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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터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7. 14. 00:16

 

9명 희생 난공사 옥천터널 … '고속도 은퇴' 뒤 김치 창고 변신

[중앙일보] 입력 2013.07.06 00:27 / 수정 2013.07.06 01:06

경부고속도 43년 … 문화재 등재 추진 옥천 구간 4㎞
1970년 완공 대전~대구 구간 일부
구불구불한 길, 직선도로로 대체

 

1969년 국내 최초의 3단 아치형 구조로 건설한 대전육교의 현재 모습(사진 왼쪽). 최대 난공사 현장이었던 옥천터널은 상행선을 폐쇄하고 하행선만 지방도로로 사용 중이다(가운데).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 숨진 77명의 명단과 출신 지역을 새겨 놓은 순직자 위령탑(오른쪽). [프리랜서 김성태]

“여기 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야말로 피와 땀의 결정이니 무릇 2년5개월 동안 연인원 890만 명이 땀을 흘렸고 그중에서도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신 이가 77명이었다.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부근에 세워진 순직자 위령탑에 노산(鷺山) 이은상(1903~82) 시인이 남긴 글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오는 7일로 개통 43주년을 맞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배어 있는, 초고속 발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근대화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천 리 길이 넘는 구간(428㎞)에서 2년5개월간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부터 밤늦게까지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며 그야말로 속도전으로 국가의 기틀을 새로 놓는 도로 공사를 벌이는 동안 모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개통식이 열리던 1970년 7월 7일에는 박정희(1917~79) 전 대통령이 현장을 찾아 위령탑 제막식을 거행하며 희생자의 넋을 기렸다. 해마다 7월 초가 되면 순직자 위령탑에선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에서 희생된 77명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가 열린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7월 7일에는 77인을 기억하라

 대한민국 현대사는 경부고속도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사람·물자·정보의 이동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획기적으로 빨라졌다. 자동차 산업의 비약적 발전은 말할 것도 없다. 동·남해안 산업단지에서 생산한 제품과 자재는 밤새워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수도권으로 운반됐다. 수도권에 위치한 공장들이 완제품을 만들어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던 통로도 이곳이었다.

 총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으로 대략 1㎞당 1억원꼴. 시내버스 요금이 10원이던 시절이다. 70년 당시 255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12년 2만2708달러로 42년 새 약 90배 뛰어올랐다. 77명의 희생과 890만 명의 땀방울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생생한 입증 자료다.

 새로운 문명은 빛과 그림자를 동반했다. 경부고속도로 이후 국토의 지형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사람과 물자가 서울로 집중되면서 수도권의 과밀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국토의 불균형 발전에 따른 수도권과 비수도권, 영남과 호남의 갈등도 깊어졌다. 70년 543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76년 725만 명, 83년 920만 명, 92년 1097만 명으로 급증했다. 수도권으로 인구집중은 2011년에서야 겨우 멈췄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소식을 당시 중앙일보는 1면 머리기사로 전했다. 본지는 사설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자금으로 세계에서 가장 빨리 건설했으며 동양에서 가장 긴 도로라는 점에서도 우리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도시·지방 간 격차의 구체적인 확인은 지방을 자극하고 나아가서 지역개발의 촉진제로서 작용할 수도 있으나 반대로 그것이 위화감과 좌절감을 일으켜 근로의식을 저하시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며 고속도로 개통이 가져다 줄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적했다. <본지 1970년 7월 7일자 1, 2면>

 경부고속도로 구간 중 충북 옥천군 일대가 이르면 올해 안에 문화재로 등록될 전망이다. 옥천군 동이면 조령리의 순직자 위령탑부터 청성면 묘금리의 옥천터널(개통 당시는 당재터널)까지 약 4㎞ 구간이 대상이다. 이곳은 2003년 구불구불한 길을 반듯하게 펴는 선형개량 공사를 마친 뒤 더 이상 고속도로로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도로공사는 조만간 해당 구간의 도로·다리·터널 같은 시설물에 대해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재 등록 신청서를 낼 계획이다.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따르면 근대문화재 등록은 원칙적으로 만든 지 50년 이상 된 것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경우엔 예외를 인정한다. 성현경 도로공사 문화재조사부장은 “경부고속도로는 국토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고, 그중에서도 옥천 구간은 개통 당시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공사 난이도 따라 4단계로 나눠 착공

 

옛 경부고속도로 충북 옥천 구간의 당재육교는 길다란 아치 모양의 곡선이 특징이다. 전체 길이는 170m, 가운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는 75m로 1970년 개통 당시 국내에서 가장 긴 아치형 다리였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달 말 성 부장을 비롯한 도로공사 문화재조사팀과 함께 옛 경부고속도로 옥천 구간을 찾아갔다. 문화재 등록이 추진되는 4㎞ 도로를 자세히 살펴보니 곳곳에 파이고 깎인 부분이 눈에 띄었다. 4차로 중 절반은 지방도로로 계속 쓰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차량이 다니지 않는 폐도 상태였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현장의 난이도에 따라 4단계로 나눠서 진행됐다. 1단계인 서울~수원 구간(45.5㎞)은 가장 먼저 68년 2월 1일 공사에 들어갔다.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4단계 대전~대구 구간(152.8㎞)은 노선 확정도 어렵고 다리와 터널의 설계도 복잡해 1년 가까이 늦은 69년 1월 14일에야 기공식을 했다. 이 중 옥천 구간은 현대건설이 공사를 맡았다.

 순직자 위령탑에서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하고 조금 더 가다 보니 금강4교(길이 331m, 폭 19.9m)가 나왔다. 대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는 구간에서 가장 긴 다리다. 43년 전엔 국내의 토목공사 기술력이 부족한 탓에 다리 상판을 받치는 거더(girder: 건설 구조물을 떠받치는 보)를 호주에서 조립해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상판 밑에는 사람이 걸어서 금강을 건널 수 있도록 ‘흔들 다리’를 설치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로공사 영동지사의 김동영 차장은 “70년대만 해도 자동차가 많지 않아 걸어서 강을 건너는 사람이 많았다”며 “지역 주민의 편의를 고려하며 공사를 벌인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옥천 구간의 두 번째 다리인 당재육교(길이 170m, 폭 19.9m)에선 길다란 아치 모양의 곡선이 장관을 이뤘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는 75m나 됐고 그 사이를 아치 모양으로 휘어진 구조물이 받치고 있었다. 성 부장은 “건설 당시로선 국내 최고의 기술로 설계한 것”이라며 “한때 국내에서 가장 긴 아치형 다리였고 토목·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곳”이라고 말했다. 공사기간이 1년 정도로 짧다 보니 장마철에도 작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천 바닥에 어렵게 받침대를 세웠다가 11차례나 홍수에 떠내려갔을 정도로 난공사였다고 한다.

 옥천터널의 아치형 구조물 안으로 들어서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도 여기선 맥을 못 추고 뒤로 물러나는 듯했다. 경부고속도로 전체 구간에서 ‘사람 잡는’ 난공사 현장으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부스러지기 쉬운 퇴적암층이라 터널을 뚫기 위해 발파하면 금세 흙더미가 쏟아져 내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13번이나 낙반사고가 발생해 경부고속도로의 단일 현장으로는 가장 많은 9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엔 기술 문제로 428㎞ 전 구간에서 6개 터널밖에 뚫지 못했다. 옥천터널은 그중 가장 긴 터널이었다. 기술력 부족으로 상행선(585m)과 하행선(550m)을 따로 뚫어야 했던 데다 양쪽 터널의 길이가 다른 ‘짝짝이 터널’이어서 더욱 작업이 어려웠다. 출처불명의 느티나무 전설도 작업을 방해했다. 공사 시작부터 사고가 잇따르자 작업자들 사이에선 터널 입구에 버티고 선 느티나무 신령이 노했다는 말이 돌았다. 나무를 베어버린 공병단 장교까지 사고를 당하자 겁먹고 도망치는 작업자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김 차장은 “옥천터널 공사의 불리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공사 당시에는 산간 오지여서 변변한 진입로가 없었던 것도 큰 문제였다”며 “이 때문에 중장비의 투입이나 자재 운반에 애로가 많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작업이 힘들고 어려워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개통식 일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맞춰야 했다. 당시 이한림 건설부 장관은 “단 하루라도 개통식 날짜가 늦어지면 회사 문을 닫으라”며 현대건설 관계자들을 닦달했다. 공사 막판에는 정주영 현대 회장이 현장에 살다시피 하며 공사를 총지휘했다. 작업자들은 신발을 벗을 틈이 없어 발가락이 붙어 버렸고 소변 볼 시간조차 아까워 바지에 그냥 싸버렸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공사를 마친 것은 70년 6월 27일이었지만 개통식이 열렸던 7월 7일까지도 옥천터널 현장은 마무리 정리 작업에 분주했다.

 현재 하행선 터널에선 차량이 다니고 있지만 상행선 터널은 도로의 기능을 폐지하고 한 식품업체가 저온에서 김치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쓰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대전시 대덕구 비래동의 대전육교(길이 201m, 폭 21.4m)였다. 성 부장은 “대전육교는 옥천 구간에 속하진 않지만 토목·건축사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라 함께 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아주토건이 69년 10월 준공한 이 다리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높은 다리(35m)였고, 국내 최초로 3단 아치형 받침 구조물을 시공한 곳이다. 현재 통행이 제한되고 있는 다리 위엔 누군가 몰래 흙더미를 쏟아붓고 불법 농경지를 조성한 상태다. 다리 아래엔 인근의 가양비래공원을 이용하는 대전시민들을 위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성 부장은 “기존에 교통 관련 문화재로 등록된 50여 종의 철도 시설물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옛 경부고속도로 구간은 순수 국내 기술로 건설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며 “후손들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전하는 살아 있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옥천·대전=주정완 기자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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