들

달의 숨소리가 귓가에 고동치고

움직이는 풀과 함께

사원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된다

밤새도록 부호의 끝을 잡고

몰려오는 날들의 실마리를 찾는다.

 

 

붉은 쪽지 / 가인혜

 

내 그림자는 한쪽 팔이 없다

그림자를 바꾸어 가며 달려 봐도

빈 소매를 붙잡을 수가 없다

 

견딜 수 없이 느린 몸 속에

고드름 같은 씨앗이 자란다

솟구치며 흘린 이 눈물이 따스한 것은 가슴에서 왔기 때문,

아카시아잎 같은 징검다리를 건너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본 웃음,

어떤 인생의 절망 가운데서도

늘 희망은 있었다는 것을 믿고 싶은 이별 한 자락,

더 살고 싶어서 몸부림친 것은 폭설뿐만이 아니었다

 

어깨만큼 더 넓어진 하늘

좁은 길 걷는 나는 혼자라서 네가 보인다

이렇게 한 발자욱만 밖으로 나와 서 있으면

우주가 보이는데,

 

카펫이 깔린 계단

구것으로 모인 물들이 바다의 심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서쪽 햇살 부서진 담장에

심고 온 붉은 쪽지.

 

비육우 肥肉牛 /박은우

 

애당초 사랑의 환희는 없었다

단지 주사기의 요술로 태어나

정해진 요절을 위해 평생을 수도하는 소

무아의 깊이로 되새김질 하면서

날마다 자신의 본능을 지워간다

관 棺속에 갇혀 먹고 자고

저들의 신에게 살찌는 소리를 들려 주며

보시 報施를 예비하는 일생

뇌세포는 빠르게 소멸을 시작하고

눈 속에는 달도 없고 별도 없다

단 한번의 외출로 요절하는 날

트럭을 타고 천국을 둘러본다

요상하게 달리는 알 수 없는 것들

왜 뒤로만 달아나는지

의문이 풀리기 전에

뇌세포는 소멸을 완성한다

서울 경동시장

냉장고에 걸려 있는 석양 한 조각

그걸 사 먹는 나도 소를 닮아간다

낮에는 유리관 속에서

밤에는 콘크리트 관속에서

본능 같은 꿈을 지워가는

가속도가 붙어서 너무 짧아진 하루

그 하루를 돠새김질 하며 달리는 강변길

소멸을 알리는 하늘이 참 붉다.

 

안시리움/ 김영길

 

그녀는 안시리움을 선물했다

자리 이동이 있을 때마다

잎사귀가 유난히 반짝이고

잎이 꽃이 된 것 같지만

잎이 꽃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정열적으로 빨간

열대의 번뇌를 씻어

불타는 마음을 전하는

늘 화분에서만 살아가는 꽃

작은 체구에 먼저 눈에 띄는

나는 늘 누추한 자리로 이동을 하지만

그 자리에서 외로워 말라고

내 등을 토닥여주는

시려오는 가슴을 덥혀주던 꽃

잎 속의 혈관이 가지란하여 빛나던

그녀의 모습을 닮은 꽃

 

마음은 가고 없다

남아 있는 화분에서 다시

반짝이는 새살이 돋아

사린 마음을 덮여주고 있다

안시리움, 안티리움.

 

 

묵호항 달동네․ 1 / 안원찬

 

묵호항엔 아직 달동네가 있다네

바다에 나간 가장보다도

달이 먼저 찾아와

마당을 환히 비추는 동네

한낮은 무덤처럼 고요하다가도

밤에 들수록 분주하게 소란이 반짝이는 마을

비탈에 꼬막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키 작은 집들이

가까스로 몸 비틀어 만든 골목에 들어서면

비린 냄새의 그물이 온몸을 감아 온다네

며칠 유숙하며 정 붙이다 보면

나도 어느새 풍경의 하나가 되는 마을

파도 소리에 깨어나

파도 소리 덮고 잠드는 마을.

 

어느 양철집 노인/ 김종기

 

진눈깨비가 봉창을 때리던 지난 겨울엔

찬 바람이 벌 떼처럼 불어와 마른 무릎만 짤러댔단다

달콤한 오침 시간

고물장수의 고성에 잠시 깨기도 하지만

꿈길이 좁아 한 번쯤 수침 자세만 바꾸어 줄 뿐이다

노인의 일과표는 대개 밖으로 걸려 있으나

활동반경은 생각보다 짧은 편이어서

장날 말고는 좀처럼 길을 떠나는 일이 없다

 

가세의 불운이나 병마로 인하여

자신의 갉아먹힌 꿈을 이야기할 때는

구름에 가려진 달 같지만

과거 잘난 자신의 행적을 자랑할 때

그의 눈빛은 이글거리는 해 같다

 

가파른 비탈 위 양철집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억을 낚는 노인이 있다

먼저 보낸 할머니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아들의 소식이라도 기다리는지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초소를 지키는 군인처럼

 

좁고 가파른 골목 끝 양철집에

자신이 흘려보낸 세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인이 있다

노인은 하루 중 대략 한 나절쯤은 마루에 걸터앉아

지긋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곤 한다

썰물처럼 햇빛이 다 빠져나가면 그의 일과는 끝이다

어제는 뻘죽이 열린 대문으로

달빛이 그윽하게 들어와

편지 대신 아득한 추억 몇 점 훌쩍 던져 주고 갔다.

 

소태나무/ 가경진

 

울 엄니가 제밑 동생을 낳고

갑자기 성이 된 나는

젖 달라며 떼쓰고 보챘다

넉넉지 못한 양식거리에

젖까지 부족한 울 엄니는

소태나무로 젖꼭지에 바르고

 

옛다 실컷 먹어 봐라

 

제밑 동생 낳기 전까지는

달콘하던 울 엄니의 젖꼭지가

왜 그리 쓰디쓴지

 

동생이 먹는 젖을 성이 먹으면

벌레가 먹어서 쓴거야

 

젖 떨어지게 하던 울 엄니의

그땐 모르던 비밀이

어른이 된 시방은

쓰디쓴 수태나무 맛이

왜 사무치게 그리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