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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민 시집 <<동백을 뒤적이다 >>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8. 18. 18:39

 

 

 

그대라는 3인칭의 슬픔

이채민 시집 『동백을 뒤적이다』(현대시시인선 114, 2012)

 

나호열(시인,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가끔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기다릴 때가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의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은 ‘시인’과 ‘행복’의 정의에 대한 분명하고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답도 우답이거나 오답일 것이라는 결말을 내포하고 있다. 내밀한 미묘한 정서의 표현,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시대의 징후를 증언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호명하는 시인은 왠지 배역에 몰입하지 못한 채 대사를 잊어버린 무대 위 배우 같아서 슬퍼 보인다. 용감하게 제 마음의 오욕칠정을 숨기지 못하여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어 분홍글씨를 내보이는 시인은 용감해 보이기는 하나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축약하여 위악적인 포즈를 취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위무하는 것이 시인이며, 시인에게 주어진 행복은 진실한 자기 고백이라고 게으르게 옆으로 밀쳐놓을 때, 궁색하게 내놓는 답변은 대체로 이러하다.

 

기꺼이 그 누구보다도 외롭고 쓸쓸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그 외로움과 쓸쓸함을 완성하기 위하여 한시도 펜을 놓지 않는 사람이 시인이기에 그 어떤 시인도 지금은 충분히 행복하지 않으리라.

 

혼자 되내이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과 답변의 동조자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시를 찾아서 읽는다. 혹시라도 나의 생각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와 시인을 만나게 되면 기꺼이 그들과 나는 친구가 될 것인데 최근에 만난 시집 『동백을 뒤적이다』가 바로 그런 친구의 하나이다.

 

이채민 시인의 『동백을 뒤적이다』는 2005년에 발간된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에 뒤이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이다. 7년이란 침묵은 게으름의 소산일 수도 있고 치열하게 세상 일과 맞서는 정신적 겨룸의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인데, 두 권의 시집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세상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자아에 대한 연민과 각성을 투명하고 발 빠른 언어로 매무시하여 섣부른 우려를 불식시키는 후자後者의 성실함을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첫 시집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와 『동백을 뒤적이다』 사이에는 여성으로서의 시인의 성숙, 시 쓰기의 방법론적 탐구, 삶에 대한 통찰을 공고히 하려는 치열한 변화의 몸짓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관습과 안온한 일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옹골차게 맞섬으로서 외로움의 궁지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저물어가면서 내일을 기약하는, 노을을 남기는 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 세 가지의 과제는 치차처럼 서로 맞물려 한 편의 시마다 흥건히 고여 있으며 자연스럽게 시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 「한 방」은 자신의 시에 대한 세간의 냉정한 평가를 피하지 않는 자세를 피력하고 있다. ‘시인의 시가 섹스를 하다 만 것 같다든가, 개운하지가 않다’는 어느 시인(독자)의 논평에 대해 치부를 보인 듯, 한방 얻어맞은 심정을 고백하고 있다. 시인은 그 한 방이 피할 수 없는 한 방이라고 술회하므로서 이미 그의 시가 완전한 극치나 융합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부끄러움을 마다하지 않을까?

 

시인은 56층에서 살고 있다. 얼핏 그의 삶은 안온하고 즐겁기조차 해 보인다. 구름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선망의 시선을 마다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시인의 집이라 하지만/ 구름 위에서 시 쓰는 일도/ 땅에서 헤엄치는 것만큼 어렵다...(중략) 구름 위의 집에서도 밥은/언제나 내가 한다 ”(「구름 속의 집」부분). 그러나 시인도 56층의 부엌에서 밥을 하는 주부이며, 뜬구름인 시가 영혼을 채워주는 밥이 되지 못한다는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에 직면하고 있다. 이 괴리가 시의 주제이며 시인이 마주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괴리를 감싸안고 있는 상징이 된다.

 

아직 결말에 이르지 못한, 지극한 평온에 이르지 못한 과정에 놓인 그의 시들은 하다 만 섹스처럼 개운하지 않지만, 바로 이 자각이야말로 시인 이채민의 시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교언영색의 시, 내성이 깃들지 않은 득도의 시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미완의 범박한 고백이 더 울림이 클 수 있음을 『동백을 뒤적이다』는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체험과 상상력은 반드시 지녀야 할 비장의 무기이며 체험과 상상력의 적절한 운용은 시의 성과를 가늠하는 관건이다. 시의 양 날개인 체험과 상상력이 균등한 힘으로 시를 비상시킬 때 보다 더 큰 기쁨은 없겠으나 현실에서는 그 두 날개의 균형을 잡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체험에 무게가 실리든, 활달한 상상력에 의존하든, 시의 뼈대가 되는 것은 시인이 구축하고 있는 시정신이다. 시를 쓰게 되므로서 시인이 얻게 되는 성찰이 있는가 하면, 성찰이 있고 난 후에 시가 씌여지는 경우도 있다. 시정신이란 아마도 전자 前者의 경로를 따라갈 때 소중하게 얻어지는 성과라고 보여지는데, 『동백을 뒤적이다』 는 대상의 탐구를 통해서 삶의 내면을 발굴하는 이와 같은 시정신을 공고히 하는 표징이라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생활의 전면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 종군 위안부의 슬픔을 다룬 「종이학」이나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잊혀지고 훼손되어가는 고전이 아프게 교차하는 현장을 그린 「광화문이 아프다」, 인간의 탐욕을 위하여 죽어가는 여우와 밍크의 사례를 통하여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아름다운 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세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장애시설의 무자비한 성폭행 사건을 다룬 「도가니」 등 시인의 눈길이 서정에 머물지 않으며 결코 협소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들도 다수 있음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주제의 강렬함, 선명함이 오히려 시의 밀도를 떨어뜨리고 상상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동백을 뒤적이다』의 빛나는 성과는 자연현상이나 생물을 의인화하여 자신의 정서와 대치시키면서 존재의 보편성, 다시 말해서 존재의 본질과 그 본질의 실체를 환유하는 시인의 내적 성찰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너’, ‘그대’로 통칭되고 있는, 일견 살아 숨쉬는 사람으로 인지되면서 시의 화자와 사랑을 나누고 이별을 하며 고통을 산란하는 대상과의 대화는 비극적이고 절망으로 얼룩져 있다.

 

그을리고 쪼그라진 심장에 물집이 생겼다. 혈관을 뛰어다니던 피들도 제자리 걸음이다. 수많은 전쟁에도 끄덕없던 내 안의 교회와 성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뼈가 부러졌는지 바람도 나도 많이 휘청거렸다.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

너를 비워내는 일이

나무와

돌과

새들이

우는 일과 같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임의로 들추어 본 시 「슬픔에 관한 짧은 리뷰」의 전문이다. 시의 화자가 아픈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그가 아픈 것인지를 애써 규명할 필요는 없겠다. 중요한 사실은 ‘구름의 집’에 살아도, 옷장 가득 회색밍크 코트가 채워져 있어도 생의 중심에는 슬픔이 고여있다는 인식이다. 슬픔을 촉발하는 원인은 여럿이겠으나 그 누구도 삶의 슬픔을 비켜갈 수 없다는 명백한 진리의 양상은 그 슬픔의 국면과 조우하지 않으면 체득할 수 없는 사적이고 개별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도저히 통념과 상식으로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은 알아들을 수 없는 돌, 나무, 새의 울음만큼 강력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언뜻언뜻 비치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슬픔의 실체를 형상화 하는 작업이 『동백을 뒤적이다』를 관통하는 시인의 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친밀하게 시인에게 ‘너’라고 호명되는 ‘황사’, 무심히 피어나는 ‘파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불편을 주거나 관심밖에 있는 대상들이다. 황사는 봄의 불청객이며, 음식의 재료로 쓰이는 파에 피는 파꽃은 관상 觀賞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시인에게 ‘그대’로 불리우는 한강은 격절의 대상으로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는 고독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상징은 슬픔의 렌즈를 통하지 않고는 현상되지 않는 내밀한 것이다.

 

 

네 고향이 고비사막인 것을 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너는 몇 번의 고비를 넘었으리라

 

너는 평생 외우던 모래경전을 들고 왔지만

 

사람들은 검은 안경을 쓰고 너를 읽지 않는다

 

네가 고비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철을 허락받은 꽃들의 음울한 울음이

 

허공을 채운다

 

너는 무엇이 되어

 

다리도 없이 저 강을 건너오는가

 

수상한 너의 生이 고비에서 머무른다면

 

천 년의 生에 천 년을 더하도록 기도하리라

 

- 시 「황사」 전문

 

황사 현상을 의인화 한 이 시는 황사의 외연을 넓혀 독자의 감상을 확장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정점을 의미하는 ‘고비’와 ‘사막’을 건너오는 황사를 현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든, 황사를 그 어떤 상징으로 대치하든 시의 위의를 결코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황사가 의미하는 바가 ‘허무’이든, ‘고통’이든, 아니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든 “수상한 너의 生이 고비에서 머무른다면//천 년의 生에 천 년을 더하도록 기도하리라”는 언명은 어떤 운명에도 당당히 맞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비극적 서정을 보여주는 또 한 편의 시가 「한강」이다. 「황사」와 마찬가지로 「한강」의 ‘그대’ 또한 남성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날아가고, 흘러가고 부서지는 모래의 이미지는(「황사」), 끊임없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희생의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먼 길을 홀로 가는 부성 父性으로 강화된다.

 

 

누추하고 불안한 목숨들이 무성해질 때//부르지 않아도 그대는 나를 어루만지고//

거추장스러운 그리움이//울음을 불러 모을 때도//대신 까무러치고 까무러치며//

내 몫의 슬픔을 지고 가는 그대

- 시 「한강」 부분

 

‘한강’이 의미하는 바가 ‘신’이면 어떻고, 가닿을 수 없는 ‘연인’이면 어떤가! 슬픔으로 가득찬 생이라 하더라도 기도할 대상이 있다면, 내 몫의 슬픔을 지고 가는 그대의 현존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희망은 부르지 않아도 나에게 찾아오는 아침 햇살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을 이끌어 오다 보니 시 「그리움은 지문을 남긴다」에 닿는다. 이 시가 아름다운 시편에 속하는 한 편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동백을 뒤적이다』를 집약하는 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글의 끝에 놓고자 하는 까닭은 시인의 삶이 범인 凡人의 삶과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기꺼이 그 누구보다도 외롭고 쓸쓸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그 외로움과 쓸쓸함을 완성하기 위하여 한시도 펜을 놓지 않는 사람이 시인- 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상기한다면 자연스레 시인과 범인(독자)와의 위치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그리움’이란 실체화된 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살아왔던 과거의 시간, 사건들과 연계된 총체적 ‘살아있음’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일반적 서정의 극한을 넘어선다.

 

개펄은 많은 생명체의 터전이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서 한껏 질퍽해진 개펄은 쾌적한 삶의 터전이 될 수는 없다.“외포리 개펄보다 질척한 내 속의 뻘밭”은 미래의 생명들, 현존하는 타인들에게 흔쾌히 가슴을 내어주는 공손함으로 가득차 있는 희망이 퇴적된 뻘밭이다. 자연과 인공의 컴퓨터가 교감하고개펄에 찍힌 지문과 울음이/새들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공존의 인식은 생명의 연대를 염원하는 경구에 다름 아니다.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숨어들어온

비릿한 갯내음이 몸을 푸는 자정

렌즈에 끌려온 개펄을 펼치자 방안은 삽시간

사방무늬 새들의 발자국과 물결무늬가 아우성이다

 

고양이 눈알 박힌 거울에서

한 다발 파도가 일렁인다

 

외포리 개펄보다 질척한 내 속의 뻘밭

백 년의 울울한 숲처럼 빽빽한 지문은

바위에 새겨진 금언처럼 선명하고

탑을 쌓듯이 공손하다

개펄에 찍힌 지문과 울음이

새들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무리지어 날던 새들도

헤어짐이 무서웠을까

한곳으로 모이는 발자국들

방안은 금세, 살아서 퍼득이는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 시 「그리움은 지문을 남긴다」 전문

 

이와 같이 감상 感傷에 가깝도록 하강적 이미지로 한껏 기울어져 있는 듯 하지만 어느덧 감상 感傷속에서 희망의 미학을 건져올리는 시법이 『동백을 뒤적이다』를 오래 음미해야 할 시집으로 각인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단독자로서의 나의 슬픔’이 아니라 그대라는 3인칭의 슬픔으로 대상을 자아화하므로서 화자 話者의 여성적 정조를 극복해내었다는 점도 특기할만한 점이다.

 

이채민 시인의 『동백을 뒤적이다』는 “성능 좋은 더듬이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秘意를 캐낸다”는 평(문효치 시인)대로 경쾌한 행갈이와 비의를 캐내는 형상화에 성공한 시집이다. 그러나 시인의 이런 성과는 7년의 침묵 속에서 갈고 닦은 절차탁마의 내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예를 하나 든다면 이런 것이다. 시 「말 달리다」는 시인의 첫 번 째 시집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에 수록되었던 「말」을 개작한 것으로 기존의 4연 16행이 「말 달리다」로 개작되면서 2연 11행으로 축약되었다. 시가 한층 간결해진 것은 분명하나 이 자리에서 어느 시가 더 나은 작품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단지 한 편의 시에도 소홀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는 집념의 산물이 『동백을 뒤적이다』이라는 점이다. 통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완벽한 시법을 완성하고자 하는 치열함이야말로 시인 이채민의 앞길을 탄탄하게 만드는 장점이 될 것이다.

 

 

계간 『포엠포엠』 2012년 가을호에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