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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드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0. 3. 11:30

시인은 번역자 .. 서로의 심장박동에 취해라

프랑스 대표하는 시인 미셸 드기
'세계작가페스티벌'서 고은과 대담

 

중앙일보 | 정재숙 | 입력 2013.10.03 00:35 | 수정 2013.10.03 08:48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진한 우정을 쌓아온 미셸 드기(왼쪽)와 고은 시인은 시의 미래를 낙관했다. 그들은 `취해라(에니브레 부·Enivrez-vous)`라는 건배사로 서로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학의 거장, 고은(80)과 미셸 드기(83)가 만났다. 시인들 우정의 무대인 '2013 세계작가페스티벌'에서 오랜 만에 조우했다.

 단국대·수원시 공동주최, 중앙일보 후원으로 4일까지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 좌장 역할을 맡은 고은 시인은 멀리서 온 벗을 포옹으로 맞으며 "유난히 교감이 깊은 마음 속의 형제 시인이다"라고 애정을 표했다. 프랑스의 문예지 '포에지'의 편집장인 미셸 드기는 지난해 한국시 특집호를 발행하는 등 한국시에 대한 애정이 깊다. 프랑스판 『만인보』의 서문을 쓰면서 "몇 천의 인생을 시 속에 새겨서 보여주는 에크프라시스(ekphrasis·그림을 묘사한 글)"라고 평했다.

 1일 수원 라마다 호텔에서 무릎을 맞댄 두 사람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인생과 문학을 종횡무진 논했다.

전쟁 경험한 한국, 시 속에 깊은 심연이

 ▶고은(이하 고)=한국과 프랑스는 이제 비신화적인 거리로 가까워졌다. 앞으로 시인들이 서로의 나라에 체류하는, 그래서 삶을 바꾸는 새로운 시의 체험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프랑스 시인도 태백산맥에서 살 수 있다. 민족, 조국이란 개념의 유연화다.

 ▶미셸 드기(이하 드기)=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포에지'에 한국시 특집을 할 때 시인과 번역가와 편집자들 간에 우정의 고리를 만들었다. 이 관계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돼야 한다.

 ▶고=미셸 드기는 빅토르 위고, 폴 발레리란 이름과 나란한 그런 시인이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난해의 세계인데, 그 문이 닫혀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 나는 술이 한잔 들어가면 항상 그의 이름 앞에 '위대한 시인'이라고 붙인다. (웃음)

  ▶드기=한국시에는 심연이 있다. 『만인보』는 여러 경험을 직감적으로 빠르게 드러내고 있어 매력적이다. 고은 선생은 승려 생활을 했고 전쟁도 겪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엄청난 차이가 가장 큰 심연을 만든다.

 ▶고=나의 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면 이미 모국어의 시가 아니다. 번역엔 숙명적 한계가 있다. 다만 양쪽의 시가 더 잘 만나기 위한 방법은 있다. 동아시아의 시가 서구에 갈 때는 언어에 한 발 앞서야 한다. 거꾸로 서구시가 동아시아에 올 때는 침묵에 한 발 앞서야 한다.

꿈꾸는 것보다 진실 드러내는 게 중요

 ▶드기=시가 번역되면 원래 언어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역설적인 것은 모든 시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모든 창조물은 본질적으로 번역이다. 보이지 않는 원전이 있는데 그 원전을 번역하는 것이 최초의 작품이다. 난 늘 번역자가 되고 싶다. 세계를, 우주의 진실을, 그 비밀을 시를 통해 옮기고 싶다.

 ▶드기=이번 페스티벌의 주제는 '세계의 시인들, 시대의 전환을 꿈꾸다'다. 다른 시대, 다른 세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수천 년 동안 해왔다. 이제는 그 질문, 꿈꾸기부터 멈춰야 한다.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종교적인 시대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일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덧붙여서 '21세기는 시적인 세계가 되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세계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고은 선생의 말처럼 꿈꾸는 것보다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고='꿈꾸지 않겠다'는 것은 대단히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제와 어제 반복하는 꿈은 필요 없다는 얘기다. 시인은 그런 꿈을 거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시인은 '꿈의 생물'이다.

 ▶드기=시는 각각의 행과 동사들이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안에서 보편성을 발견해야 한다. 모호한 보편성이 아니라 정확하고 구체적인 것을 통해 보편성을 찾아야 한다. 또 중요한 개념이 'ecology(생태학)'이다. 'ecolo'는 그리스어로 머문다는 뜻이다. 머무는 장소, '집'이란 어떤 개념인가 고민해야 한다.

쓰레기 같은 언어의 정글 정화시켜야

 ▶고=시인 몇이 모여서 지구상의 절대 명제를 좌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허한 자세로 서로의 입장을 나누는 것이다. 새로운 우정이 결집되면 이것이 힘이 되어 21세기라는 '범람의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다. 우리는 정보와 지식, 언어가 쓰레기처럼 양산되는 '정글'에 빠져있다. 시인의 역할은 이런 언어의 정글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시인은 타인의 가슴속에 들어가서 타인의 심장박동과 함께 그 몸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

 ▶드기=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오래 자주 만나야 한다. 불멸의 존재는 아니지만.

 ▶고=보르도에서 와인을 마시고, 서울에서 또 소주를 마시자.

 ▶드기=그러면 내가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중 한 구절 '에니브레 부(Enivrez-vous·취해라)'로 건배사를 하겠다.

 ▶고=땅에 술을 부으면 지신(地神)이 취해서 춤을 춘다. 그게 흥이다. 우리 둘은 지신으로부터 흥꾼으로 발령을 받았다. (웃음)

글=정재숙·김효은 기자 < hyoeunjoongang.co.kr >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은=1933년 전북 옥구 출생. 58년 '현대문학'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입산』 『조국의 별』 『만인보』 등.

◆미셸 드기=1930년 프랑스 파리 출생. '포에지(Po & sie)' 편집장. 파리8대학 교수. 『생태』 『마음이 아니었던가』 등 저서 40여 권이 세계 각국 언어로 출판.

정재숙.김효은.권혁재 기자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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