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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이광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24. 21:06

 

추사가 촌스럽다고 했던 글씨체, 지금 주목받는 이유는

오마이뉴스 | 입력 2013.08.24 20:13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추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추사(1786-1856)가 그토록 비난하였던 원교 이광사(1705-1777)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남도 절집 곳곳에 이광사의 흔적이 있다. 대흥사를 비롯하여 내소사 대웅전, 선운사 천왕문과 정와(靜窩), 지리산천은사 일주문, 백련사 대웅전과 만경루. 모두 원교의 글씨다. 당대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음을 반증한다. 지금 두륜산대흥사(대둔사)로 그를 만나러 가고 있다.

절집 문(門)에 달고 있는 이광사의 글씨들



▲ 대흥사 해탈문이광사 글씨로 글씨가 미끈하면서 힘차다

ⓒ 김정봉

대흥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이광사'는 해탈문(解脫門)이다. 대흥사 겉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탈문' 편액과 함께 빨려 들어오는 진초록 대흥사는 대형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글씨는 고불고불 미끈하고 획 끝이 거침없고 힘차다.

대흥사 해탈문과 도갑사 해탈문 글씨는 똑같다. 도갑사 해탈문은 대흥사 글씨를 탁본·모각한 것이다. 2003년 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 글씨를 달고 있다가 그 후 이광사 글씨로 교체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다시 교체할 지 두고 볼일이다.

무릇 글씨는 정신과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신기(神氣)가 밝지 못하여 후대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글씨는 기분을 흐리게 한다. 누구의 글씨가 그런 지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원교도 이에 대해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부족하여 문기(文氣)가 죽은 사람의 글씨는 재주와 필력이 있어도 한낱 글씨장이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 지리산천은사 편액이광사의 글씨로 불의 기운을 다스려야한다며 물 흐르듯 수체(水體)로 썼다(2008년 촬영)

ⓒ 김정봉

선운사 천왕문과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일주문 편액도 원교 글씨다. 지리산천은사 글씨는 걸작으로 뽑힌다. 물의 기운으로 불을 다스려야한다며 수체(水體)로 물 흐르듯 써내려간 '지리산천은사' 글씨. 원교 글씨의 효험을 본 것일까? 그 후 샘(泉)이 숨었다(隱)는 천은사는 물줄기가 이어지고 화재가 나지 않았다 한다.

이광사의 절집 누각 글씨들



▲ 대흥사 침계루 편액이광사 글씨로 물 흐르듯 유려하다

ⓒ 김정봉

두륜산에서 시작한 금당천 물은 대흥사를 남북으로 가른다. 북원(北苑)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안마당 앞에 계곡을 베개 삼아 누워있다는 침계루(枕溪樓)가 있다. 침계루도 이광사의 글씨다. 물 흐르듯 유려하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글씨다.



▲ 백련사 만경루 편액이광사 글씨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으로 쓴 글씨처럼 꿈틀댄다

ⓒ 김정봉

강진 백련사 만경루(萬景樓)도 원교의 글씨다. 해서체로 쓴 정자이나 자세히 보면 획 하나하나가 꿈틀대고 있다.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노여움으로 쓴 글씨 같다. 다산(茶山)도 '꿈틀대는 용의 기세처럼 헌걸차다'고 하였다.

원교와 추사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끝난 곳, 대웅전 안마당

침계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안마당. 원교와 추사의 갈등이 노골화된 곳이자, 마침표를 찍은 곳이다. 대웅보전은 원교글씨고 대웅보전 서쪽 백설당(白雪堂)에 붙어있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추사글씨다. 원교와 추사가 함께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둘이서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이광사 글씨로 곧고 굳어서 편액 널빤지를 뚫을 기세다

ⓒ 김정봉

추사가 제주도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러 원교의 글씨를 타박하며 비웃기를 "사람들이 저 글씨를 흉내 내는 바람에 국제적인 감각을 잃어버렸다. 조선의 글씨를 망친게 이광사인데 어찌 이광사의 글씨를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악평을 하였다.

원교에 대한 추사의 비난은 이곳 대흥사에서 정점을 찍었을 뿐,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니다. 추사의 < 완당집 > 이나 원교의 < 필결 > 에 추사가 쓴 후기(後記) 등 여러 곳에서 추사는 원교를 한결같이 비난하고 있다. 일관된 소신발언이었다.

당대 엘리트 중에 엘리트, 소위 잘 나가던 추사의 눈에는 개성이 강하고 향토색 짙은 조선의 글씨, 원교체는 한낱 '촌스러운' 글씨에 불과하였다. 더불어 원교는 소론출신, 추사는 노론 출신이었던 점도 이광사를 비난하며 평가 절하한 이유 중의 하나다. 이런 추사의 평가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원교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절하되는 계기가 된다.

유홍준 교수는 "대웅전 편액은 획이 바짝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갔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고 무량수각은 획이 기름지고 살지고 구성의 임의로운 변화가 두드러져 있다"고 평가했다.

무량수각 글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의에게는 차(茶)투정, 부인에게는 반찬투정 하는 어린애 같은 투정이 죽을 때까지 남아 어린애가 쓴 것 같은 '판전(板殿)'글씨를 남겼는지 모르지만 유배생활 전후로 인생관이 바뀐 것은 분명하다. 무량수각 글씨가 이를 대변한다. 귀양살이 전에 쓴 대흥사 무량수각은 우둥퉁하고 기름진 반면 귀양살이 할 때 예산 화암사에 써준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어느 정도 빠진 정제된 글씨다. 9년의 귀양살이로 인생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 대흥사 무량수각 편액추사의 글씨로 귀양 가기 전에 쓴 글씨다. 획이 굵고 기름지다

ⓒ 김정봉



▲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편액추사의 글씨로 귀양살이 할 때 쓴 글씨다. 기름기가 빠져있다(2011년 제주도 추사유배지에서 촬영)

ⓒ 김정봉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도 이광사가 쓴 글씨다. '대웅'과 '보전'을 세로로 쓰고 두 개의 판을 나란히 붙였다.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이 있다. 우울하고 불편한 심기, 울분을 붓끝에 실어 떨치듯 삐딱하다. 이 글씨야말로 원교의 인생역경을 그대로 드러낸 듯싶다.



▲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이광사 글씨로 우울하고 불편한 심기, 울분을 붓끝에 실어 떨치듯 삐딱하다. 이광사 인생역경이 가장 잘 드러난 글씨다

ⓒ 김정봉

북원을 떠나 천불전(千佛殿)으로 향했다. 천불전의 문은 가허루(駕虛樓). 둥글게 휘어진 문턱도 아름답지만 가허루의 글씨 또한 멋지다. 창암 이삼만(1770-1845)의 글씨다. 어렸을 적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다 하고 당대 추사와 더불어 3대명필로 전하나 추사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다. 원교는 사후에 추사의 그늘에 가렸다면 청암은 생전에 추사에 가린 서예인생이었다.



▲ 대흥사 가허루 편액창암 이삼만 글씨로 이광사는 사후에, 창암은 생전에 추사의 그늘에 가린 서예인생이었다

ⓒ 김정봉

천불전 또한 이광사 글씨다. 천불전 문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꽃문이고 후원은 꽃담으로 꾸며져, 천불전은 꽃으로 둘러싸인 전각이라 하겠다. 천불전 꽃담 너머에는 요사채로 쓰이는 일로향실(一爐香室)이 있는데 그 편액은 유배 중에 초의에게 써 준 추사의 글씨다. 이래저래 추사와 원교의 연은 담하나 사이 두고 이어지고 있다.



대흥사 천불전 편액이광사 글씨로 천불전 꽃담 너머에 일로향실(一爐香室) 추사의 글씨가 걸려있다. 추사와 원교는 담하나 사이로 연이 이어지고 있다

ⓒ 김정봉

지금 우리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발길은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으로 이어진다. 대흥사에서 800m떨어진 산중턱에 있다. 초의는 이광사와 추사, 다산과 추사·백련사 혜장스님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일지암은 18세기 남도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메카인 셈이다. 이런 곳에서는 인문적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 일지암 정경초의가 머물렀던 일지암 툇마루에 앉으면 인문적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 김정봉

일지암 툇마루에 앉아 동갑내기, 절친 관계인 초의와 추사의 만남을 상상해 본다. 초의 앞 에 추사가 섰다.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떼라고 한 기고만장하고 투정부리는 추사의 얼굴과 귀양살이 끝에 '사람이 돼서' 돌아와 원교 편액을 다시 걸어달라는 기름기 빠진 얼굴이 오버랩 된다.

원교의 글씨를 보면 천은사편액은 물 흐르듯 하고 대흥사대웅전 편액은 용의 기상과 골기가 느껴지며 백련사 만경루와 대웅전은 고물고물 꿈틀대고 우울한 듯 비딱하다. 한마디로 얘기하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원교의 인생역경에 답이 있다. 노론이 득세하는 시기에 소론출신으로 23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당시 금기시되던 양명학에 몰두하였고 역사의 아웃사이더로 기록되는 강화학파였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였다. 추사도 귀양살이 끝에 답을 찾았다. 추사의 눈에 원교의 인생역경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광사의 인생을 알면 그의 글씨가 보인다.

당대에 '촌스럽고 글자꼴(字形)이 가증스럽고 속기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타박 받던 그의 글씨가 지금의 잣대로도 과연 그러한가? 이광사의 글씨는 당대에 중국에는 없었던 개성이 넘치고 남도의 향토색이 짙게 밴 조선의 글씨였다. 양명학자, 역사의 아웃사이더 강화학파 서예가 이광사, 지금 그는 더 이상 역사의 마이너리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8월 4일~ 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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