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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한국인의 무화 DNA 5 자연스러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1. 9. 16:05

 

담장 밖 풍경까지 감싸 안는다… 그것이 한국 건축이다

  • 담양=허윤희 기자
  • 입력 : 2012.11.08 03:03

    [5·끝] [자연스러움] 천득염 전남대 건축학부 교수 유이화 ITM건축사무소 대표
    천득염 교수 - 요즘 건축, 풍토성 없고 천박… 특히 관청 건물은 심각하죠
    유이화 건축가 - '내 건물 튀게'는 잘못된 생각… 세월 흘러도 풍경처럼 스며야

    하늘 위로 쭉쭉 뻗은 대나무숲을 지나니 별세계다. 어디서부터 소쇄원이 시작되고 어디까지가 정원의 영역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 최고의 원림(園林)'이라는 전남 담양 소쇄원(瀟灑園·명승 제40호)은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주변 경관과 일치돼 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정원의 구성물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늦가을 오후, 소쇄원을 찾은 유이화(38) 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와 천득염(59) 전남대 건축학부 교수가 한국적 건축미학을 두고 얘기를 나눴다. 천 교수는 '한국의 명원 소쇄원'의 저자이자 자비를 들여 소쇄원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건축사학자. 유 대표는 재일동포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고(故) 이타미 준(伊丹潤·한국명 유동룡)의 맏딸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주관으로 이뤄진 행사에서 두 사람은 우리 고건축의 유전자인 '자연스러움'에 대해 공감했다.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한 배치

    천득염
    소쇄원은 1530년경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조성한 별서(別墅) 원림입니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해 은거 생활을 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죠.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현실 정치의 무상함을 깨닫고 고향에 은둔하게 됩니다. 그러곤 계곡의 자연 속에 소쇄원을 꾸몄지요.

    유이화 우리 선비들은 정치적 허무주의 속에서도 멋을 놓지 않았다고 봐야겠네요. 아, 여기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물소리를 들었겠구나…. 한국적인 것이 응집돼 있는 공간 같아요.

    김인후, 송순, 정철,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풍광을 관상하고 사유와 만남의 지평을 넓혔지요. 소쇄원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상향, 도가적인 무위자연의 삶을 자연 속 정원으로 구현한 것이죠.

    직접 와본 건 처음인데 디자인이나 구성에서 단연 으뜸입니다. 어디가 입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획이 나뉘어 있지 않고, 공간마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게 놀라워요.

    큰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 그사이를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 몇 단의 축대와 단아한 건물….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느끼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뒷산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나무숲, 각종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지요. 배경이 되는 게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것은 최소한이죠.

    전남 담양 소쇄원에서 천득염 교수가 유이화 대표에게 소쇄원의 멋과 정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담양=김영근 기자
    ◇겸허하게 낮춰서 자연의 일부로

    건축물을 조성하는 데도 한·중·일이 각각 달라요. 중국은 대륙적 기질 그대로 장대하면서도 인공적입니다. 섬을 통째로 옮기거나 호수를 파버리는 식이죠. 일본은 깔끔하고 정제됐고 직선적이에요. 반면 우리는 지붕선이나 기와, 기둥이 대부분 완만한 곡선이죠. 건물의 배치·크기·축·재료가 모두 '휴먼 스케일(human scale)'입니다. 구릉이나 지형을 이용해 자연스런 형태로 이뤄졌고 안과 밖이 어울리게 주변을 배려했죠.

    일본은 '담 안의 것만 내 것'이란 게 확실해요. 담 안에 완벽한 세계를 철저히 계산해서 만들어요. 우리는 담 안쪽뿐 아니라 '저 밖에 있는 게 모두 내 세상이다' 하잖아요. 원경까지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돌 하나, 나무 부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죠.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존중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요.

    휴먼 스케일이라는 것 자체가 겸허하게 자신을 낮춰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거죠. 기질적으로도 한국인은 자연스러울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가도 짜이지 않은 틀 안에서 적응을 잘하고, 일본인은 매뉴얼을 중시하죠.

    회사에 일본인과 한국인 직원이 섞여 있는데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 '한국인 상사+일본인 직원'이에요. 현장에 가보면 도면대로 안된 게 많아요. 한국인 직원은 임기응변과 융통성이 뛰어나서 현장 판단을 잘하는데, 도면을 흘리고 와요. 거꾸로 일본인들은 꼼꼼한 반면 현장에서 판단을 못해요(웃음).

    유이화의 아버지인‘물과 빛의 건축가’이타미 준이 설계한 제주도의 포도호텔. 제주의 오름과 초가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을 흩어진 포도송이처럼 표현했다. /ITM유이화건축사무소 제공
    ◇고건축 정신의 온기 되살려야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건축 현장을 돌아다녔어요. 늘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가지고 건축 행위를 해야 한다"고 얘기하셨죠. 자연을 최대한 살린 건축,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건축을 추구하셨고, 제게도 그 정신을 물려주셨습니다. 재일동포인 아버지는 끊임없이 한국을 오가며 궁궐과 서원을 연구했고 전통 가옥의 도면을 직접 그릴 정도였죠.

    요즘 건축물들이 자연미의 고건축 정신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지역성이나 풍토성이 전혀 없이 천박한 건물이 많아요. 관청 건물이 더 심하고요.

    현대 건축의 큰 문제는 "내 건물이 튀어야 된다"입니다. 전통 건축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일부가 돼 하나의 풍경이 되는데, 요즘은 '시각적 폭력'을 행사하는 건축물이 많죠. '빌딩 숲 사이에서 작업할 때는 튀지 않는 게 오히려 튀는 것'이라는 게 제 건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