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진명희 시집 『달빛, 홀로 서다』
시간을 각인하는 몸의 언어
나호열 (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1.
『달빛, 홀로 서다』는 진명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그의 시력 詩歷에 비추어 본다면 다작 多作이라 할 수 없겠으나 서 너 권의 시집을 묶어낼 만큼의 시가 저장되어 있다는 시인의 토로 吐露가 있고 보면 시에 대한 열정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무딘 감각, 습관적 인식의 안온함으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고 반응하는 것은 비단 시인만이 가지는 특권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여러 형태의 방편을 가지고 있으며 이 드러냄이야말로 저 창 없는 모나드 monad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살이의 관계성을 성숙시키는 통로가 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시인은 특별히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약속을 한 존재이다. 그런데 시인이 택한 언어는 간결한 소통의 열쇠가 아니라 오히려 폐쇄적인 자물쇠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인의 언어는 지시 指示가 아니라 지시 너머에 꿈틀거리며 너울대는 그림자와 같은 ‘느낌’을 보여주는데 있다. “잘 익은 사과는 맛이 있다” 는 지시이지만 “맛이 있다”는 사태에 대한 느낌은 개별적이고 상징적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사람은 다 시심 詩心을 지니고 있다” 는 언명은 옳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즉 소통의 언어(지시적 기능)와 정서의 언어(느낌)를 동시에 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때 “모든 사람은 다 시심을 가지고 있다”는 언명은 옳을 것이고,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구사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 폐쇄적 언어 사용(정서적 기능)에 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 시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허위가 될 것이다. 시에 대한, 시의 정의에 대한 저 무수한 주장을 들어보라!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형국에 직면하여 다시 “시는 무엇이고 시심은 무엇인가?”라는 우문에 엉거주춤 서 있게 되지는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오늘의 시들이 분지와 분열, 혼합과 융합의 다양성과 백가쟁명의 키재기 다툼에 휩쓸려 있다 해도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온 소중한 축복일 것이다. 그래서 진명희의 시 작업은 모든 촉수를 순간 순간에 열어놓고 감응하는 열정에 다름 아니며 이는 생활과 시를 한 묶음으로 대하는 진지함의 총화일 것이다.
시인은 봄날 들녘 한 켠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민들레처럼 자신의 생명을 보듬어줄 대지를 기다린다. 바람에 기대어 어느 씨앗은 속절없아 강물에 떠내려가고 또 어느 씨앗은 바위 틈에 힘겹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시인의 말, 즉 시는 민들레 홀씨처럼 다양한 독자의 선택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영영 새로운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시의 운명을 감지하는 시인은 더욱 더 강열한 폐쇄적 언어에의 이끌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딱딱한 견과 堅果의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명희는 『달빛, 홀로 서다』를 통해서 견과 堅果의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을 지향하면서, 堅果의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행을 간구하고 있다. 一卽多多卽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화엄 華嚴을 향한 더딘 걸음이 보일 듯 말듯 시집 『달빛, 홀로 서다』에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은 여간한 즐거움이 아닐 것이다. 한 편의 시가 동감을 이끌어내는 단계, 추체험을 통해서 공감을 획득하는 단계, 더 나아가서 소통의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一卽多多卽一의 화엄 華嚴, 즉 원융 圓融에 다가선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과제일 것이다. 『달빛, 홀로 서다』는 섣부른 달관이나 세계와의 합일을 거부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성숙은 체험과 체험의 숙고, 갈등과 불신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진정으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평정심을 일관되게 지닐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말이 문득 찾아온 깨달음 (돈오 頓悟)이거나 아니거나를 떠나서 시인의 언명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체험의 숙고(점수 漸修)가 오롯이 보여져야 하지 않을까?
2.
시집 『달빛, 홀로 서다』는 평화로운 관계맺음에 바쳐져 있다. 아니 이 모든 만물의 평화로운 관계맺음을 희구하는 점수 漸修로 이루어져 있다. 이 평화로운 관계맺음이 날줄이라면 시간의 궤적은 씨줄에 해당된다. 시간을 대상화한 작품은 눈에 띄지 않지만 『달빛, 홀로 서다』의 전편에는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시간이 핏줄처럼 얽혀 있다. 『달빛, 홀로 서다』의 서정적 기조基調는 이런 시간의 배열로 인하여 역동적 흐름을 타게 된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달빛, 홀로 서다』의 마지막 4부는 봄에서 겨울까지의 풍경과 감상을 담은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의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거나 그 변화의 양상을 관찰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시간을 의식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우리는 편의상 생애를 몇 단계로 구분하지만 청소년기를 건너가며 청소년기를 인식하고, 50대를 자나가며 50대의 표징을 강렬하게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추억의 힘이거나 아니면 병고를 겪으며 우리는 자신을 옭죄고 있는 시간의 사슬을 아프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가을날,/단풍잎이 내 몸으로 진다’ (「단풍잎이 떨어지네」)거나 차가운 겨울비가 ‘아, 잊혀지는 것들이/그렇게 내 몸에 젖어 들었다’( 「겨울비」)처럼 지워버려야 할 아픈 과거로 되살아난다거나, 시간의 축약인 낙엽이 ‘바람이런가/노래이던가/자꾸만 흘러가는 /시간의 그림자’ (「낙엽」)로 되비친다는 것은 시간의 결과물인 변화를 거부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다. 이렇게 변화 속에 놓인 존재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관계맺음으로 시선을 이동시킬 수밖에 없다. 관계맺음의 정황은 사랑, 화해, 결속 등의 부동의 관념이 존재의 본질적 요소임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구체화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때 시적 대상들은 서정 抒情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과학적 진실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연이 시적 자아와 동일시되고 말걸기의 대상이 될 때, 세계의 본질이 자아의 본질이라는 새로운 영토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맺음의 궁극적 대상은 말할 나위 없이 ‘인간’이다. 그러나 앞서 진명희 시인의 시작에 있어 눈여겨 볼 점으로 섣부른 달관이나 세계와의 합일을 거부하는 진정성을 들었는바 이는 무조건적 긍정이 아니라 부정을 통한 긍정의 도정을 생략하지 않는 그의 근기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원숭이가 잘 먹는다는
바나나, 사람들도 잘 먹는다
매끈한 껍질 속엔 껍질 보다 더 매끈한
속살이 들어있다
동물 중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원숭이
사람들도 잘 먹는 바나나
원숭이도 잘 먹는다
잘 익은 바나나일수록
겉과 속이 같은 색이다
겉과 속이 같은 색인 과일이
어디 바나나 뿐이랴만
바나나를 잘 먹는 원숭이들,
자꾸만 사람을 닮아갈까 두렵다
- 「사람을 닮은 원숭이」 전문
알다시피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500만 년전 영장류인 침팬지로부터 분화,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95%이상의 유전자가 인간과 일치하는 영장류는 오늘날 인간의 사회적 행동 곳곳에 그 원형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과학적 증명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잘 익을수록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은 교언영색하지 않은 바른 됨됨이를 이르는 말이다. ‘생각도 바르고 행동도 바르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사실이어야 하는데 우리를 둘러싼 삶은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다. 겉은 그럴싸한데 속은 텅 비어 있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시인은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을 걱정하는 대신 원숭이가 사람을 닮아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인간은 갈 데까지 갔으나 원숭이는 아직 진화의 기회가 남아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얘기일까? 일부에 국한된 인간관(소수의 사람은 바르지 않다)이라 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부분을 놓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성동격서 聲東擊西의 우회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편적 인간들의 관계맺음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기도 한다.
탁자 위에는/빨간 장미 한 송이가/힘없이 꽂혀 있다/죽어도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거짓말이/허공에 떠돌고 있다/ 싹트지 못할 씨앗 한 점/피디가 만 팔월의 코스모스처럼 나부껴댄다
- 「 어떤 인연」 부분
어느 여름날 지인과 함께 냉면을 먹는 풍경이 「어떤 인연」의 배경이다. 인연은 참으로 귀하고 함부로 끊을 수 없는 것인데 ‘가위로 애써 자르지 않아도 쉽게 끊어지는 냉면발’ 처럼 허위와허언으로 서로에게 딴죽을 걸고 있는 것이 오늘날 공동체 정신을 잊고, 잃어버린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는 조그만 이익과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 인연을 이용한다. 냉면발을 가위로도 쉽게 자를 수 없는 법인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인연을 시인은 냉소적으로 우리의 아픈 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야유와 냉소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신념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풀보다 약한 모습으로 태어나
가장 강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만난다.
- 「마흔 일곱의 정원」 2연
시인은 ‘죽어도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거짓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풀보다 약한 존재임을 아는 부정의 정신은 그래서 ‘가장 강한 모습으로’ 버티고(버텨야 할) 있는 긍정의 힘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성공과 안락의 정답을 알기 때문에 인생은 고달파지고 소외당한다. 이 평범한 진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전혀 모르고 있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긍정하고 부정을 극복하는 정신이야말로 시인에게 필요한 미덕인 것이다.
『달빛, 홀로 서다』의 성취는 이와 같이 앵무새처럼 삶의 정답을 읖조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정답을 증명하고 체득하는 구도의 정신을 한걸음씩(한 편 한 편)되새기는 끈질긴 태도의 발현에 있다. 번득이는 비유와 잠언으로 가득 찬 시들과 이미 득도의 경지에 들어선 듯한 시인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진명희의 시 작업이 소중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의 모티프가 자연이든, 인간이든, 현상이든, 본질이든 간에 그 대상들을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그것들의 숨결과 자신의 호흡을 일치시키며 서로 몸 섞는 경지는 시간의 변화를 허락하면서도 그 변화 속에 잠들어있는 부동의 진실을 저버리지 않는 시인의 올곧음이 없다면 결코 이룩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3.
그리하여 『달빛, 홀로 서다』의 빛나는 성과는 서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되 세계의 자아화나 세계와의 동일화의 기계적 합일을 넘어서서 머리로 분출되는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언어의 살내음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흔히 서정시가 범하기 쉬운 감상 感想의 응축이 과도한 감상 感傷의 분출로 변질되는 위험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신두리에 가면
소리 지르는 바다를 만난다
소리의 알갱이들로 모인 수많은 모래알들
누구든지 신두리에 다녀오면
한 편의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른다
바다의 페이지마다 그려있는 오선의 시어들
사막 한 귀퉁이를 닮은
침묵의 땅,
침묵을 뚫고 일어서는
모래톱에서는 해당화가 향기를 품고
구름이 가득한 밤이라도
달맞이꽃들은 무리지어
달빛사냥에 나선다
아무도 다녀간 적이 없는
원시의 모래밭, 무수한 발자국들을
신두리의 바다는
지우며 지우는 하루가 바쁘다
- 「신두리에 가면」 전문
지금까지 이리저리 말을 바꾸고 부연했던 말들을 요약한다면 「신두리에 가면」을 정독하면 그만이다. 신두리에는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사구 砂丘가 있는 곳이다. 오랜 세월 밀물과 썰물이 모래언덕을 만들고, 그 밑에는 엄청난 양의 민물을 저장하므로서 기름진 농토를 일구게 만드는 자연의 보고이다. 이 사막 아닌 사막을 훼손하려는 개발론에 맞서서 우리나라 최초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통하여 민간이 그 일부분을 매입하므로서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최소한 지켜낸 환경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바로 신두리 사구 산 하나 너머에 화력발전소가 있고, 어미 가슴처럼 너른 서해 바다가 있다. 쓸모없는 모래밭에 해당화 몇 무더기 피어 있고 모든 변화는 천천히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고 하물어져 간다.
「신두리에 가면」 은 필자의 짧은 식견으로 시집 『달빛, 홀로 서다』의 전편을 집약하는 시일뿐 만 아니라 시인 진명희의 시업의 새로운 전기를 일으켜 세우는 주목할 만한 시라고 평하고 싶다. 시간과 시간이 아우르는 변화와 그에 맞물리는 자연의 운동, 원시의 모래밭에 무수한 발자국들을 찍어대는 인간의 천진난만과 대비되는 무위의 바다는 시인에게 잊혀졌던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 아니 시 「신두리에 가면」 그 자체가 한 편의 노래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시를 암송해 보자. 우리가 까마득히 잊었던 원시의 노래, 너와 나의 구분이 없던 ‘두레’의 흥얼거림이 느릿느릿 우리 곁에 어느새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달빛, 홀로 서다』를 평하면서 이은봉은 ‘진실 혹은 지혜의 발견’이 진명희의 시세계임을 직시하였다. 이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진명희 시인이 『달빛, 홀로 서다』를 통하여 삶의 진실, 지혜의 발견을 이루어 내었다는 증언이기 보다는 진실과 지혜를 간구하는 방법론의 탐구에 힘을 쏟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시인으로서의 진명희의 건강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득도의 경지, 무아지경은 불립문자이다. 시인의 사명은 불립문자 직전의 분투의 기록을 남기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쓴 시인론·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옥순의 시 나이테, 사슬을 풀어내는 나무의 노래 (0) | 2011.04.27 |
---|---|
이성의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 (0) | 2011.04.16 |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0) | 2011.02.22 |
상식 常識과 감상 感傷과의 싸움 (0) | 2011.02.07 |
윤준경의 시 - 인간의 겉과 속을 잇는 사랑의 탐구 (0) | 201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