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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고백이 건네주는 따뜻한 위로/최윤경의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9. 12. 00:43

 

 

 

 

 

 

跋文 최운경의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

 

쓸쓸한 고백이 건네주는 따뜻한 위로

 

나호열 (시인)

 

며칠 전 저녁때의 일이다. 저 멀리 병원의 어두운 등 너머에서 얼굴을 내민 반달이 둥싯 떠오르더니 어둠에 묻혀 사라져버린 해의 행로를 따라 터벅터벅 서쪽 하늘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주는 향기 없는 눈부심 때문에 어여쁜 아낙네의 속살 같은 은은한 달빛은 한 여름 밤의 열기 속에서도 차갑게 식어가는 듯 하였고 이제 탱글탱글한 보름달로 속이 꽉 찰 저 단내 나는 달빛은 이 도시의 그 누구에게도 꿈과 낭만의 결정체로 보이지는 않을 듯 싶었다. 문득, 그 누구도 우러러 보아주지 않는 저 달과 시인의 운명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부딪치는 질문은 이러하리라.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이 세상에는 시인이면서 시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를 쓰는 사람도 많다. 이 말은 허울과 같은 등단제도를 통해 시인의 자격을 얻었으나 허세와 진술을 한사코 시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심금을 울리는 언어의 미학을 완성하는 장삼이사 張三李四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 까닭은 시를 추동하게 하는 시심 詩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태도에 있다고 보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심은 시인을 둘러싼 일체의 외부 세계와 현상에 연민을 느낄 때 촉발되는 것이다. 이 촉발된 연민이 항구한 미적인 감동으로 연계될 때만이 시의 얼개가 갖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상 시인은 「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의 발생 원인인 시심이라는 것도 오직 수동적 상태만으로 보면 본래가 지극히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으로서 오직 그것만으로는 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에다 능동적이고 지적인 활동이 따라야 비로소 표현의 세계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앞에서 말했듯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이란 스스로가 질서를 지어서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독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발동시켜 그 자연발생적 감동과 감흥을 어떻게 표현하여 정착시키느냐 하는 방법과 기술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시의 어려운 작업적 측면으로서, 여기서 다시 폴 발레리의 말을 빌면 〈훌륭한 시란 뼈를 저미는 고통이 작업에서 빚어지고, 예지(叡知ㅡ여기서는 작가의 자질의 뛰어남을 가리킴)와 끊임없는 노력의 기념비요, 의지와 분석의 소산〉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시를 쓰기 위한 단초인 시심의 명확한 인식이 부족하게 될 때 ‘뼈를 저미는 고통’이 보이지 않는(삶에 대한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는) 사이비 시가 잡초처럼 기생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해도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시 쓰는 존재(시인)의 확인이라는 명제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화 文字化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통을 간구하는 행위이며 타자 他者(독자)를 통한 시인의 존재 증명이기 때문이다. 저 무량한 달빛이 가로등 하나 보다 효용 가치가 없다고 보일지라도 그 달빛은 온갖 생명이 잉태되고 죽어가는 숲을 비추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벗이 되어 주듯이 누군가에게 달빛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야말로 시인의 존재 이유를 합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하기에 이름을 얻지 못해도 음지에서 시심을 가다듬는 (十年寒窓無人間)이에게 시인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글 쓰는 자의 존재 확인이라는 답이 미진하다면 한 마디 덧붙여도 좋겠다. 시 詩 라는 독백 행위를 통한 자기 치유의 과정!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는 『햇살을 부르다』(2006년 간행)에 이은 최윤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시인으로서의 연륜이 쌓여간다는 것은 이미 형성된 시관(주관)을 공고히 하는 일이거나 아니면 자기 갱신을 꿈꾸는 탈바꿈의 과정일 것이므로 시집 단위로 시를 읽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최윤경의 첫 번째 시집 『햇살을 부르다』와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사이에는 시인의 세계관의 변이와 수사법의 숙련과 같은 변모가 드러나 있을까?

 

부정을 넘어서서 긍정의 힘을 얻다

 

시인 최윤경은 직업을 가진 생활인으로서, 주부로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직장과 가정을 오가면서 부딪치는 상처와 회한이 어찌 없겠느냐마는 여려서 쓰러질 듯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은 강인함이 이 시인에게는 있다. 알다시피 시인의 일터는 병원이다. 삶의 파노라마가 집약되어 있는 곳, 깊은 밤에도 불이 꺼지는 법이 없는 병원은 희노애락이 겹쳐진 한 장의 그림과도 같다. 육신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새 생명의 탄생이 있는가 하면 다 타버린 촛불같이 스러져가는 죽음도 있다. 이와 같이 압축된 희노애락의 현장에서는 연민과 사소한 감상 感傷은 허용되지 않는다. 강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타자화 他者化되는 희노애락의 현장에서 로봇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못 견디는 일이 될 것이고 그럴 때 이 세상은 환자로 가득한 거대한 병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지나간 시간을 껴안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 둘

갈등과 걸음이 맞부딪혀

허공에 떠도는 것

구름 위를 걸어가는

위태로움 같은 하루가

허황된 꿈들이 기어 다닌다

잡아서 밟아 버리면 될

벌레도 아닌 것이

머릿속에 들어와 버티고 앉았다

빈 호두껍데기 같은 삶은

씻어내고 털어내고 몸부림쳐도

혼자이기를 허락하지 않았고

몸 부대끼며 부서지고 망가지다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앉은

쓸모없이 구겨진 종이 한 장

위로처럼 손에 쥐어준 이름

꿈.

시 -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 전문

 

타자화된 희노애락을 수긍해 버리면 우리의 삶은 한결 편해질 것 같지만 주어진 정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타자화된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평안을 얻는 대신 개인의 자아는 기계에 부림을 당하는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기생의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은 내가 나이기를 각성하는 중요한 기제가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텅 빔’과 ‘가득 참’은 모순 항 項이기도 하다. 무엇인가가 비워져야 그 빈 만큼 가득 차는 그 무엇이 생겨나는 것인데, 사실 그 ‘무엇’이라는 실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꿈일 것이다. 현실의 고통과 권태를 이기기 위해서는 꿈이 필요한 것인데, 사실은 그 꿈이야말로 고통과 권태와 세속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운다는 것은 꿈을 비운다는 것이고 가득 채운다는 것 또한 꿈을 가득 채우는 것이라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에 수록된 시들의 대부분은 이와 같이 모순되고 역설적인 삶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은 정조 情調는 이미 첫 시집 『햇살을 부르다』에서부터 연계된 것으로 시인의 새로운 인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주정적 主情的 어법은 예전보다 더욱 심화되어 냉소로 보일 지경에 이른 것 같기도 하다.

 

명절 이란다

제 멋대로 부려놓은 혀(舌)들이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댄다

폭설(暴雪)이  지붕을 누르고

말씀(說)이 무게를 떠받들고 있는 지금

영원한 우리들의 명절 이란다

말씀이 명절이 폭설이 혀가

한꺼번에 뒤죽박죽 되어가는 세상

썰 이란다

 

서로에게 발목 잡혀 한 생을 수놓아가는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음판의 승부

잡고 잡힌다는 것

다 그런 것이라고

얼음판을 가르며 썰매를 타는

아이웃음소리 쨍 하고 깨진다

 

세상은 이렇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나를 뒤 흔들어요

제발.

이제 그만 쉬게 해 주세요

채찍질을 멈추어 주세요

핑그르르 빈혈이 도졌어요

 

예문으로 든 ①은 시 「설」의 마지막 연으로,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담화를 나누는 풍경을 설이라는 동음이의어를 통해 희화하고 있다. 설 說은 혀舌로 오랜 만에 만나 안부를 묻고 가족애를 느껴야 하는 것인데 정월 초하루의 설은 폭설과 같은 위세와 오해와 풍문으로 벽을 세우고 해체되어가는 가족과 이해가 얽히고 설켜 뒤죽박죽되어가는 썰이 되어가는 아쉬움의 장이 되고 만다. 예문 ②는 「송어 낚시터에서」 중간 부분을 발췌한 것인데 겨울날 낚시터 풍경을 그리고 있다. 송어를 낚는 인간에게는 여가를 보내는 취미활동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낚이는 송어 입장에서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이것이 어디 낚시에 국한될 것인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 대기업들이 자행하고 있는 후안무치한 탐욕,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과 살육 또한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유추할 수 있는 고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③의 시는 -「팽이 」마지막 부분인데, 채찍에 맞아야 돌아갈 수 있는, 팽이를 객관적 상관물로 삼아 핍진한 일상에 몸 가누지 못하는 서민의 삶을 아프게 토로하고 있다. 시인의 현실인식이 이렇다고 해서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에 흥건히 배어있는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풍경이 단순히 현실에 대한 분노나 고발로 받아들인다면 곤란하다. 최윤경은 현실에 침몰 당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노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불만스럽게도 그는 여전히 현실의 제도에 충실하게 적응하고 있으며 불의에 항거하며 붉은 머리띠를 매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분노나 고발은 시인의 허언에 불과한 것인가?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암울하지만 그 암울을 통과해야만 삶의 평온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순전히 내적인 심리작용에서 기인한다. 시인의 세태에 대한 불만과 고발은 시인 자신에게 던지는 내향성을 지니고 있다.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에 드러난 모순되고 비극적인 정경의 묘사는 시인 자신에게 던지는 냉소에 다름 아니다.

 

힐링 healing의 의미와 실현의 과제

 

위에서 아래로

끝에서 위로 읽어도

같은 내용이 되는 시가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다

아무리 읽어도 가슴으로 끌려오는 글 이 없는

내 마음의 언어는 오늘도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밑바닥까지 긁어 백지위에 억지로 모아 붙인다

아무도 들여다 봐 주지 않는 빼곡한 글씨들

근본을 묻고 따져 보아도 묵묵부답 이다

끝에서 위로 처음부터 끝까지

길은 재개발 중이다

어설픈 천막에

찢어진 창문

시시하다

시詩

- 시 「시」전문

 

위의 시는 말 그대로 시인의 시의 정의이고, 자평 自評이다. 동어반복의 끊임없는 중얼거림,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언어의 집합, 스스로 시시하다고 읊조리면서도 시인은 왜 이런 시업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이런 시인의 작업을 서예 書藝와 서도書道의 예로 풀어보고자 한다. 붓글씨에 능숙한 사람을 일러 우리는 서예가라고 부른다. 작가 스스로 겸손하게 자칭하기도 한다. 예藝는 말 그대로 어느 일에 능숙한 경지를 일컫는다. 붓글씨를 쓰려면 좋은 먹물이 필요하고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먹을 갈아야 한다. 먹을 가는 일은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지루하게 먹을 가는 행위를 통해서 정신의 통일과 한 방울의 먹물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집념을 체득할 수 있다. 『장자 莊子』의 포정 庖丁과도 같이 무애에 경지에 이를 때 비로소 우리는 도道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단지 붓을 잘 놀리는 것이 아니라(藝) 그 붓의 운용 전에 행하여 할 과정을 통한, 정신의 빛나는 열락을 빚어낼 때의 경지(道).

최윤경의 시에 드러나는 현실인식은 더럽고 비루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더러움, 그 비루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러움과 비루함의 실체에 손이 가야만 한다. 그 현실에 침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침윤을 벗어나려는 부단한 닦음이 시쓰기의 과업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힐링 healing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패자부활이 용납되지 않는 현실에서 人本(휴머니티)에 대한 각성은 힐링의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에 도저하게 나타나는 비루한 현실로 말미암아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힐링(치유治癒)은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진다. 단절된 타자와의 소통, 이해, 자연과 종교에의 귀의..... 시인이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대상은 치유 그 자체는 아니다. 시인은 스스로 치유의 방법을 모색하고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를 가진 존재이다. 오로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언어로 밑바닥까지 긁어 백지위에 억지로 모아 붙여도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시를 쓰며 스스로 존재의 힐링을 행하는 존재가 시인이 아닐까?. 성공이니 실패이니,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세속의 평가는 시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을 지 모른다. 효용론적 입장에서 시는 독자를 계몽하고 실용성을 강조한다. 이런 강조는 자기가 딛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지나치게 미화하는 미몽에 빠지기 쉽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중요시하는 시법의 풍조가 만연한 세태에 비추어볼 때 최윤경 시인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그리 밝아보이지도, 순탄해 보이지도 않는다. 시인은 지나칠 만큼 가혹하게 자신에게 독백을 던진다. 그 독백은 세상의 더러움, 세상의 비루함을 통해서 시인 자신의 더러움, 나약함을 고백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던지는 독백이나 고백은 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윤경의 시는 최소한의 언어의 수식 修飾만이 가해지므로서 시의 중요한 요소인 애매성이 약화되는 약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째든 최윤경 시인에게 독백이나 고백은 자기치유의 의식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얼마든지 말은 꾸밀 수 있고 진정성을 담지 않아도 시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시인의 인격은 사라지고 일상을 관통하지 못하고 글과 행동이 분리되어버리는 불행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시는 인仁 에 이르는 길, 힐링과 다름이 아니다. 논어에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 했던 것을 곱씹어 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인仁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앞 서 시심을 이야기하면서 드러내었던 연민 憐憫이라고 해 두자.

 

쓸쓸한 고백과 따뜻한 위로

 

최윤경 시인의 두 권의 시집 ,『햇살을 부르다』와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를 통독하면서 그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이 글의 목적이었다. 이제 대락적이나마 최윤경 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앞으로 더욱 활기차게 시작 활동을 전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해 보고자 한다. 첫 째, 최윤경 시인의 시작 詩作의 목적(목표)은 자기 치유에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병원은 타자화된 희노애락의 압축이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뒤늦게 한 가지 덧붙여야할 말이 있다.

“병원은 치유의 희망을 가진 자들의 꿈의 저장소이다”

부연 설명을 한다면 최윤경 시에 드러나는 고통과 좌절의 현장 고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의 발전 發電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 째, 최윤경 시인의 시는 생활에 기반을 둔 일상시이다. 계절, 사물, 현상등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시의 맥락을 수용하면서 자유자재로 객관적 상관물을 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시의 다양한 의미의 확충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생활 속에서 시를 음미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기도 할 것이다. 셋 째, 시집 전 편을 아우르는 슬픔과 외로움의 고백은 대 사회적,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오직 시인 스스로를 위무하는 각성의 기제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의 때 비틀어 씻겨나간 양말

걸을 때도 힘겹게 지탱하더니

쉴 때도 꼿꼿하게 긴장을 하고 있다

날마다 같은 주인을 만나

신발 속에서 땀과 씨름하다가

급기야 축축해진 몸 내동댕이친다

무엇이든 주인을 잘 만나야

고생하지 않는 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어 숨죽인 시간

파김치가 된 양말의 고단함을

탁탁 털어내어 빨아 널면

맨발의 숨소리가 편안하다

서서도 쉬어갈수 있는 법을 배우려

오늘도 직립의 자세

늘어진 햇살을 마주보면

건조한 얼굴 환한 웃음으로 서 있겠다

- 시 「빨랫줄에 걸린 발바닥」 전문

 

「빨랫줄에 걸린 발바닥」 은 시집 『텅 비거나 혹은 가득차거나』의 성과를 요약하는 시임에 틀림없다. 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배부르고 마음이 평화로 가득찬다. 어찌 보면 시집의 모든 시들이 이 시를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시는 긍정으로 가득찬 삶, 마르지 않는 꿈을 무한생산하는 마음의 너그러움을 한껏 펼쳐 보이고 있다. 생각해 보니 누구나 난경 難境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난경을 헤쳐나가 극복하는 방법은 다 같지 않다. 어느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여 환상으로 날아오르거나 분노의 용광로 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탐미의 왜곡도 그런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건축가이며 200여명에 이르는 당대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적 성과를 규명한 전기작가로 활동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예술가들의 삶을 이렇게 규정했다.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교를 피해야 하고,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정신은 집중력을 가져야 하며, 예술에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근심을 멀리 해야 하며, 천재적인 예술가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아감에 있어서 ‘사랑’은 인격의 완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사랑’은 단독자로서의 외로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꿈은 권태로부터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꿈이 도식화 될 때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사랑과 꿈의 양 날개를 지닌 몸채로서의 외로움은 우리가 평생 지니고 함께 걸어가야 할 친구와도 같다. 아마도 시인으로서 최윤경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쓸쓸한 고백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지 모른다. ‘툭 툭 부러지던 때 (시 「오래된 이야기」)’를 지나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윤회의 서울이 서운하게 다가와도(시 「서울로 가는 길」)’사랑이라는 불쏘시개를 마음의 난로에 지펴 넣을 공력을 지닌 시인은 따뜻한 위로를 가난하고 추운 이웃들에게 무량하게 꿈이라는 선물로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