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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실학의 이해 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7. 2. 15:03

 

조선실학의 이해 Ⅰ

 

나호열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Ⅰ. 실학의 의미

 

實學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용어이다. 실제적으로 유용한 학문, 즉 實用主義로 받아들이거나 조선 중기 이후 새롭게 정립된 학문으로 받아들이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실학은 보통명사로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동양사회, 중국과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종교와 철학은 사변 思辨이나 講壇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현실에 대응하고 적용되는 사회발전의 기제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유교, 불교, 도가사상, 성리학 등의 사상은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고 새롭고 행복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정치사상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원시유가의 사상은 약육강식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당시의 실학이었으며, 인도로부터 전래된 불교 역시 중국에 흡입되면서 선불교로 변용되고 송대의 성리학 또한 도가와 불교의 답습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실학이었던 것이다. 청대의 훈고학 또한 성리학을 배제하고 실증을 중요시하는 실학인 것이다. 실학은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의 줄임말로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이며, 반고가 지은 《한서》 중 하간헌왕전 河間獻王傳에 경제의 아들 헌왕(獻王) 유덕(劉德)을 평한 “학문을 닦는 데 옛것을 좋아했으며,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했다.(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김정희 金正喜가 「實事求是說」에서 부연한 바와 같으니 “만일 아득한 것에서 진리를 찾고 공활한데로 방치한다면 是非를 가릴 수 없게 되고 本意는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조선 실학의 성립 배경

 

1. 성리학의 붕괴

 

朝鮮은 華夷論에 근거하여 주자의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다. 주자의 성리학은 원시유가가 결여하고 있던 우주론을 도가와 불교의 이론에서 섭취하고 종합한 철학체계로서 이 세상의 궁극적인 원리인 理 와 이 理를 품수하는 性을 본체로 삼는 이론체계이다. 理는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고, 그 본질이 性이라는 것이다. 性卽理說은 ‘성이 곧 이’라고 하므로서 성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집, 즉 氣의 문제를 지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리학은 필연적으로 理氣論으로 파급되어가고 무형의 원리인 理와 유형으로 나타나는 물질인 氣로 세계로 인식하는 이론이다. 本然之性, 氣質之性, 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의 여러 이론들은 관념과 실제, 본질과 현상의 문제의 중심에 인간을 놓으므로서 새로운 인간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시스템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道學의 정치, 왕도의 정치를 구현하려고 하였는 바 士農工商의 계급사회의 필연성은 앞에서 언급한 인간 일반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우열과 차이에서 오는 당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전기의 성리학의 이데올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華로 존중했던 明의 멸망과 청의 대두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서경덕, 이황, 이이, 기대승 등의 성리학자들은 이기이원론, 또는 이기일원론 등의 사변에 치우치므로서 전란 이후의 민생의 피폐함을 타개하는 방편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번잡한 禮訟, 人物性同異論 등의 논쟁은 송대의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심화내지 완성하는데는 큰 힘을 더했는지는 몰라도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하는 데는 미력함을 떨치지 못하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청조를 통하여 서양문물이 이입되면서 과학과 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조선 성리학의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

 

2. 조선 실학의 태동

 

실학파의 비조鼻祖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인데, 그를 계승한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 더불어 실학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그러나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은 현실적인 문제들, 즉 정치의 길(道)·지방제도·경제·과거제도·학제(學制)·병제(兵制)·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이리하여 실학의 계통을 밟은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니, 앞에 말한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외에 정약용(丁若鏞)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서학이 수입되어 숙종 때의 이익에게서 크게 이해되어 마침내 그 문하에서 홍유한(洪有漢)·이벽(李蘗)·이승훈(李承勳)·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 등의 천주교 실천자가 배출됨으로써 서학이 새로운 종교로서 이 땅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인조 때의 김육(金堉)·정두원(鄭斗源)·이영준(李榮俊) 등이 학습을 시작한 서학의 과학면은 이익에 이르러 크게 발전되어 그의 문하에서 홍대용(洪大容)·신경준(申景濬)·정약용·최한기(崔漢綺)·김정호(金正浩) 등의 서구 과학의 실제 응용자를 얻음으로써 서학이 매개체가 된 과학의 발전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 사이에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이 수립되었고 다급한 민생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안과 노력이 생기게 되었으니 서학은 한국 사상 발생의 일대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실학 내용의 절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 실학사상이 발생되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중국 문화는 한인(漢人)의 한문화 재건으로부터 오는 고증학적 학풍과 서구 과학의 섭취로써 얻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경제 정책 또는 산업 정책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소위 북학파(北學派)로 알려져 있는 홍대용·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의 신진학자들이 수입하여 발전시켰다. 이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배워 그대로 사용하자는 것으로 한국 실학 성립의 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3. 실학의 갈래

 

한 마디로 조선의 실학은 17~18세기 사회변동에 따른 개혁론으로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주창하는 것이었다.

 

1)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

 

18세기 전반에 농촌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제도를 비롯한 각종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유형원:

 

경세치용파의 선구자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익:

 

경세치용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성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저서 《성호사설》를 통해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이를 공동경작, 공동 분배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2) 이용후생학파 利用厚生學派

 

18세기 후반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며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을 북학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이용후생학파는 19세기 후반의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수원(柳壽垣):

 

북학파의 선구자이다. 그의 저서 《우서》에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홍대용:

 

사신으로 청나라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사대부의 중화사상을 비판하였다. 《담헌집》을 남겼다.

 

박지원: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청나라에 갔다온 경험을 담은 여행기 《열하일기》로 유명하다.

 

박제가:

 

박지원의 제자로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밖에 저작으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홍양호(洪良湖)의 《이계집(耳溪集)》, 유득공의 《영재집(泠齋集)》 등이 있다.

 

Ⅲ. 정약용의 사상

 

[夏日還苕] 여름에 소내로 돌아오다

 

1779년(14세) 이때 홍공(다산의 장인 홍화보)께서 경상우도 병사로 나가셨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소내로 왔다가 얼마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긴 여름 도성에서 시름하다가 장하수성읍長夏愁城邑

조각배로 물 고을 돌아왔다네 편주반수향扁舟返水鄕

드문 촌가 먼 경치 바라다 보니 촌희성환조村稀成還眺

우거진 숲 서늘함 충만하여라 임무유여량林茂有餘凉

의관은 게을러서 아니 정돈코 의대종오나衣帶從吾懶

시서는 전일의 것 읽어 본다네 시서열구장詩書閱舊藏

진퇴를 아무래도 정하지 못해 행휴고미정行休苦未定

생리를 어부에게 물어나 보리 생리문어랑生理問漁郞

 

 

실학의 완성자라고 해도 무방한 다산 정약용은 파란만장한 생애만큼 학문에 있어서도 치열한 연구태도를 견지한 인물이다. 정조가 다산에게 물어 답한 내용을 정조가 돌아간 이후 유배지에서 수정을 가할 만큼 학문에 대한 근기를 버리지 않은 이가 다산인 것이다. 작금에 다산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 ‘과연 그가 천주교도이었는가?’ ‘그의 사상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의문들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규명되고 있는바 정약용의 사상의 근간은 洙泗學으로서 주희의 성리학을 따르지 않고 원시유가의 공맹의 본의를 따르는 것이었으며, 조선유학의 두 근간인 퇴계와 율곡의 이기논쟁도 이와 기에 대한 개념이 상이함에서 오는 것으로 정리함으로서 치열한 경학의 세계를 현실세계의 지행합일로 이끌어낸 업적을 이루어내었다고 생각한다. 한 예를 들어 다산의 사상의 핵심을 딮어보기로 한다. 다산은 맹자에 의해서 제기된 四端(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四德(仁,義,禮,智)의 관계를 재설정하였다. 맹자는 사단의 확충을 통하여 사덕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주희는 인의예지를 性을 인간과 사물의 본질로 이해하고 性發爲情으로 정식화했다. 즉 드러나지 않은 性인 인의예지는 드러난 情의 구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인간성의 본질은 사덕이 아니라 사단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갖추고 있는 것은 사단일 뿐이고,사덕은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톨해 성취한 인격의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단端의 해석에 분명히 드러나는 바이다. 주희는 단을 緖 (비죽 나온 실마리)로 해석하지만 다산은 端이 단서가 아니라 ‘시작, 또는 출발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단이 인간성의 내부에 사덕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단서가 아니라 사단을 시발로 해서 사덕의 이상을 실현해나가는 발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단과 사덕에 관련된 논의는 다산의 인간론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다산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넘어서는 도덕감을 지니고 있으며 이 도덕감의 성취는 오로지 의지와 결단으로서만이 이루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산의 민본주의적 성향은 다산이라는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경학 연구를 통해 얻어들인 논리적 지향점에서 연유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정약용의 ‘치인’은 일반 선비들과 달리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극진히 섬기는 것이었다. ‘수기’에 해당하는 저술은 사서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책들이며, ‘치인’에 해당하는 저술은 ‘1표2서’라고 불리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이다. 『경세유표』는 중앙행정에 대한 개혁론이며, 『목민심서』는 지방행정 개혁론이고, 『흠흠신서』는 죄수의 인권에 대한 주장을 담았다. 思辨과 務實의 병행, 지행합일의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성인의 좌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교빈 교수는 다산학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경험과 실증이다. 정약용은 의사들이 진맥을 하면서 몸 속의 오장을 짚어 말하는 것은, 한강 물을 가리키면서 저 물은 오대산에서 왔고 저 물은 금강산에서 왔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이치로 보는 태극도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의 이치라고 이해하였다.

둘째는 신비주의 비판이다. 정약용은 점, 풍수지리, 관상 같은 술수를 부정하였다. 부모를 내다 버리던 고려장을 없애려고 좋은 자리에 모시면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이 이제는 폐단이 되었다고 하면서 썩은 해골이 어떻게 산 후손의 복을 좌우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하였다. 또한 성인도 신비한 사람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행동이 도리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명분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조선이 작은 중국이고 청나라와 일본은 오랑캐라고 멸시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공자가 높였던 주나라도 오랑캐였으며, 선비족의 위나라나 거란이 세운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모두 훌륭한 나라라고까지 하였다.

 

Ⅳ. 실학의 의의와 요약

 

조선의 실학사상은 19 세기 개화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성공적 실현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서구에 있어서의 중세로부터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시민사회의 발흥과 계몽, 자본주의의 발아라는 토대에서 이루어졌으나 조선은 이와 같은 토대를 마련하는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존재했다. 성호학파와 북학파를 두루 중용했던 정조의 사망이후 조선사회는 봉건국가의 틀을 과감히 깨어버리는 개혁의 시기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실학은 민족적 자주성을 일깨우고 사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자성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부록 1

 

남양주 실학자들

 

① 김육金堉(1580~1658)

 

본관 청풍淸風. 자 백후伯厚. 호 잠곡潛谷. 시호 문정文貞

 

1580년(선조 13) 서울 서부 마포리麻浦里 외가에서 출생

1594년(선조 27) 일찍이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우고, 성혼成渾의 문인이 됨

1613년(광해 5)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 청덕동淸德洞(청평유원지)에 은거, 농사와 독서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임금을 호종.

음성현감陰城縣監 재임 중 문과 급제. 사간원 정언

1627년(인조 5) 지평으로 평안·황해도의 민폐개혁을 위한「양서사의兩西事宜」올림

1637년(인조 14) 『조천일기朝天日記』저술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로 대동법 시행 건의.

수차水車 보급,『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보급

1644년(인조 22) 대사성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레와 동전銅錢의 사용을 건의

1646년(인조 24)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중국에 가면서 시헌력 사용법을 배워옴

(1653년부터 시헌력 시행)

1649년(효종 즉위) 우의정에 발탁되자 삼남三南에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

1650년(효종 1) 중국 사행길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는 한편,

중국 동전 15만문萬文을 구입하여 평안도에 유통

1651년(효종 2) 영의정으로 충청도의 대동법 시행 주관. 소전小錢과 십전통보十錢通寶를 주조

1653년(효종 4) 서울 회현방會賢坊으로 이주

1658년(효종 9) 서필원徐必遠을 전라감사로 추천, 전라도 연해읍에 대동법 시행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

 

②홍만선洪萬選(1643∼1715)

 

본관 풍산豊山. 자 사중士中, 호 유암流巖

 

1643년(인조 21) 출생

1666년(현종 7) 진사시進士試 합격

1682년(숙종 8)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1696년(숙종 22) 대응군수大興郡守

1706년(숙종 32) 상주목사尙州牧使

1710년(숙종 36) 군자감정軍資監正 『산림경제山林經濟』저술(1710년 이후)

1715년(숙종 41) 별세

 

③ 정약전丁若銓(1758~1816)

본관 나주羅州. 자 천전天全, 호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매심재每心齋

 

1758년(영조 34)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출생

1783년(정조 7) 사마시 합격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 급제. 부정자副正字·초계문신抄啓文臣

1797년(정조 21) 병조좌랑

1798년(정조 22)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편찬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으로 흑산도黑山島에 유배.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글을 가르침

1814년(순조 14) 『현산어보玆山魚譜』저술

1816년(순조 16) 흑산도에서 별세

 

④ 정약용丁若鏞(1762~1836)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 문도文度

 

1762년(영조 38) 광주부 초부면 마현리(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 출생

1777년(정조 1)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읽고 그의 학문 따름

1789년(정조 13) 과거 급제

1790년(정조 14) 해미현海美縣에 정배되었다가 사헌부지평 등 제수

1792년(정조 16) 수원 화성華城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擧重機 설계

1794년(정조 18) 홍문관교리에 제수되고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감

1797년(정조 21) 천주교 신자로 탄핵받아 자명소自明疏 올림 곡산부사 제수, 『마과회통麻科會通』저술

1799년(정조 23) 천주교신자라는 이유로 공격받아 자명소를 올리고 형조참의 사직

1801년(순조 2)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1810년(순조 10)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저술

1811년(순조 11)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저술(1813)

『맹자요의』․『대학공의』․『중용자잠』․『중용강의보』․

『대동수경大東水經』저술(이상 1814)

1817년(순조 17) 『방례초본邦禮草本』저술(經世遺表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다)

1818년(순조 18) 『목민심서』저술. 유배지에서 풀려나 귀향.

1819년(순조 19) 『흠흠신서』․『아언각비』저술

1822년(순조 22) 정법삼집政法三集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자찬묘지명을 지음 『여유당집』을 경집經集 232권과 문집260여권으로 총괄,『경세유표』에서 지향하였던 국가체제가 ‘체국경야體國經野’임을 밝힘

1834년(순조 34) 『상서고훈尙書古訓』저술

1836년(순조 36) 별세

 

⑤ 서유구徐有榘(1764~1845)

본관 달성. 자 준평準平, 호 풍석楓石. 시호 문간文簡

 

1764년(영조 40) 출생

1783년(정조 7) 박지원․이덕무․성대중․유득공․박제가 등과 교유

1790년(정조 14) 문과 급제. 『농대農對』 저술

1792년(정조 16)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이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순창군수淳昌郡守, 의주부윤義州府尹, 성균관대사성,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堤學 등 역임

1799년(정조 23) 「순창군수응지소淳昌郡守應旨疎」올림

1806년(순조 6)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되어 향리에 유폐됨. 경기도 장단 인근 난호蘭湖에서 생활

1820년(순조 20) 「의상경계책擬上經界策」 올림

1825년(순조 25) 『행포지杏浦志』저술

1827년(순조 27)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이후 공조판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역임

1834년(순조 34) 전라도 관찰사.『완영일록完營日錄』·『종저보種藷譜』저술

1835년(헌종 1)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저술

1836년(헌종 2) 『화영일록華營日錄』저술

1845년(헌종 11) 별세(묘 장단 금능리)

 

⑥ 남병철南秉哲(1817∼1863)

본관 의령宜寧, 자 자명子明·원명原明, 호 규재圭齋·강설絳雪·구당鷗堂·계당桂塘

 

1817년(순조 17) 서울 안국동 출생

1837년(헌종 3) 문과 급제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 역임

1859년(철종 10) 『의기집설儀器輯說』 저술 혼천의渾天儀와 지구의地球儀 제작

1862년(철종 13) 『추보속해推步續解』 편찬. 「동곽연음집東郭聯吟集」지음

1863년(철종 14) 별세(묘 양주 송산면) 『규재유고圭齋遺藁』 (1864) 남김

 

⑦ 남병길南秉吉(1820~1869)

본관 의령宜寧, 자 자상子裳, 호 육일재六一齋․혜천惠泉․만향재晩香齋․유재留齋

 

1820년(순조 20) 서울 안국동 출생

1850년(철종 1) 문과 급제 성천부사․성균관대사성․황해도 관찰사․관상감제조 역임

1853년(철종 4) 『중성신표中星新表』 저술

1854년(철종 5) 『항성출중입표恒星出中入表』 저술

1855년(철종 6) 『설양도의도설說量度儀圖說』 저술

1860년(철종 11) 이조참판吏曹參判 『시헌기요時憲紀要』 저술

1861년(철종 12) 『성경星鏡』과 『추보첩례推步捷例』 저술

1864년(고종 1) 『중수중성표重修中星表』 저술

1867년(고종 4) 『태양출입표太陽出入表』 저술

1869년(고종 6) 왕명을 받아 『춘관통고春官通考』 저술 안국동 자택에서 별세(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부록 2

 

연표로 보는 다산 정약용

 

 

 

* 나주 정씨 가문으로 아명은 귀농(歸農), 관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삼미자(三眉子)․철마산초(鐵馬山樵)․다산(茶山)․사암(俟菴)․열초(洌樵)․열수(洌水)․열상노인(洌上老人)․자하도인(紫霞道人)․문암일인(門巖逸人)·탁옹(籜翁)·태수(苔叟),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카톨릭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

 

 

․ 1세; 1762년(영조 38)

- 음력 6월 16일 오전 10시(巳時)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부친 나주 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모친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이복 맏형 약현과 동복형 약전․약종과 동복 누이가 있었다. 이해 윤5월 21일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음을 당하는 참극히 있어났다. 부친 정재원이 이해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 4세; 1765년(영조 41)

-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

 

․ 6세; 1767년(영조 43)

- 부친 임소인 연천(漣川)에 따라가서 경전을 읽기 시작.

 

․ 7세; 1768년(영조 44)

- 서당에서 학습 시작.

- ‘山’이란 제목으로 오언시를 지음(최초의 詩)

“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운 것은

遠近地不同 멀고 가깝기가 다른 까닭이라네”

- 천연두를 앓았다. 그로인해 ‘삼미자(三眉子)’란 별호를 가짐.

 

․ 9세; 1770년(영조 46)

-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공재 윤두서의 손녀-정약용은 자기가 외가 쪽을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를 사별.

 

․ 10세; 1771년(영조 47)

-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게 된 부친에게 경서(經書)․사서(史書)를 수학. 1년간 경전과 사서를 본떠 지은 글이 키 높이가 되었다.

- 10세 이전의 습작들을 묶어 <삼미집(三眉集)>을 만듦.

 

․ 13세; 1774년(영조 50)

- 두시(杜詩)를 모방하여 원운에 따라 화답하는 운을 붙여 수백 수의 시를 지었다. 이때로부터 시명을 떨치기 시작.

 

․ 14세; 1775년(영조 51)

- 운길산 수종사에서 독서

수종사에 노닐며 시를 지음(游水鍾寺)

 

․ 15세; 1776년(영조 52)

- 2월 홍화보(洪和輔)의 딸 풍산 홍씨(豊山洪氏)와 결혼, 부친이 복직되자 집을 세내어 한양에서 살았다.

- 부친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 3월 영조 서거, 왕세손 즉위.

- 부친을 따라 경성, 南村 셋집에 거주.

- 장인 홍화보 홍국영의 미움을 받아 평안도 옥산으로 유배.

 

․ 16세; 1777년(정조 1)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처음으로 보고, 학문의 준칙으로 삼기로 결심.

- 채제공, 이가환, 권철신 등 성호학파 인사들과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제 시작.

- 가을에 부친의 화순현감(和順縣監)에 임명되자 임지인 화순(和順)으로 따라감

- 청주, 전주를 유람하면서 많은 시편들을 창작.

- 가을에 전라도 동복현(同福縣)의 몰염정(勿染亭)과 광주의 서석산(瑞石山)을 유람.

「몰염정유람기」「서석산에서 논 기록」

- 겨울에 중형 약전(若銓)과 화순현 동림사(東林寺)에서 맹자(孟子)를 읽으면서 송유주해(宋儒註解)를 비판. 「동림사독서기」

- 눈내리는 밤에 이벽이 찾아와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세워 함.

 

․ 18세; 1779년(정조 3)

- 2월에 중형 약전과 한양에 있으면서 과시(科詩)를 익혔으며, 태학승보(太學陞補)에 피선.

 

․ 19세; 1780년(정조 4)

- 부친 경상도 예천(醴泉)현감으로 전임

- 예천 관청 서재에서 독서

- 반학정에서 글을 읽고 「반학정기」를 지음

- 진주 촉석루를 구경하고 「진주의기사기」를 지음

 

․ 20세; 1781년(정조 5)

- 한양에 있으면서 과거에 응시.

- 7월에 딸을 낳았으나 닷새만에 사망.

 

․ 21세; 1782년(정조 6)

- 한양 창동(倉洞; 남대문 안)에 처음으로 집을 구입하여 체천정사(棣泉精舍)라 하고 살았다.

- 春日游水鍾寺 詩지음.

- 봉은사에서 글을 일었다.

 

․ 22세; 1783년(정조 7)

- 2월 세자(世子) 책봉 경축하는 증광감시(增廣監試)의 경의초시에 합격하고 태학생(太學生)이 됨,

- 4월 회시(會試)에 생원으로 합격. 선정전에서 정조와 최초로 만남.

회현방(會賢坊)으로 이사.

- 詩 過孤山亭遺墟, 上雲吉山, 宿水鍾寺, 三灘絶句.

- 9월에 장남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 정약전도 가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왔다.

** 이승훈(李承薰)이 사신을 따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포루투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 22세; 1783년(정조 7)

<游水鍾寺記> 記文 씀.

 

․ 23세; 1784년(정조 8)

- 會賢坊 樓山精舍로 이사.

- 여름,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면서 임금이 내린 80여 조항의 의문점을 기술한 『중용강의(中庸講義)』를 이벽(李蘗)의 도움을 받아 작성, 정조에게 바쳤다. 맏형 약현(若鉉)의 처남 이벽(李壁)에게 천주교에 대해서 처음 듣고 서적을 보았다.

- 6월 반제에 뽑히고, 9월 정시의 초시에 합격

** 이승훈(李承薰)이 연경으로부터 서교(西敎)의 서책을 가지고 돌아옴.

 

․ 24세; 1785년(정조 9)

- 樓山精舍에서 같은 坊 *然齋로 이사.

- 반제에 거듭 뽑히고, 정시의 초시에 수석 합겨, 11월 감제의 초시에 합격

 

․ 25세; 1786년(정조 10)

- 2월 별시(別試) 낙방, 苕川으로 돌아옴.

- 7월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태어남.

- 到記의 초시에 합격

- 苕川四時詞 지음.

 

․ 26세; 1787년(정조 11)

- 1월, 3월 두차례 반제에 수석 합격, 많은 상을 받음. 8월에 반제에 2등으로 뽑혀 「兵學通」과 교지를 하사 받음.

- 4월; 임금으로부터 「國朝寶鑑」을 상으로 받음.

- 9월; 詩 “秋日門岩山莊雜詩”

이미 陽根 벽계에서 논을 빌려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 27세; 1788년(정조 12)

- 3월; 泮試(文廟)에서 수석 합격.

- 9월; 문암장에서 벼베기를 살피다.

 

․ 28세; 1789년(정조 13)

- 1월; 대과(大科) 급제.

- 3월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어 정조에게 『대학』을 강론.

- 5월에 부사정(副司正)이 되고, 6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됨.

- 겨울에 배다리(주교;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있어, 그 규제를 만들어 바쳤다.

 

․ 29세; 1790년(정조 14)

- 2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대간이 법식을 어겼다며 탄핵하자 여러 번 패초를 거부하다가 3월 10일 서산군 해미현에 유배, 11일 만에 풀렸다. 돌아오는 길에 온궁에서 사도세자 유적을 복원할 것을 지시해 노론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 9월; 정약전 대과 급제.

- 내각(內閣) 친시(親試)의 세말(歲末) 점수가 수석(首席)을 차지하여 특별히 구마(廐馬)와 호피를 하사받고 사은(謝恩).

 

․ 30세; 1791년(정조 15)

- 4.12 아들 구장(懼장) 죽음

- 5월에 사간원 정언,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

- 겨울에 『시경의(詩經義)』 800여 조목을 지어 올렸다. 임금께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하시며 크게 칭찬. 『홍재전서(弘齋全書)』에도 200여 조목이 실려있다.

- 이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권상연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천주교 배격운동이 일어나자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배교.

 

․ 31세; 1792년(정조 16)

- 홍문록에 오르고 이어서 수찬이 됨.

- 4월 9일 진주 임소에서 부친 진주공의 상(喪)을 당해 광주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 여름 마현 石林에 望荷樓를 짖고 記文을 씀.

- 겨울에 왕명으로 수원 화성의 성 쌓는 제도를 정리하여 바쳤다. 또 임금이 내린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인중(引重)과 기중(起重)의 기계장치를 마련하여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바쳤다. 성이 준공되자 임금이 “다행이 기중가를 사용하는 바람에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 33세; 1794년(정조 18),

- 정월 hgkfn 딸 효순(孝順) 죽음.

- 6월에 부친 3년상을 마침.

- 7월에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

- 8월에 비변사랑(備邊司郞)

- 10월에 홍문관(弘文館) 수찬되었다가

- 경기도 암행어사(10.29-11.15) 명을 받아 연천, 삭녕 등의 고을을 암행했는데, 이때 경기감사 서용보의 비위사실을 보고하였다가 정조 사후에 보복당함,

10월 암행어사로 경기도 적성지역을 암행.

- 이어서 12월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 수원성 축성공사 착공

 

․ 34세; 1795년(정조 19)

- 정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름. 정조와 수원 현릉원 배알.

- 2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어 현릉원에 행차할 때 시위로 따라감.

- 3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 「화성정리통고」를 이가환.윤행임 등과 합작.

- 주문모 사건에 둘째형 약전(若銓)의 연좌로 7월 충청도 金井察訪으로 좌천.

- 금정찰방으로 있을 때, 온양(溫陽) 서암(西巖)의 봉곡사(鳳谷寺)에서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을 좌장으로 남인 학자들과 함께 모여 성호 이익의 유고를 가져다가『가례질서(家禮疾書)』를 교정하여 한 권의 온전한 책으로 엮었다. 이때 강학한 문답을 정리하여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지었다.

또 『퇴계집』반 권을 구해, 매일 아침 퇴계 선생의 편지를 한 통씩 읽고, 그 뜻을 부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지었다. →다산이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사모하여 『퇴계집』의 서찰(書札)을 읽고 그 중에 특히 요절(要切)할 부분을 뽑아 강(綱)으로 삼고 다음에 부연설명하여 자신이 경성(警省)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지은 책이다.

- 번암 채상공 제공에게 올리는 글

- 11.5 아들 삼동(三童) 죽음

- 12월에 국왕이 소환

- 12월에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왔는데, 이해 맏형 정약현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 굶주리는 백성들(飢民詩) 지음.

 

․ 35세; 1796년(정조 20)

- 10월에 규영부(奎瀛府) 교서(校書)가 되어 이만수․박제가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교정작업에 참여.

- 12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 다시 우부승지, 좌부승지에 올랐다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詩동호인 모임 결성

- 수원성 준공

 

․ 36세; 1797년(정조 21)

- 6월에 좌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자신의 천주교 관계 전말을 고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났다.

- 윤6월에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 번암 정승께 올리는 글

- 이문원(摛文院)에 들어가 두시(杜詩)와 『춘추좌씨전』을 교정.

겨울에 수십 종의 의서에서 천연두 치료에 관한 내용을 편집․정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12권을 찬술. 여러 자식을 잇달아 천연두로 잃은 슬픔을 이렇게 넘어섰다.

- 정약전은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 37세; 1798년(정조 22),

- 4월에 『사기선찬주(史記選纂注)』를 완성해 올렸다. 이는 왕명으로 앞서 엮은 『사기영선』의 찬주가 지나치게 번잡한 것을 산삭하여 요점만 간추린 것이다. 이를 올리자, 임금이 “글로 올린 것이 뜻에 적합하니 매우 다행스럽다”는 말씀을 내렸다.

- 정약전은 왕명으로 『영남인물고』를 편찬.

- 곡산에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곡산부사 재임시 만든 상세하고 정확한 호적부는 역사상 처음의 것으로 통계청 사업의 효시. 「곡산북방산수기」등 저술.

 

․ 38세; 1799년(정조 23)

- 2월 황주(黃州) 영위사(迎慰使)로 사신을 접대하고 4월 내직으로 옮겨져 병조참지, 부호군을 거쳐 형조참의를 제수받았다. 6월 대사간 신헌조가 정약전을 탄핵하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직.

- 넷째 아들 농장(農牂)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 농장에는 낙향의 삶에 대한 꿈이 담겨있다.

 

․ 39세; 1800년(정조 24)

- 박제가와 함께 종두설을 연구 실험.

-『종두설(種痘說)』저술

- 봄에 처자(妻子)를 데리고 낙향, 정조가 내각 서리를 보내 곧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승하.

고향으로 돌아와 저작에 주력하면서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지음. 「여유당기」지음

- 홍명한이 잘못을 지적한 내용이 적힌 『문헌비고』를 빌려, 그 메모를 바탕으로 『문헌비고』의 오류를 차례대로 지적한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1권을 완성. 임금께 올려 살피시도록 하려 한 것인데, 갑작스런 승하로 올리지 못했다.

- 마현의 石林에서 노닐며 記文씀.

- 초여름 ‘苕上烟波釣叟之家’라는 뱃집을 만들고 記文을 씀.

 

․ 40세; 1801년(순조 1)

- 사간원 논계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다.

- 2월 9일 셋째형 약종(若鍾; 세례명 아오스딩) 사형,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 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竹山(그믐날 유숙)-嘉興(초하룻날 유숙)-3월 2일 하담 도착 친산(親山)

- 3월 9일 장기(長鬐)에 도착, 유배 시작 『삼창고훈』을 참고하여 字學에 관해 정리한 『이아슬(爾雅述)』6권 지음. 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겨울 옥사 때 잃어버렸다.

여름에 우리나라 속담을 운을 달아 알기 쉽게 정리한 『백언시』지음. 이는 1820년에 ‘이담속찬’이라는 이름으로 확장․완성하였다.

- 10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으로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이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

 

․ 41세; 1802년(순조 2)

- 유배 초기부터 8년간 떡장수 노파가 제공하는 비좁은 뒷방을 얻어 생활. ‘사의재’라 칭함. 벗 윤서유가 사촌동생 윤시유를 시켜 위로함.

- 넷째 아들 농장이 요절.

 

․ 42세; 1803년(순조 3)

- 봄에 『예기』『단궁(檀弓)』편의 옛 주석 중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단궁잠오(檀弓箴誤)』6권을 완성했다.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뒤에 『상례사전(喪禮四箋)』에 들어가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다산은 뒤에 『상례사전』에 활용되고 남은 것들만 따로 추려 별도의 『단궁잠오』를 남겼다.

- 여름에 23칙으로 된 「조전고(弔奠考)」를 완성했다.

- 겨울에 『상례사전』중 「예전상의광(禮箋喪儀匡)」17권을 완성. 「士喪禮」3편과 「喪服」1편과 그 주석을 취해 이경증경(以經證經)의 방식으로 대의를 밝힌 내용이다.

- 김대비의 해배명령이 있었으나 서용보의 반대로 풀려나지 못함.

- 詩 ‘哀絶陽’ 지음.

- 「사의재기」지음.

 

․ 43세; 1804년(순조 4)

- 봄에 처음 배움을 시작하는 학동들을 위해 2천자문인 『아악편훈의(兒學編訓義)』 지음. 유형자(有形字) 1천 자와 무형자(無形字) 1천 자로 구분하여 연쇄적 방식으로 체계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엮은 교과서이다.

- 이청(李晴), 초의(草衣) 등의 제자들과 자주 시문을 논함.

- 겨울에 장남이 찾아왔으며 보은사(寶恩寺)에서 주역예기(周易禮記)를 강론함.

 

․ 44세; 1805년(순조 5)

- 여름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3권을 완성, 겨울에 학연이 왔다. 보은산방(寶恩山房) 으로 옮겨 스님들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惠藏선사와 만덕사 주지로 부임하여 인연을 맺었다.

- 고금도 귀양살이 하던 벗 김이재가 돌아가는 길에 들림. 혜장에게 차를 구걸하는 글 「걸명소」를 보냄.

-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 45세; 1806년(순조 6)

- 詩 ‘水調歌頭(고향을 생각하며)’ 지음

 

․ 46세; 1807년(순조 7)

- 여름 沙村書室(黑山島 정약전) 記文

- 5월에는 정약용의 장손 대림이 태어났고, 7월에는 정약전의 아들 학초가 사망했다.

「형의 다들 학초묘지명」

- 「상례사전」50권 완성

-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 및 다산화사(茶山花史) 20首 지음

 

․ 47세; 1808년(순조 8)

- 봄에 강진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의 산 밑에 있는 윤단(尹猯)의 산정(山亭)인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겨 저술을 시작, 『다산문답(茶山問答)』1권 지음.

- 제자들의 도움으로 동암․서암을 짓고, 연못을 파고 정원을 손질하였다.

- 아들 학유가 다녀갔다.

- 겨울에 『주역심전(周易心箋)』24권과 『독역요지(讀易要旨)』18칙, 『주역사해(周易四解)』․『주역서언(周易緖言)』 등 주역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기술했다.

․ 48세; 1809년(순조 9)

-『시경강의산록(詩經講義刪錄)』 등 지음.

 

․ 49세; 1810년(순조 10)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등 지음.

- 큰아들 학연의 상소로 해배명령이 내렸으나 이기경․홍명주의 방해로 인해 풀려나지 못함.

 

․ 50세; 1811년(순조 11)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등 지음.

- 헤장이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 죽은 계부 정재진을 위해 「계부가옹행장」지음.

- 겨울, 「아암장공탑명」지음.

 

․ 51세; 1812년(순조 12)

- 『민보의(民堡議)』․『춘추고징(春秋考徵)』등 지음.

- 옹산 윤서유의 아들 尹昌模를 사위로 맞음.

 

․ 52세; 1813년(순조 13)

-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지음.

- 7월 13일 庶母 金氏 사망 초장; 龍津의 산골짜기, 천장; 鳥谷의 亥方向

 

․ 53세; 1814년(순조 14)

- 4월 장령 조장한이 사헌부에 나아가 특별히 대게를 정지시켜 죄인명부에서 삭죄.

- 의금부에서 석방시키려 했으나 강준흠의 상소로 저지됨.

-『맹자요의(孟子要義)』․『대학공의(大學公議)』․『중용자잠(中庸自箴)』․『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대동수경(大東水經)』등 지음.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된다는 소문을 듣고 흑산도까지 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이도로 이주.

 

․ 54세; 1815년(순조 15)

- 『심경밀험(心經密驗)』․『소학지언(小學枝言)』지음.

- 정약전 『자산어보(玆山魚譜)』 완성

 

․ 55세; 1816년(순조 16)

-『악서고존(樂書孤存)』12권 지음.

- 6월 6일 형 약전(若銓) 유배지 내흑산 우이도에서 사망. 「선중씨정약전묘지명」지음.

 

․ 56세; 1817년(순조 17),

- 『상의절요(喪儀節要)』․ 『방례초본』, 『경세유표(經世遺表)』 49권 지음.

 

․ 57세; 1818년(순조 18)

-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48권 완성.

- 8월 이태순의 상소로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남.

- 9월 강진을 떠나 9월 14일 고향 마현 본가로 돌아옴.

- 「효부심씨묘지명」지음.

 

․ 58세; 1819년(순조 19)

-봄에 『흠흠신서(欽欽新書)』완성.

-『아언각비(雅言覺非)』저술

 

․ 59세; 1820년(순조 20)

- 봄 3월에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주(春州; 春川)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작은 배를 꾸며 협주(峽中)에 들어갈 때,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청평산(淸平山) 폭포를 보고 절구시(絶句詩) 25수, 화두시(和杜詩) 12수, 잡체시(雜體詩) 10수를 지었다.

- 4월; 江皐鄕射禮 베품.

- 4월 28일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수정 4일 만에 마쳤다.

- 겨울에 「옹산윤공묘지명」지음

 

․ 60세; 1821년(순조 21)

-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지음.

- 9월 맏형 약현(若鉉) 사망. 「선백씨약현묘지명」지음

- 겨울 「남고운지범묘지명」 지음.

 

․ 61세; 1822년(순조 22)

- 여름 4월 15일 학연(學淵)이 대림을 데리고 춘주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 작은배를 꾸며 협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고기잡이 배를 구하여 마치 집처럼 꾸미고 그 문미(門梶)에다가 ‘산수록재(山水綠齋)’ 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걸고, 좌우 기둥에 한쪽은 ‘張志和苕霅之趣(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 또 한쪽은 ‘倪元鎭湖泖之情(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라 썼다.

 

- 회갑을 맞아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짓다. 이가환․권철신 등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남인들의 묘지문도 짓기 시작.

「윤지평지눌의 묘지명」, 「이장령유수의 묘지명」, 「녹암권철신묘지명」, 「정현이가환묘지명」

 

․ 66세; 1827년(순조 27)

-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가 정약용 등을 등용하려 하자 윤극배(尹克培)가 상소해 정약용을 무고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 白雅谷(검단산 북록)에서 五葉亭을 지어 놓고 人蔘 농사를 짓다.

 

․ 69세; 1830년(순조 30)

- 효명세자가 위독하자 정약용을 부호군에 단부(單付)해 약을 쓰게 했으나 조제하기 전에 효명세자가 사망.

 

․ 70세; 1831년(순조 31)

- 永明尉 洪顯周와 교유

 

․ 73세; 1834년(순조 34)

-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개수해 21권으로 합편(合編)함. 순조가 위독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대궐에 도착하기 전 순조가 사망.

 

․ 74세; 1835년(헌종 1)

- 우두신방(牛痘新方) 시수 실시

 

․ 75세; 1836년(헌종 2)

- 2월 22일 진시(辰時)에 마현 자택 정침(正寢)에서 친족들과 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남, 이날은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이다.

- 음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안장됨.

 

․ 1838년(헌종 4)

- 부인 풍산 홍씨 사망

 

․ 1839년(헌종 5)

- 丁夏祥 처형(천주교 신자)

 

․ 1882년(고종 19)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전부 필사되어 내각에 수장.

 

․ 1910년(순종 4) 7월 18일 정이품(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도(文度-博學多識하니 文이요, 心能制意하니 度)’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