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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순의 시 나이테, 사슬을 풀어내는 나무의 노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4. 27. 21:45

 

<해설>

 

나이테, 사슬을 풀어내는 나무의 노래

 

- 사람은 글을 속일 수 있어도, 글은 사람을 숨기지 않는다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 시詩의 위의 威儀

 

자본주의가 소리쳐 외치는 것은 풍요이지만, 풍요는 소외를 낳고 불행을 거느린다. 풍요의 환상은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 때문에 우리는 달갑지 않은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다. 채로 걸러낸 경쟁의 승패로 아비규환이 된 이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난 가난과 정신의 빈곤이 이 땅에 시와 시인의 나라를 세웠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문文에 대한 열망은 계급타파 내지는 계급상승의 낭만적 방편으로서, 우리 모두에게는 시심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그럴싸한 논리와 맞물리면서 현대판 규방문학의 태평성대를 이룰 지경에 이르렀다. 산과 들에 오물을 암장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측은지심으로 비수를 꽂는 강철 심장을 비웃으며 교언영색 巧言令色의 공허한 메아리는 방방곡곡을 소음으로 뒤엎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참다운 시인을 기다린다는 사실은 무모한 희망이면서 따뜻한 희망이다. ‘참다움’이란 말 자체가 애매모호 하지만 ‘구도 求道의 정신을 벼리는 자’로 시인을 규정한다면 ‘참다움’ 속에는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절절한 몸짓이 배어있는 까닭에 시와 동체 同體인 시인을 통해서 우리는 생을 함께 걸어가는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이쯤 해서 눈매 초롱한 한 여인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쯤, 북방의 소도시에서 작은 거인처럼 나타난 사람이 곧 한옥순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돋보기안경을 쓰고 글을 읽는 그는 한 권의 시를 들고 다시 나타난다. 시집『황금빛 주단』은 죽은 듯 맹렬히 살아 왔고, 사라진 듯 했으나 실제로는 쇠락하여 가는 소도시와 소시민을 끈질기게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품은 기록인 동시에 시인 자체이다. 굳이 이 글의 첫머리를 ‘시의 위의’로 삼은 까닭은 삶과 투쟁하되 피 흘리지 않고 인간의 비루함을 노래하되 끝내 인간을 증오하지 않는 시인의 인간애 人間愛가 오롯이 살아있기 때문이며, 다시 우리에게 시가 무엇이며 시인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되묻게 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한옥순은 부동 不動의 나무와 같다.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으나 몽유 夢遊는 가능한 까닭에 그 나무에는 수많은 칼집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무는 부동이지만 뿌리는 흙을 움켜쥐며 물을 찾아 움직이고 있고, 그가 보았던 요동치며 흘러갔던 사람들과 풍경과 바람과 폭풍우의 기억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이테로 자신을 친친 동여매고 있다. 『황금빛 주단』에는 이와 같은 기억이, 아픔이 가득하다. 아직은 낭창낭창한 줄기며, 가지들이 허공에 흡반 吸盤처럼 매달려 있는 잎들이 한옥순의 시이다. 꽃인가 싶으면 낙엽이고 낙엽인 듯 싶으면 열매로 떨어지는 시들이 우리의 마음으로 내려올 때 삶의 이면을 돌아나가는 야멸찬 인정과 고뇌에 손을 내밀며 강철이 되어버린 심장을 다시 부들부들한 인간의 심장으로 되돌리고 싶은 감정의 역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시집 『황금빛 주단』은 바로 우리가 잊었던, 외면했던, 불편했던 우리의 이야기이다.

 

■서정 抒情의 회복을 위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듯이 절박한 상황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학교의 어원이 ‘여가(schole)’에 있음을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이 의식주, 특히 먹고 사는 일의 충족이 없이는 세상은 아름답지도 아름다워질 수도 없다. 이 말은 인식의 주관(인간)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세상은 무의미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우리가 동의하여왔던 서정의 의미는 왜곡되거나 아예 부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연의 위력이 인간을 압도했을 때 인간은 자연과의 합일, 또는 자연에의 회귀를 염원하게 된다. 노자 老子가 일찍이 갈파한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 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 자연은 만물을 차별하여 다루지 않는다)를 망각한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거나 정복해야하는 대상으로, 세상은 인간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조작되거나 조장된 전쟁터나 놀이터로 받아들이므로서 규칙이 존재하는 게임으로 환치시킨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서정은 이미 한물간 퇴물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서정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 현존하면서 인간과 세상을 작동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 이 모두를 포섭하는 자연을 혈연관계로 묶는 힘은 이 모든 사물을, 현상을 동일화하는 서정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런 서정의 힘을 믿고 느끼는 존재가 시인이다. 서정을 감지하는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촉수를 뻗치고 관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 관여는 말할 나위 없이 생명의 의미, 관계의 의미를 캐묻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정을, 시인의 외연을 넓혀가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꽃은 아름답다’든가, ‘ 바람이 우니 마음도 따라 운다’는 언명은 서정의 발로가 아니다. 서정의 본질은 ‘꽃은 아름답다’든가, ‘ 바람이 우니 마음도 따라 운다’는 언명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다운 시인은 서정의 옹호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서정의 외연을 넓히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 다시 말하면 서정의 외피에 둘러싸여 있는 사물과 현상의 배후(본질)를 캐묻는 일이 시인의 할 일이라는 자각에 투철해진다는 말이다.

 

시집 『황금빛 주단』은 이런 서정의 본질적 의문에 대한 집요한 추적을 보여주고 있다. 등단 이후 처음 상재하는 시집 『황금빛 주단』이 지난 10 여 년 간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수록된 85편의 시편은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체득된 서정에 대한 인식의 기록이라 할 만 할 것이다. 분명 서정의 두 기둥은 ‘자연에 대한 외경 畏敬’과 ‘휴머니즘 Humanism’이다. 이 두 기둥을 태생적으로 체득한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사유를 포함하는 교육과 부단한 심적 수련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외경 畏敬’과 ‘휴머니즘 Humanism’을 증언하게 되는 것이다. 한옥순은 후자의 통로를 통해서 구도의 정신을 벼리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점이 『황금빛 주단』을 포함한 과거보다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걸게 만든다. (이 기대의 징후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황금빛 주단』은 자연(현상),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하는 시인(또는 화자 話者)의 이야기이다. 1부는 대체적으로 겨울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생물에 빗대어 인생을 노래하는 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3부는 여름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4부는 봄의 생명성을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5부는 시인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대략적으로 미루어볼 때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낭만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다. 이럴 때의 반응은 냉소적이거나 투쟁적인 시선을 지니게 된다. 가진 자보다 덜 가진 자, 성공한 존재보다 실패한 비루한 존재에 눈길이 가고 세상은 어두운 눈길로 가득차게 된다. 이런 불만은 시를 응축보다는 이야기로 풀어나가게 만들고 체념과 극복의 갈림길에 서게 만든다. 『황금빛 주단』은 이 갈림길의 이정표로 우리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비극적 삶의 반역

 

『황금빛 주단』의 키워드는 여성성, 빈곤(한 삶), 소외, 자연과의 소통이다. 사실적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절실함은 시의 아름다움을 사상 捨象시키고 상상력의 발흥을 억제시킨다. 그래서 한옥순의 시는 아름답지 않은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런데도 이 불편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심상은 잔잔한 물결의 안온함을 던져준다. 상승을 꿈꾸는 현대인의 욕망을 고층아파트에 비유하면서 시멘트나무로 인식한 끝에 ‘그래도 하늘은 그다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시멘트 나무 위에 둥지를 틀었다」)고 고백하면서 더 나아가서 아파트를 납골당으로, 낙하 아니면 추락해버릴 위기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잔디밭에 세워둔/ 팻말’(「 15층 남자 쓰레기 버리는 방법」) 의 자살한 남자나 ‘가수 문주란을 알고 살기를 백 번 잘 했다며/ 곰팡이 냄새 풍기는 입으로 '돌지 않는 풍차'를 부르던’ (「홀아비 서 씨」), ‘노랗고 둥근 몸뚱이를 가진 국밥 집 주전자酒傳者 씨’로 대변되는 소외된 자들의 가난을 묘사하면서도 시인은 가난의 원인, 즉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불평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한 개만 골라야 하는/빈털털이 가장의/씁쓸한 입맛’ ( 「선택」)의 대척점에는 부 富가 존재한다. 부는 선택하지 않는다.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가장 비싼 것을 사게 되면 최고의 욕망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은 가난한 자의 고통에 다름 아니다.

 

내 속엔 대체적으로 싸구려가 들어간다

지저분한 것, 질척한 것들도 들어가곤 한다

종종 만 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도 들어간다

어떤 것은 내 속에서 죽어가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땐 내 몸도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나는 생전 죽지 않는다

죽어도 죽어서도 녹지 않는다

미리부터 새까맣게 질려 태어 난 이 몸뚱이로는

구멍 난 데로 한을 쏟아내는 일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아가리를 있는 대로 턱 벌려 숨 한번 쉬고 꺼지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젠장, 세상에 무슨 이런 인생이 다 있는지...

 

-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마지막 연

 

이런 체념과 버무려진 냉소는 결코 썩지 않는 비닐봉지의 속성에 맞물려 있다. 오기라 불리우든 민초의 힘이라 불리우든 현대사회의 소비적이고 일회적인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만이 극복되어질 수 있는 문제이다. 「커피 믹스」, 「커피 자판기」, 「댄서의 순정」과 같이 1부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는 일련의 시편들은 기계화된 인간의 사랑과 기계를 사랑하는 인간의 환상 속에서 ‘불어대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것 밖엔 / 아무 것도 모르는’ (「댄서의 순정」)비루한 삶에 대한 증언이다.

 

이름을 부르면 쓸쓸한 휘파람 소리로 답할 것 같은

가슴과 등외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담이다

 

(중략)

 

너무 오래 서있었을까 요즘들어

거북등 같은 이 몸에 담이 자주 든다

 

- 「담」

 

집요하기조차 한 이러한 서러운 삶에 대한 증언은 보편적 존재의 실재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아무리 그래도 비극적 삶에 순응하는 것보다 이를 극복하는 적극적 대안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 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

 

비루하고 소외된 삶의 증언은 비단 국외자로서의 위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쓸쓸한 쉰 다섯의 남자가 화자로 등장하는 시 「그남자 나이 쉰 다섯」은 시인이 바라본 남편의 뒷모습이며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든 꽃 모양을 하고 잠든 아내의/ 축 늘어진 팔이 내 목을 누르고 있었지/ 왠지 식탁 앞에 아내 얼굴 바로 볼 수 없었어/ 낡은 구두 밑으로 밟히는/ 노란 은행잎을 비켜가며 출근했지

- 「그남자 나이 쉰 다섯」

 

 

나도 가끔은 치마를 입는다

그런날엔 온 바람을 다 맞고 싶은 거다

내 안에 숨은 바람을 죄다 쏟아버리고 싶은거다

하고 싶은 말 모조리 내뱉어버리고 싶은 거다

울고 싶은 울음 통째로 흘려버리고 싶은 거다

...

 

가끔은 나도 치마를 입어보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다

가슴은 이미 바람 든 무처럼 푸석하다

다 알면서도 가끔 치마를 입고 싶어 한다

걸을 때마다 치맛자락에서 쓰을쓸 소리가 난다

 

- 「 나도 가끔은 치마를 입는다」부분

 

쌀쌀맞게 보이는 인상의 의사를 만나던 첫 날,

세상살이가 어떻드냐, 묻길래

흐린 세상 건너가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 사는 건 어떻게 보이더냐, 묻길래

피사의 사탑 기울 듯 비뚤어 보인다고 했다

묻는 말에 또박또박 그러나 약간 급하게 대답했다

하루 두 끼니의 약 복용과 함께 푹 쉬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두 끼니의 약을 먹고 아주 푹 쉬어 보았다

 

두 번 째 만났을 때도 매한가지로

세상살이가 어떻드냐, 묻길래

조금은 우습기도 한 날이 있기도 하다 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 사는 건 어떻게 보이더냐, 묻길래

돈 타령 사랑타령 좀 그만들 했으면 좋겠습니다, 고

딴엔 매우 담담하고 예의 바르게 대답을 한 것 같은데

의사의 고개가 좌우로 기웃거려 현기증이 났었다

두 끼니양의 약을 한 번에 먹어 치워보기로 했다

 

한결 자상해진 듯 한 의사와 세 번째 만나던 날엔,

지구의를 돌리며 사는 기분이 든다고 먼저 말했다

내담자인 나보다 의사가 더 긴장한 듯 해 보여서

괜찮으니 맘 놓고 질문해 보라며 웃어 주었다

오늘은 하루 세 끼니의 약을 받아왔다

축복처럼 일용할 양식을 한 끼니 더 늘어나게 해준

고마운 상담의사를 위해 담엔 무슨 얘길 마련해 갈까나

 

안식처로 돌아오는 길엔 하늘이 유난히 높아 보였다

 

- 「신경정신과에서」 전문

 

이와 같은 쓸슬한 체념과 세상에 대한 냉소는 어떻게 극복되는 것일까? 시인은 여전히 혼탁하고 말 많고 탐욕스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세상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타도해야할 대상을 명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푸념으로 던져 놓은 듯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와 같은 지름길을 피해서 먼 길을 우회해서 돌아간다. 즉 , 삶의 운명을 천지불인 (세상은 인자하지 않다)의 의미에 의탁하므로서 부조리하고 엉망인 삶을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고독한 염쟁이」를 읽어 보자.

 

떡갈나무가지에 그물을 치고 사는 고독한 염쟁이

비단실로 수의를 짓는 나는 갈색은둔자거미

한벌의 수의가 지어질 준비되어가는 즈음

저기 저만치서 오늘로 생을 마감하는 이가

휘적휘적 휘 이 적 내게로 다가오네

저이의 마지막 생을 내가 다 마셔버려야겠네

지고 갈 수도 없는 외로운 명을 거둬주어야겠네

마지막 가는 길 손잡아 줄 이 하나 없는 이여

이승에서의 버거운 짐 내게 부려놓고

이젠 가벼이 가벼이 가시게나

이후로는 부디 안락했으면 좋겠네

잘 가시게 오늘 나의 아름다운 친구여

저이의 숨이 멎는 순간 내 몸이 뻐근해지겠네

고독한 염을 마치고 나면 내 다리는 휘청거리겠네

내 가슴 속 눈물 주머니가 보름달처럼 탱탱해지겠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먹이사슬에는 공평하게 서로의 몸을 내어주는 만물동근 萬物同根의 섭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이 귀뚜라미와 같은 미물과의 따뜻한 소통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밤

유난히도 애절하게 노래하는 그대여

자네가 찾는 짝의 집이 여기인가

 

기나긴

가을밤 홀로 새워야 할 내게도

한 소절 가르쳐 주지 않겠나

- 귀뚜라미에게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윽고 여름날 폭우로 빚어진 아수라장에서 놀라운 깨달음을 건진다. 폭우로 담이 무너지고 담이 무너지면서 대추나무가 쓰러지자 뒷산 뻐꾸기가 부음을 알리고 나비와 구름이, 낡은 내 자전거가, 앵두나무가, 보도 블럭이 지렁이와 함께 꿈틀거린다. 이 현상을 시인은 「弔問」한 마디로 집약하므로서 이 세상의 모든 대립항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심오한 화엄의 돈오가 아니더라도 시인의 눈은 맑고 깊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를 궁구하지 않아도 시인이 체득한 세상살이는 슬퍼하되 증오하지 않고 외로워하되 허무에 빠지지 않는 경지에 이르르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은 글을 속일 수 있어도, 글은 사람을 숨기지 않는다

 

『황금빛 주단』은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삶의 기록이다. 시집 『황금빛 주단』의 성과는 질펀한 이야기의 풀어냄으로부터 응축된 직관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사유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호수이다// 제일 아름다운// 空이다’ ( 「가을하늘」 전문)와 같은 성취는 시와 산문 사이에서, 표현과 진술 사이에서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며 터득해낸 시인의 내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사태)이나 현상 속에서(이야기) 진실을 찾아내려고 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보편화된 교훈은 교언 巧言으로서 뒷막음을 할 수 있지만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서정은 사실의 증언으로부터 멀리 떨쳐나와 여백의 공간을 확보할 때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름다운 인생」이나 「황금빛 주단」과 같은 시는 시인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시법으로서 깊이 새겨둘만하다고 생각한다. 「황금빛 주단」을 읽어보자.

 

저녁 무렵, 베란다로 이어지는 주방문이 수상쩍다

누군가 꼭 서 있을 것 만 같은 묘한 기색이 들어

문을 살그머니 열었더니만

이런 세상에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금빛 주단이 발아래로 깔린다

그 한 자락을 끌어당기려 해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

그냥 깔아 둔 채로 멍하니 서 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 위에 누워본다

엎치락뒤치락 거리니 온 몸에 휘휘 감겨온다

비단을 두른 양 부드럽고 따순 기운에 눈마저 감긴다

꿈을 꾸듯 황홀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서서히 몸이 식어가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어느새 몸에 감겼던 비단이 스르르 흘러내리고 있다

흘러내려가는 비단은 벽을 타고 창을 너머 가고 있다

아름다운 주단을 깔아주고 간 이는 누구일까

이내 황홀한 기운을 다시 걷어가는 이 누굴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서운타고 해야 하나

내일 이맘때엔 소쿠리라도 하나 놓아두어야 할까보다

 

 

황금빛 주단은 ‘황혼의 빛’이다. 저녁 무렵 집안으로 스며 들어온 빛을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내일 이맘때엔 소쿠리라도 하나 놓아두어야 할까’ 마음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현대인이 잊고 있는 서정의 힘이다. 과학의 잣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편리함에서 벗어난 이 느낌의 손길을 전해주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한다면 시인 한옥순은 이제야 제대로 길을 찾았다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른다고 해서 언어의 자의성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시인들은 언어를 난폭하게 다루고, 어떤 시인들은 언어를 치장하여 자신의 내심을 감추는 외화내빈 外華內貧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황금빛 주단』은 시인 한옥순의 흉허물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은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글을 속일 수 있어도, 글은 사람을 숨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