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理性이라는 괴물에 대답하기
나호열(시인, 본지 편집위원)
-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념에서의 행복이니 불행이니 죄악이니 미덕이니 하는 것 보다 좀 더 중요한 무엇이라는 것은? -
- 김성달의 소설 「겨울, 어느 날」 부분
1
서양 역사에 있어서 중세와 근대 近代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잣대는 이성이다. 이 친숙하면서면서도 낯 선, 그 존재를 믿어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유령처럼 정신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하는 이 이성은 인간을 짓누르고 있던 신神의 대항마로서 - 비록 그 능력이 천부적으로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대상을 인식하고 그 본질을 꿰뚫으며 이윽고는 그 본질 너머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추리할 수 있으며, 그에 덧붙여 행동에 앞서는 판단의 합리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인간을 탐구하는 존재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로 승격시키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신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자연 전체에 대한 궁금증을 과학의 이름으로 풀어나가기를 서슴치 않으면서 자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근대는 절대적 신을 지상에서 몰아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을 확산 시키는데 걸리돌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불행은 바로 이와 같은 이성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일군의 사람들은 이성의 권능과 효용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고, 모든 인간에게 편재 遍在하고 있는 반이성反理性, 비이성非理性적 요소에 대해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과연 전 인류와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성과 합리성을 지닌 이성이 존재하기는 하였는가?”
일례를 들어보자. 베르그송 Bergson의 ‘생의 약동elan vital’은 인간의 창조적 진화가 고정된 이성의 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분노, 불안, 용기, 의지와 같은 느낌은 이성과 대치하는 감성 感性이라는 영역으로 단순화 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존재한다. 베르그송이나 쇼펜하우어, 니체 등 인간의 반이성적, 비이성적 요소에 깊은 애정의 눈길을 준 사람들에 의하여 이성주의의 아성은 중심을 잃게 된다. 그리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Post Modernism의 탈이성脫理性의 조짐은 이성에 대한 믿음의 철회, 더 나아가 이성의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나 이성을 넘어서거나 이성을 대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하는 미망에 빠져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약하여 말한다면 완벽하게 세계를 작동하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의 적당한 타협은 이성이 작동하는 영역과 반이성적 또는 비이성적 힘이 작동하는 영역의 분할을 인정하는 것 일텐데, 불행하게도 이 두 개의 영역을 확연하게 분할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은 가지지 못했다. 심장의 박동을 정신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듯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태 事態앞에서 그 때 그 때 결단해야만 하는 고독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 듯하다.
2.
김성달의 「겨울, 어느 날」은 부재하거나 현실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열망과 그 열망을 현실화 할 수 없는 참담함의 기록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가와 화자 話者인 성우, 연화라는 여인이다. 화가는 스승의 부인을 사랑하였던 사람, 성우는 죽은 남편의 원고를 책으로 완성하려는 연화를 미망인이 된 후에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으나 그런 성우의 태도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연화는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마지막으로 성우을 만나고 싶다고 전갈을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화가의 사랑은 도덕적 금기를 넘어선 사랑이고, 성우의 연화에 대한 사랑은 연화가 미망인이 되었으므로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바가 없으나, 연화는 그런 성우의 열망에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세상을 등질 때가 되어서야 성우를 만나고 싶어한다. 이런 어긋남과 비극적 결말에 대해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성우의 독백은 회의 懷疑도, 절망도, 자포자기도 아니다. 화가는 스승의 부인이 죽고, 스승도 죽고 난 한 참 후에 캔버스에 그 여인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연화를 만나게 될 성우는 연화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을 지도 모른다.그렇다면 성우는 사랑을 쟁취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인용한 지문 그대로 통념 通念은 일반화된 상식에 불과하므로 단독자로서의 자유를 얻으려면(사랑을 얻는) 어떤 잣대로도 사회화된 통념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화가가 성우의 질문에 “사랑이 어떻게 생기는 지 전들 알 수 있나요?” 라고 답했을 때, 그 대답은 이성이라는 괴물에 대담하게 맞서는 자아의 성찰에 다름 아니다. ‘알 수 있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언제 뜨거운 용암이 분출할 지 모르는 활화산으로 살아가는 불확정의 시간을 직시하는 존재로서 소용돌이치는 자아를 사랑하는 자者야말로 뜨거운 인간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죄악이니 미덕이니 하는 것보다 좀 더 높고, 좀 더 중요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화가의 언명은 ‘ 소유는 행복이다’의 등식을 무효화시킬 뿐만 아니라 결단의 순간순간이 완성이며 소유라는 암묵적 직관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 직관은 논리적 이성을 뛰어넘고 추상 抽象의 미혹을 벗어나는 것이다.
문숙자의 수필 「너무 아름다운 머리」 또한 논리적 이성을 뛰어넘고 추상 抽象의 미혹을 벗어나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 누가 자신에게 병마가 드리울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며 암울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느 사람들은 병마를 이겨내고 어느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약의 효능이 좋아서, 의술과 약, 몸의 궁합이 잘 맞아서 완쾌가 되었다 해도 삶에 대한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도 소홀히 들을 일도 아니다. 절대고독에 빠져 있을 때 어린 자식의 간절한 간호로부터 갱생의 의지가 솟구쳐 올랐음을 증언하는 이 수필을 통해 ‘사랑’이라는 에너지, 소유나 정복이 아니라 대상에게 건네주는 열렬한 에너지가 복사열처럼 퍼져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겨울, 어느 날」이나 「너무 아름다운 머리」의 뼈대를 이루는 ‘사랑’은 결코 조작되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보상을 바라는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추상秋霜과 같은 논리로 해명되지도 않으며 무량하게 떨어져 내리는 봄 꽃잎이나 낙엽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성의 결과도 아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몸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문정영의 시 「지금 스며드는 진한 향기」는 통념이나 한 개인의 절대고독을 넘어서는 생명 간의 사랑의 진경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모든 향기는 살아서 움직인다. 제 몸 태워 내는 향은 슬픔을 재우기 위해 피우고, 오래 몸에 밴 향은 누군가에게 건너가 비로소 사랑이 된다.
한 계절에 한 번 피는 꽃들은 지고난 후에도 허공에 향기를 남긴다. 꽃을 본 기억이 꽃의 향기를 환생시킨다. 지금 너의 향기는 누군가에게 진하게 스며들고 있는가
- 시 「지금 스며드는 진한 향기」3,4연
이 시는 정신과 육체,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본질과 현상 등등의 이성이 가르친 차이와 차이에서 분화한 분별을 무력화 시킨다. 굳이 불교를 상기하면서 만물동근 萬物同根의 묵직한 교리를 들춰낼 필요가 없다. 꽃이 지고 난 후에 허공에 향기를 남기는, 그 허공의 몸에 실려 그 누구의 후각에 닿는 것이 사랑이라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3.
이성은 필연의 법칙을 완성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원리나 구조와 같은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의 검증은 세계의 과학화에 힘을 더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태풍이나 지진의 원리를 알아낸다 해도 태풍이나 지진, 그로부터 빚어지는 쓰나미를 막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엄밀한 법의 체계를 갖추어도 범죄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교화 敎化를 비웃으며 전쟁과 학살은 홍수처럼 밀려든다.
멀리, 가까이에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손이 있어
지그시 눌러 버릴지도 모를 그 날까지
더듬이의 촉수를 세우고 산다.
조광자, 「개미왕국」 마지막 연
세상에 많은 신 있더라 구둣방에 가지런히 꽂힌 가죽신부터 오랫동안
투덜투덜 먼지 뒤집어 쓰고 끌려다니는 나의 신
인도에는 신발 벗고 공손히 꿇어야 뵈는 오줌싸개 쥐신 있더라
온갖 신, 불신하며 사는데 귀를 닫아도 달팽이에 걸리는 사원
김상숙, 「뇌신」 앞 부분
우연히 개망초 한 뿌리를 뽑았더니 그 뿌리에 터를 잡고 사는 개미집이 끌려나오는 풍경을 통해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세상을 통찰하고 필연에 기댄 과학의 무력함을 그린 「개미왕국」 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의 불가항력과 두통약 뇌신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 삶에 들러붙은 신神을 끌고 갈 수 밖에 없는 삶과 몸으로 대비되는 신발을 오버랩시킨 「뇌신」 또한 예측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불안을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삶의 본능과 의지를 한꺼번에 전복시키는 힘 앞에 다시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을 불러야 할까?
이와는 달리 거대한 현실의 문제를 담대한 화합의 메시지로 쏟아낸 한 편의 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강상기의 시 「DMZ」는 3장 520여 행으로 이루어진 장시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우리의 산하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 골육상쟁의 전쟁은 정전 60년이 지난 후에도 155마일 철책으로 허리가 잘린 채 신음을 감추고 있는 형국이다. 전쟁이라는 반이성적인 야만 행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창작 동기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실천이야말로 조국통일, 평화번영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오늘의 삶은 야만과 질시, 굴종과 야합의 모순이 가득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토로한다.
그 망할 놈의 전쟁, 병든 자본주의 지키기 위해 인간의
비정함 키우는 사회를 위해 동족끼리 그토록 피 흘렸던가
전쟁은 분명히 이성적 행위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부 富에 대한 헛된 망상과 인간을 계층화하는 자본주의 또한 병든 야만이다. 시인은 「DMZ」를 통해 이성의 회복을 간구하면서 그 간구를 감성으로 호소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동족간의 사랑, 혈육의 정情...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 민족 심장아, 울어라. 질척이는 길고 긴
장마 끝에 통일 무지개는 비무장지대 구름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지 않으냐
시인은 일관된 어조로 이 땅의 현대사를 그려내고 있으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시 「DMZ」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중요성에 있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분단의 문제와 국가와 민족의 의미, 인류 역사에 있어서의 전쟁과 평화의 매커니즘을 제대로 규명해야할 단초로서 시 「DMZ」는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 나아가서 국가와 국가 간의 상호존중과 호혜 互惠의 정신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서부터 저 프랑스 대혁명이 내세웠던 자유, 평등, 박애의 휴머니즘의 근원을 파헤치는 작업 또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시인의 책무임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DMZ」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가 쇠사슬을 풀고 달아난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죽어서나 풀어질 매듭
한 때는 인연이란 이유로
그대를 묶어놓고 살았다
몹시 바람이 불던 그 겨울
가오리 한 마리 하늘 바다에서
추락하는 걸 본 듯하다
누가 나를 묶어다오
깃발을 나부끼고 싶다
진정한 자유는 매임이다
미친듯이 날뛰던 개가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밥그릇 지키기 위해
- 이사랑, 「매듭」 전문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는 그런 세상은 아니다. 이성의 힘은 낡아빠져서 더 이상 우리의 삶을 경이롭게 만들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에서 이성을 빼고 난 나머지- 그것을 감성이라 부르든, 본능, 또는 탈이성이라고 부르든- 로 동력을 얻기에도 힘이 부친다. 시계추처럼 우리는 양극단을 오간다. 쇠사슬을 끊고 달아났던 개가 안온한 밥을 얻기 위해 제 발로 돌어오는 것처럼, 우리의 몸을 매달지 않으면 깃발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순간의 결단 뿐일지도 모른다.
계간 <,시와 산문>>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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