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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4. 16. 00:14

 

 

서정적 자아회복을 위한 길찾기

 

나호열 (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하늘을 만드는 여자』 는 이성의 시인의 첫 시집이다. ‘처음’이란 말이 던져주는 설렘과 함께 찾아오는 두려움은 도전과 성숙의 또 다른 양상일 것이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고통 끝에 출산의 기쁨을 맞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처럼 시인은 편편의 시를 통해 사유의 뼈를 세우고 살을 만들며 그것들에 영혼을 깃들게 하는 한 권의 시집을 완성한다. 마치 어머니가 되겠다는 막연한 도전이 출산의 고통 끝에 새 생명을 낳고 젖을 물릴 때 성숙의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시인들의 첫 번째 시집에는 시인이 살아온 과거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짐작하게 만드는 징후가 곳곳에 숨어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늘을 만드는 여자』와의 조우는 시인이 살아왔던 과거의 유적지를 통과하여 시인과 함께 언젠가 도달해야할 이상향을 향해서 자연스러운 동행을 허락하는 셈이 된다.

 

어째든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는 시인 이성의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정신의 산물産物이며 선물 膳物이다. 시인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여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지 모르지만 이성의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서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현대시의 서정적 자아 연구』라는 시인의 논문은 시인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서정 抒情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그 서정을 담지하는 자아 自我의 정립을 통해서 시의 힘찬 첫걸음을 내딛고 싶어하는 염원의 사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일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지녀야 할 ‘서정’은 시인이 구축하고 있는 자아의 양상에 따라 그 의미의 진폭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무생물과의 대화,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화를 ‘서정’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리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유물 唯物의 이데올로기, 이미 너무 멀어진 자연과의 간극 間隙은 쉽게 고전적 서정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화된 자아, 디지털화된 감각적 사고는 고전적 서정과의 합일을 오히려 기계적 조작으로 몰아세우는 양상이기도 할 터이니 말이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정’을 이야기할 때 현대의 공포와 전율, 분열과 불안 등이 고전적 서정의 부록이 아니라 오히려 서정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넓디넓은 서정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세계’를 어떻게 시인의 자아 속으로 끌어들일 것이며 그 ‘세계’가 자아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작용하는가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오늘날의 시를 즐겁게 읽고,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편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세계’를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자아로 끌어당기게 되면 시는 고전적 서정에 머무르게 되고 자아가 ‘세계’와 반발하며 튕겨낼 때 본질의 해체와 무화 無化의 서정이 강화될 것이다.

 

『하늘을 만드는 여자』의 독법은 시인이 규정하고 있는 서정의 영역, 시인의 자아와 함축된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길항 拮抗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때 보다 투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촉수를 건드리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현상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시인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철학자처럼 그 반응의 본질을 규명하고 싶어하는 존재이다. 본질은 항구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을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생명의 영원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이를 테면 혹한에 온몸을 웅크리며 ‘날이 몹시 춥다’ 는 인식은 일반적이지만 날이 몹시 추워 ‘온몸을 웅크리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은 과학적 인식을 넘어서는 특수한 인식이다. ‘유리를 닦는 일이 마음의 얼룩을 지우는 행위’( 「투명함에 대하여」)로 인식하는 것이, 더 나아가서 ‘투명해지도록 닦는다는 것은/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 「투명함에 대하여」)로 이행하여 가는 심리적 변화는 과학이나 철학이 감당할 수 없는 인식의 영역, 즉 서정과 자아의 작용이 아니면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될 것이다.

 

왜 시인은 일반인들이 꺼려하는 인식(추리)의 도약을 행하면서 문자 文字로 읽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 밤이 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는 전등을 켠다. 전등불 아래서 우리는 낮과 다름없는 일상적 행동들을 불편 없이 수행한다. 이 불빛은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어둠 속으로 뻗쳐 나간다. 아주 먼 곳에서 어느 사람이 이 불빛을 만난다. 길을 잃었거나 허기지고 지쳐서 쉴 곳을 찾는 사람에게 이 불빛은 희망의 메시지일수도 있고 구원의 안내자가 될 수도 있다.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나를 만난다’ ( 「나의 길」) 는 시인의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타자들에게 의도하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다음의 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돈을 벌 줄을 모른다

나는 꽃을 피울 줄도 모른다

나는 세상을 헤엄쳐 갈 줄도

그 곳에 어떻게 도착하는지도 모른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두운 지붕아래

먼저 불을 밝히는 것

 

사람 한가운데를 푹 딛고 갈 줄을

아직 나는 모른다

- 「어린 왕자」 전문

 

위의 시는 ‘한 개인인 이성의가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인으로서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는 어두운 지붕 아래 먼저 불을 밝히는 일(시를 쓰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고, 그 불이 사람 한가운데를 푹 딛고 갈 줄을 아직 모르는( 시를 통하여 타자와의 평화로운 소통이 가능한가의 여부)자신에게 던지는 다짐과도 같다. 여전히 시인에게 타자와 타자들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그 불안정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물론 그 불안정과 불안은 시인이 스스로 야기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습성이 자신을 자빠트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완벽이라는 추상에 걸려 자빠지곤 한다

그 자국이 크면 클수록 좁아져만 가는 생

허물어지는 시간을 만난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이면 골목에 혼자 우두커니 서

폐부 깊숙이 지나가는 세상바람을 생각한다

(.... 중략)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걸어 가 보지 못한 그들만의 둘레

낯선 골목 낯선 보도블록의 냄새들이 회색빛처럼 깊어만 가는

길 저 편으로

나의 골목이 마구 달아나고 있다

 

- 「이방지대(異邦地帶)」 부분

 

한 마디로 시인에게 있어서 세계는 낯설고 타자들과의 관계는 서먹하다. 그러나 세계의 낯설음과 타자들과의 소원함을 일반화하여 그 현상들을 비판하거나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든 세계와 타자와의 안온한 소통과 화해를 꿈꾸면서도 그 소통과 화해가 탈자아 脫自我의 모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시인의 서정은 점점 더 폐쇄적이고 자폐적인 상황으로 미끌어 들어가게 된다.

 

이와 같은 폐쇄적이고 자폐적인 성향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분명 이성의 시인이 정의한 ‘서정’은 시인의 외부(자연 도는 타자)의 현상과의 일체감, 동질감의 성취와는 거리가 있음이 틀림이 없다. 외부의 현상을 과학적 인식의 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낭만적 정조로 해석하지도 않는 시인의 태도는 『하늘을 만드는 여자』 전 편을 관통하는 수사 修辭의 건조함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의 ‘서정’을 움직이는 ‘자아’는 ‘완벽이라는 추상’에

몰입되어 있는 자아인 까닭에 강우 降雨, 눈, 바람, 태풍 등의 자연현상이나 개화, 낙엽등의 생명활동, 노숙자 등과 같은 음습한 삶의 풍경까지도 몽환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치열하고도 치명적인 아픔이다. 왜 우리는 봄날의 꽃들에 환호하고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눈밭에 시린 눈을 닦는가? 꽃들이 풀과 나무들의 남성의 성기이며 목련 꽃잎이 북쪽으로 잎을 뉘인다는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고 삶의 화양연화에 대입하는 자의적 恣意的 감흥에 도취하는 것이 ‘서정’의 달콤함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시인이 그 달콤함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까닭은 삶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 비극에 아직 굴복하거나 타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 「분수」를 읽어보자.

 

밤 인파사이로 물길이 치솟는다

온갖 무지갯빛 의상을 입고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른다

낮게 높게

둥글게 엇갈리게

구부렸다 폈다

누웠다 앉았다

일상의 행렬들이 뒤섞여 춤을 춘다

그래 삶은

끝없이 오르다가 언젠가는 떨어지고야 말지

서로 끌어안다 헤어지고

서로 등을 돌리다 다시 만나고

그래 삶은

무리지어 오르다 언젠가는 홀로

물안개 되어

사리지고 말지

 

분수는 인간이 오 육 백 년 전에 고안해낸 인공 구조물이다. 조경과 관상을 위해 만든 구조물에 인간이 환호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의 존재인 신을 고안해 낸 것과 일맥상통한다. ‘특별히 달라질 것도 좋아질 것도 없는/나지막한 하루/ 그 틈과 틈 사이에서 꿏들이 진다’( 「탑돌이」) 는 삶의 권태는 법과 놀이, 종교와 같은 여러 제도들을 만들어내는 결과 를 이루어내었다. 분수도 그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물을 허공에 뿜어내도록 만들어 놓고 잠시간의 열락에 생명의 소멸을 잠깐 잊게 만드는 최면제에 불과할 것이다. 시인은 그 분수를 예리하게 관찰한 끝에 ‘서로 끌어안다 헤어지고/ 서로 등을 돌리다 다시 만나고/그래 삶은/무리지어 오르다 언젠가는 홀로/물안개 되어/사리지고 말지’ 라는 체념과 냉냉한 관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체념의 강화는 어쩔 수 없는 굴복이나 타협이 아닌 정정당당하게 유한한 삶에 맞서고자 하는 자아의 의식작용이다. 그러나 시 「도시의 얼굴」에 이르러 시인의 의식은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 밀림화 된 인간이 ‘그들은 가끔 강이 되어 흐르고도 강이 벗는 울음소리를 모르’고, 이제 ‘싱싱한 여자들의 자궁 속에서도 별들은 자라지 않는’ 불임의 세태를 증언하면서도 ‘마침내 지구는 해빙을 시작하고 기다리던 그들의 저녁 별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고 부언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무척 작위적이지만 시인이 끝내 잉태하고 싶은 꿈이 무엇인가를 설핏 드러내는 중요한 길목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도록 하자.

 

오월 안개 같은

길 하나를 보았어

 

여기쯤에

이른 아침 하얀 풀꽃들이 덮이는 논두렁이 있고

저기 밭 고랑너머로 좋아하는 제비꽃 붉은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피었어

어머니의 살결을 닮은 하얗고 보드라운

버드나무 숲 바람소리도 있었지

 

수놓은 무명 앞치마

실크 머플러를 살포시 두른

고향이 걸어오고 있었어

 

- 「길 하나를 보았어」 전문

 

「길 하나를 보았어」는 이미 변화해버린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지금 시인이 바라보는 아스팔트가 깔린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광폭의 도로가 예전에는 논두렁, 밭두렁이었을 것이다. 옛길을 새 길이 덮어버리고, 허물어진 집터에 잡초가 무성하지만 흙으로 표상되는 대지의 힘은 강한 생명의 복원력을 발휘하여 그 본질을 회복할 것임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굳이 융합의 원리를 설명하지 않아도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세계는 동전의 양면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슬픈 까닭은 기쁨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로움에 괴로워하는 까닭은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복원력이라고 힘들여 이야기한 부정의 부정은 끝내 긍정의 성취로 이끌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쉽사리 시인이 낭만에 기대지않은 까닭이 서서히 그 실상을 드러내는 이와 같은 형국은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를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과도 상통한다.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의 성취는 ‘서정’과 ‘자아’에 대한 성찰이 시인의 인간됨의 목표와 부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화려한 수사로 덧붙여진 상상력의 발화는 시를 읽는 무한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알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과 사건의 배후를 드러내는 이른바 발견의 시에 무한한 감탄을 보낸다. 득도의 경지를 넘어선 예지의 시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의 성취는 이와 같은 경지와는 사뭇 다른 곳에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잠시 소개한 시 「나의 길」에서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나를 만난다’ 는 시인의 언명은 투박하면서도 그 투박함 만큼의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과 일치한다. 이는 옛 선인들이 시문 詩文을 익히고 다루는 목적을 수기치인 修己治人에 두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해명이 될 것이다. 내가 오늘 밤 켜고 있는 이 등불이 저 홀로 퍼져나가서 나그네나 길 잃은 이에게 닿는 것은 이 등불로 내가 편지를 쓰고 시집을 읽고 난 후에 벌어지는 부차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녀는 오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끌어당기며

살집 도톰한 시간을 헤엄쳐 가고 있었다

 

날고 싶었다

생이 가장자리를 조금씩 넓혀갈 때마다

찢기고 멍든 상처들이 세월의 등성이에 물들어 누울 때마다

날개 하나씩 달고 싶었다

작은 골짜기를 훨훨 날아 대양을 건너고 샛강을 따라 천천히 누우면

빨갛고 노란 꽃들이 피어날 것만 같아

피어날 것만 같아

어머니 열 달 뱃속을 채운 아가의 첫 울음

그 그리운 안간힘으로

 

언제 찢기어 질지 모르는 불법체류 부피 얇은 옷으로

낯선 세상 낯선 불볕의 땅을 수도 없이 날아오르고 있다

과일 가득히 실은 3톤 트럭의 향기로 하루 종일

하늘보다 더 높은 그녀의 하늘을 이어 대고 있다

 

날개 짓 처음 파닥이던 하늘 그 가까이로

 

 

- 시 「하늘을 만드는 여자」 전문

 

시인 이성의의 꿈은 ‘하늘을 만드는 여자’가 되는데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하되, 모든 것은 갖지 않는 하늘의 경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 왜 ‘하늘을 만드는 사람’이나 ‘하늘을 만드는 신’이 아니고 하늘을 만드는 ‘여자’이고 싶어하는 것일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자궁을 지닌 존재는 여성이다. 그 여성은 사람을 낳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낳는다.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하늘을 만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염원은 한갓 몇 줄 시를 끄적이는 재주나 염원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시집 『하늘을 만드는 여자』가 산고를 겪은 끝에 세상에 얼굴을 내밀 때가 되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시인 이성의의 먼 길 앞에 신발 한 켤레로 놓일 때가 되었다.

 

부디 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는 존재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