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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더 외로워져야 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2. 15. 23:44

 

 

문학은 더 외로워져야 한다

【소요문학】19집 발간에 부쳐

 

나 호 열

 

【소요문학회】는 동두천이라는 소도시의 여성들로 구성된 문학 모임이다. 시에서 주관하는 ‘주부백일장’의 입상자 서 너 명이 모여 출발한 이후 20년 동안 오늘날 한국문학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증상들을 끌어안은 채 끈질기게 그 생명력을 이어온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할 터이다. 그러나 출범 당시의 협소한 의미의 지방문학을 보편적 지역문학에로 전환시키는 일, 유일무이한 여성문학회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페미니즘을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부단히 확장해야하는 문제는 【소요문학회】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로 남겨져 있는 듯 하다. 지방/ 중앙의 종속성은【소요문학회】 출범과 동시대에 이루어진 지방자치제도의 정치적 변화와 맞물리는 것이고, 희소성과 섬세한 감성적인 여성문학의 기반은 이미 1980년대부터 불어 닥치기 시작한 페미니즘의 일반화로 말미암아 방향을 틀어야하는 난제에 부딪쳤다는 이야기다. 부연해서 설명한다면 지방/ 중앙의 종속적 관계는 지역 대 지역이라는 대등한 관계로 격상되어야 하며, 【소요문학회】라는 여성 문학회의 존재근거는 건강한 생명력의 보존과 회귀라는 보다 큰 주제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말해서 【소요문학회】의 오늘은 여전히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IT의 급격한 발전과 교통망의 확충은 서울과 지방이라는 거리와, 정보 습득의 불균형을 일시에 해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소요문학회】에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왜냐하면 【소요문학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오늘날 한국문학이 떠안고 있는 병증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병증들이란 무엇일까? 세세하게 열거할 필요는 없겠으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 몇 가지를 꼽아본다면 첫째, 창작물의 유통과 소통을 둘러싼 등단제도의 폐해, 둘째, 문학의 다양한 조류를 섹트화하고 권력화하는 문단 지형의 왜곡, 작가정신이 결여된 문인의 양산 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소요문학회】의 발전을 위해서 짚어보아야 할 문제를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아마튜어리즘amatouerism과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문제

 

【소요문학회】는 등단자와 비 등단자의 구분 없이 일정 요건을 갖추기만 하면 활동이 가능한 모임이다. 그러나 등단자와 비등단자의 변별성이 쉽게 찾아지지는 않는다. 정량화 될 수 없는 것이 작품의 평가이기는 하지만 좀처럼 문제작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시인, 작가로의 입문 과정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처럼 작품집을 통해 시장에서 평가를 받는 기반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문단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 등단 登壇이라는 제도이고, 등단을 둘러싼 통로의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예술가로서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양산이라는 폐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등단이라는 제도는 필요악으로 작품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는 약간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삼 백종이 넘는 잡지들이 유통하고 있는 작품들은 소통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대중들에게 다가서기 전에 폐기되거나 잊혀지기 일쑤인 악순환을 거듭하면서도, 극소량의 자기만족과 과시에 머무르게 되면서 자기탈각의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작가정신이 무엇인가를 되내어야만 하는 것 인데, 과연 그런 치열한 작가정신을 벼루면서 창작에 임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2. 지역문학에 대한 투철한 의식의 문제

 

【소요문학회】은 동두천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모임이다. 거주의 이동이 자유롭고 노마드 nomad의 시대적 특성이 상식이 되어버린 오늘날에 있어서 한 지역의 특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치에 닿아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문학이 지역문화의 창달에 기여한다는 의의는 자못 심대한 것이다. 문학이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이 정서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더 큰 지역 단위에서의 소통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제【소요문학회】는 동두천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난 뛰어난 시인, 작가를 배출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년은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간 세월이 아니라 맷집을 키우고, 기둥을 튼튼히 하는 시간이었을 터. 회원 각자의 분발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방정부(동두천시)로부터 어느 정도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문학회가 어디 흔한가?( 지원이 충분한가의 여부를 떠나서) 그저 일 년에 문집 한 권 내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안일한 생각을 벗어나서 좋은 시인과 작가를【소요문학회】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기회를 대중(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가장 큰 책무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정의 지킴이로서, 직장인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소요문학회】가 동두천에 존재해야 하고 동두천의 자랑이 되는 점임을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이다.

 

3. 시인, 작가로서의 역량의 문제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소박한 아마튜어리즘의 탈피와 지역문학의 각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있다. 예술의 역사를 살펴볼 때 뛰어난 예술가는 타고난 재능을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천재성’은 세상을 뒤엎는 모반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더 먼 곳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러나 그런 ‘천재성’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예술가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겠다는 열망이 가득한 자이기에 학습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디자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시인, 작가로서의 열망은 가득하나, 문학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초적 지식과 연마를 게을리 한 채 개성과 편견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뒤늦게 늦깎이로 문학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흔하게 보이는 자기폐쇄성은 자기과시 내지 편협한 자기만족에 그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로서 도약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습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글을 잘 써야겠다는 기능적 욕구는 “문학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는 결연한 문학의 위의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객관적이고 일관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문학 교육자에게 체계적인 수업을 받는다는 것은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는 아니다. 단기적이고 일회적인 초빙이 아니라 적어도 2, 3년간에 걸친 문학 수업은 문학을 바라보는 지평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시인, 작가로서의 역량을 키워주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 없이 입신을 꿈꾸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영감靈感으로 글을 쓰는 것은 분명하나 그 영감이란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영감의 욕구를 잊지 않고 갈망하는데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4. 『소요문학』 19집 2013

 

『소요문학』19집은 작년에 비해 한 눈에 보아도 다양해지고 풍성해짐을 느낄 수 있다. 작품 수에서도 그렇고 오랜만에 ‘동화’ 작품이 게제 되었다는 점, 시 부문의 입상자를 내지 못했지만 다수의 수필 부분 입상자들의 글이 실림으로써 지난 한 해의 【소요문학회】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일일이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할 능력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몇몇의 인상에 대해 적기摘記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오다정과 이명숙의 산문은 필력의 문제를 떠나서 새로운 형식의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의 파격이 작품의 질을 반드시 상향시키지는 않는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시든, 수필이든 간에 하나의 작품은 구조적 논리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뼈대가 갖추어지지 않은 感想은 작품의 완성도를 현저히 약화시킨다는 점을 유의한다면 앞으로 좋은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갖게 한다.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소요문학회】회원 여러분께 그리스 소설가 나코스 카쟌챠키스의 묘비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인생이란 생멸의 과정을 회피할 수 없다는 허무를 인식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과의 대면을 일상화하는데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그에게 자유는 삶의 역동성과 환희를 부여하는데서 작가의 여정을 마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문학은 이와 같이 개인이 겪게 되는 존재에 대한 회의와 질문을 통해서 감상 感想에 머무르지 않고 사색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문학은 더 외로워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