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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과 놀이 속의 글쓰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5. 20. 18:10

 

판과 놀이 속의 글쓰기

나호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이 유별나게 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판을 깔 줄 알고 그 판의 주객主客이 누구든 놀이에 기꺼이 참여하여 흥취를 누릴 줄 안다. 자본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는 2002년 월드컵 때의 거리응원, 광우병 파동으로 일어난 촛불집회는 사안事案의 극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판과 놀이의 문화가 우리의 생활과 멀리 있지 않음을 보여준 훌륭한 사례라고 믿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판이라고 해서 다 같은 판이 아니며, 놀이라고 해서 고저高低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박판은 아름답지 않고 시체놀이는 병든 자기폐쇄의 망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판에 끼어든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놀이의 방향과 가치도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이다. 유유상종 類類相從 은 자연스런 인간의 행동양식이므로 판의 많음과 놀이의 다양함은 문화의 외연을 넓히는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논의를 우리 문학의 내부로 돌려보면 어떨까?

 

 

수 백 개의 문학상이 주어지고, 수 백 개의 문학지가 발행되는 나라, 인구는 줄어드는데 매년 쉬임없이 시인, 작가가 탄생하는 나라에 살면서 시인과 작가가 대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누가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물론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해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도 있고, 노익장을 과시하며 발표한 작품이 영화로 재편되어 대박의 행운을 누린 작가도 있으며, 탁월한 문학의 경지를 열어 국회로 진출한 시인도 있다. 그러나 이 뜻밖의 행운(?)을 누린 사람이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어느 판이든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와 망각의 소용돌이 속을 헤매일 수밖에 없다.

 

문학계에는 수많은 층위의 판이 깔려 있고 그 판과 판 사이에는 휴전선보다 더 공고한 경계가 놓여 있어서 관객이 없는 무대 위의 배우가 느끼는 적막함이 깔려 있는 것이 헛헛한 것이 현실이다. 불과 몇 십 년 전 만해도 글쓰기가 외로워서, 문학의 위의를 올곧게 세워보려는 굳은 심지로 모인 문학판(단체)들이 오늘날에는 자신들만의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형국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SNS(Social Network System)나 트위터가 대세라고 해서 그 자체가 소통이 아니듯이 수많은 문학판이 포용하고 있는, 주객이 혼재한 놀이는 문학의 존엄을 훼손하고 변질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디 그뿐인가? 문학과 관련된 수많은 인터넷 속의 카페들, 블로그들이 표방하는 문학의 대중화는 문학을 희화화하는 역기능이 작동할 여지를 남기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할 대목일지 모른다.

 

표절이 횡행해도 이를 제재할 마땅한 방도가 없고, 외화내빈 外華內貧의 문도文徒 들이 양산되는 상황은 이제 문학을 포함한 전 예술의 생산과 소비 양식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한다. 누구든 시를 지을 수 있고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양질의 작품을 찾아내어 걸러내고 유통시킬 수 있는 구조가 건강하지 않다면 이를 소비하는 대중들의 외면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문적으로 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교라는 판, 실력있는 시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문학지라는 판, 이념과 강령을 내세우는 문학단체라는 판, 여기에 상업적 이익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자본적 숙명을 가진 출판사라는 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점지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경쟁이라는 혹독한 과정의 엄밀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강구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학판의 놀이 부재를 조금씩 해소하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다. 황현산은 『잘 표현된 불행』 (2011)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이 모든 환경을 외면하지 않고 창조적인 의견을 개진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과 문학의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자꾸 왜소해지는 글쓰기 놀이의 현장에서 우리는 더욱 더 외로워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