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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2. 22. 21:56

 

<계간평>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나 호 열

 

계절이 한 번 바뀔 때마다 열 권에 가까운 문학지들이 책상 위에 쌓인다. 부채 같기도 하고 짐 같기도 한 그 잡지마다 많게는 30 명, 적어도 열 다섯 명 이상의 시인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한 편은 아쉽고 세 편은 너무 많으니 평균적으로 한 시인 당 두 편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그밖에도 집중조명, 소설이나 수필 몇 편이 얹혀있기도 하기 때문에 한 권의 문학지를 정독하기에는 한 달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니 어쩌랴!. 먼저 귀한 소설 한 편 읽고, 그 다음에는 쓰윽 눈길로 시 제목을 훑고, 혹시 낯익은 시인들의 이름이 있나 더듬고 아쉽게 다음을 기약하며 책상 밑으로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속도의 시대에 걸맞게 쉽게 지나치고 부유浮游하면서 오늘의 삶은 어제를 쉽게 잊어버리지 않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구조로 변화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작품 읽기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면 억지 주장일까?.

 

다른 켠에서 고백하건대, 요즘의 시 읽기는 고통스럽다. 다양한 경향의 스펙트럼을 포용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의 부족, 어쩔 수 없이 개인적 취향의 편향이 굳어져버린 까닭이다. 여기서 잠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시 이외에 장르에 대한 비평을 배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몇 마디 붙여야 할 것 같다. 극소수의 잡지를 제외하고는 소설 작품을 게제하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아시다시피 소설의 게제는 메이저 자본의 휘하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글쓰기 분량의 수고로움에 대가(원고료)를 받을 수 있는, 그런 행운을 거머쥘 수 있는 작가 또한 극소수이기 때문에 작가의 입장에서나 잡지의 입장에서나 게제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받은 극소수의 작가들은 후원의 조명을 받는 반면에 선택에서 제외된 많은 작가들은 발표 기회를 제한 받을 뿐만 아니라 작품마저 사장될 위기에 상시적으로 놓여있다. 이러한 "풍요속의 빈곤"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수필 장르에도 파급되는 것으로서 수필의 위상과 평가는 단지 리뷰Review의 편한 통로가 아니라 수필비평의 정립 내지는 학문적 탐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이 번호의 계간평은 부득이 '시' 분야로 집중될 수 밖에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 '새로움'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많은 독자(일반인)들이 요즘의 시가 어렵다고 한다. 여기서 독자란 시 읽기의 즐거움에 익숙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 일반인이란 문학 내지 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로서 아예 문학을 어려운 문자놀이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 대체로 '요즘의 시'란 7,80년대 生, 또는 2000년대 이후 활동을 시작한 시인들의 작품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시들은 일반인(독자)들이 읽어내기에 쉬었던가? 이상 李箱은 그렇다치고 미당이나 목월이나 조지훈, 박두진, 백석, 지용의 시가 과연 대중적 사랑을 받을 만큼 평이했던가? 그러므로 '요즘의 시가 어렵다'는 언명은 착시현상에 불과하거나 이해부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밥맛에 길들여지듯이 눈으로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음미할 수 있는 것이 시가 아닌 것이다. 넓게 잡아 어느 분야이든 예술의 감상은 충분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교육이 배제된 감응, 시간의 축적 속에서 빚어지는 체험이 결여된 시 읽기는 애시당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쉬운 시를 쓰자!"는 시인의 반응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오세영이 주장하듯 높은 반열의 시인은 쉬운 주제를 쉽게 쓰는 자가 아니라 어려운 주제를 쉽게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요즘의 시가 어렵다"는 사실은 비단 독자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시인들도 동감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상전벽해 桑田碧海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쉽게 변화될 수 없는 동물이다. 정치체제나 경제체제의 변화는 길게는 몇 천 년, 짧게는 몇 백년이 소요된 변화였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지평에 놓여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나 융에 의해서 무의식이 문제되기 시작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존재의 불안(무의식으로서)은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문제이지 신제품처럼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발명품은 아니다. 물론 시대적 상황(정신사적 측면에서)을 외면해서도 안되고, 그런 시대적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시인인 이상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 정신의 내면적 분출을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새로움'이란 형식의 새로움, 언어 구사의 새로움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선행되지 않을 경우 자아분열, 자기기만의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형식의 새로움'은 '산문화의 경향'으로도 나타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산문시의 영역은 그 뿌리도 깊고 연원도 길다. '언어 구사의 새로움'도 이와 같은 산문화의 맥락에서 언어의 폭력적 결합에서 파생되는 상상력의 원심遠心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축은 다 같이 시와 산문의 구분을 파괴하거나 한국어라는 특수성을 과도하게 사상 捨象시키므로서 독자와 작품을 이격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측면이 있더라도 지면이나 공중매체에 등장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독자(일반인)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시의 생명인 생략과 압축, 우리 말이 지니고 있는 가락과 정서를 융합하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여진 '새로운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지엽은 21세기의 새로운 시쓰기를 전망하면서 1. 문명비판의 정신사적 몸부림 2. 솟구치는 생명력에의 경의 혹은 생태환경시 3. 소시민의 건강한 일상성 4. 대지적 여성성, 혹은 존재적 성찰 5. 반구조 혹은 탈중심주의의 경향으로 예견한 바 있다.

"하늘 아래 새로움이란 없다"란 말도 있듯이 창작의 고통, 시인의 문제의식(주제)은 위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시의 어려움'은 위 구분의 마지막 "반구조 혹은 탈중심주의"의 경향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우리말 한글에 대한 엄밀한 탐구와 우리의 얼을 담는 지극한 사랑으로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반응과 표현 방식

 

앞서 언급한 무의식이나 부조리의 문제는 인간이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 즉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면서 걸머진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종교, 법, 정치제도, 윤리체제 등은 잠재된 의식(무의식)의 폭력성과 야비함을 봉쇄하기 위한 벽인 동시에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기폭제이기도 하다. 노예제도와 가축을 기르고 그것들을 양식으로 삼는 행위가 무엇이 다르며 강도질과 전쟁이 무엇이 다른가? 생계를 위해 타인을 상하게 하는 것과 음주운전으로 타인의 생명을 앗는 행위는 또 어떻게 다른가? 부패한 관리와 폭리를 취하고자 매점매석하는 상인은 누가 더 나쁜가? 한 마디로 이 세상의 부조리는 단지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항존하는 나쁜 친구라는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의 해체라는 혁명적 실천으로 위세를 떨쳤어도 그 이성을 해체하는 이성 자체를 거부할 수 없는 난점에 봉착한 것처럼 21세기 한국현대시의 주축이 될 것으로 보이는 반구조 혹은 탈중심주의의 조류도 표현의 주체가 되는 언어의 논리성과 규칙을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전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여기는 지상에 없는 방 한 칸. 나는 여기서 봉인된 채 녹슬어가는 중이다. 하루종일 지리멸렬한 문장들이 구름처럼 떠돌다 목마름으로 내려오는 동안 내가 꿈꾸는 것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것.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덜어내는 일. 이 도시가, 사회가, 친구가 애인이 지하실 박스 속에 담겨 몇 년 째 풀지 못해 썩어가는 책들이 나를 들춰보고 조금씩 떼어먹기를, 그리하여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릴 수 있으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 채로 잠들고, 집 나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은 살아서 내 죽음 지켜보길. 그러니 하나도 새롭지 않은 절망이여 날마다 가지치고 어서 꽃 피워 융성해지시길. 내가 지워진 자리, 내가 지워진 세상을 가만히 만져본다. 어느 날의 저녁처럼 따뜻하여라. 이 방엔 하지 못한 말들이 독이 되어 온 방안을 돌아다니고 불빛조차 소리 없이 낡아 봉인된 편지 위에 쌓여갈 뿐인데

 

- 이승희, 「부치지 못한 편지」 전문, 계간 『미네르바』 2010년 겨울호

 

요즘의 시들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주제의 불투명성 때문이 아니라 소재, 더 세밀히 말하면 객관적 상관물의 부재, 다수의 소재가 복합적으로나타나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뿌리없는 자아, 해체된 자아에 중심을 잡아줄 축의 부재는 명쾌한 시 읽기를 방해한다. 명쾌한 시읽기라니! 투기投企된 현상에 본질을 주입하려는 것이 철학의 짓거리라면 시는 현상의 표현에 주력하는 것이 아닌가! 진리나 진실의 철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개인의 주관이 개입된 인상의 드러냄이 시의 본령이 아니던가! 세세한 평을 덧붙이지 않아도 「부치지 못한 편지」는 이미 부조리한 삶을 알아차린 독자들에게는 모범답안이 될 것이고,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헛소리이거나 지나친 인간의 폄하로 비춰질 것 이다. '지상에 없는 방 한 칸', '봉인', '부치지 못한 편지'로 환치된 자아의 폭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고? 아니면 달관? 우리는 도처에서 파편화되고 떠돌아다니는 소통되지 못하는 개인, 자아의 유령을 만나고 있을 뿐이다.

 

■ 자연과의 대화와 소통

 

대상없는 사유가 존재할 수 없듯이, 무의식을 잡아내는 것 또한 이성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시가 언어로 축조되는 것인 이상, 개별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일까?

 

소래포구엔 갯골만 있고 강이 없다

해발 40미터 한달음의 댕구산 장도 포대에 올라 소래포구 굽어본다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협궤열차는 멈춘 지 오래, 이제 낡은 철교는 페쇄되고 새로 전철공사가 한창이다 갯골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소래대교 영동고속도 지나 버려진 염전과 소금창고가 있다 철교 건너편 빽빽하게 아파트 숲이 들어선 월곶은 밤마다 화려한 네온으로 빛난다 갯골을 따라 포구를 빠져 나가면 좌로는 오이도와 대부도를 잇는 시화방조제가 나타나고 우로는 오백만 평의 바다를 매립한 섬 송도가 있다 거기 송도에서 영종도 인천공항까지 경기만을 가로지르는 21킬로미터의 인천대교가 바다 위에 세워져 있다 21세기 인천의 역사는 매립의 역사다 해마다 매립지가 늘면서 8천년 역사의 소래포구 갯벌은 퇴화되어 염전이 있던 자리 버려진 습지에서 가을볕에 칠면초만 붉게 타오른다

 

소래포구엔 갯골만 있고 강이 없다

 

이태희, 「소래포구에서」 전문, (『시와 산문』 2010년 겨울호)

 

「소래포구에서」는 이승희의 「부치지 못한 편지」와 마찬가지로 형태상으로는 산문시의 유형을 취하고 있다. 두 편의 화자 話者는 주관적 감정을 억제한 진술로 일관하고 있으나 「소래포구에서」가 보다 리얼한 현장성을 드러내고 있다. 현장성이라고는 했지만 정지된 풍경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갯골만 있고 강이 없는' , '갯벌의 퇴화'가 보여주는 부조리는 무엇으로부터 야기된 것인가? 경제성과 편리성에 길들여진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현대인의 탐욕을, 자연과 불통하는 인간의 몰염치를 아무렇지 않게 넌지시 고발하자면 얼마나 많은 내공이 필요할 것인가? 이 내공의 어느 자리에서 '소래포구'와 '부치지 못한 편지'는 분명히 소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집단의 이익은 개인의 권리의 포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풍경의 진술로부터 현실의 참담함을 드러내는 이태희의 문명비판은 암묵적 방관의 반대편에서 짐짓 긍정적인 풍경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서울역점 롯데마트에 설치된 식물공장,/'행복가든' 앞에서/나는 호기심에 장바구니도 내려놓은 채/통유리 속을 한참 들여다보았다/LED 인공 태양빛 아래 상추들이 자란다/ 한 포기 한 포기 하얀 스펀지에 뿌리를 묻고/ 무농약 재배시설에서 연두빛 이파리들이/ 키가 커지고 속이 차오른다/ 통유리 밖 진열대 위에는 원산지가 행복가든인 상추들이/줄맞춰 앉아 팔려나가길 기다린다/ 나는 야들야들하고 앙징맞은 그 상추가/ 선뜻 집어지지 않아 몇 번을 망설이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태양도 없는 유리 속 공장에서/ 벌레 먹은 흔적 하나 없이 상추를 어엿하게 길러냈다 / 이제 공장에서는 원하는 것 모두 길러내게 될 터,/ 나는 상처의 뿌리를 만져본다 / 하얀 스펀지에 의지해 초록 생명을 피워냈으니/ 희끄므레 가늘고 힘없어도 참 기특하다/

'행복가든'에서는 그렇게 쉬임없이 행복을 길러낼 터.

 

주경림의「 '행복가든'에서」(『시와 산문』 2010년 겨울호)는 문명의 혜택 앞에서 머뭇거리는 현대인의 심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먹거리 뿐만 아니라 인간조차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섬찟한 매커니즘을 '행복'이라는 위안으로 외면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 앞에서 망설이며 소비하는 존재 그 이상을 이 시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의 덕목은 위악적으로 극복할 수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불안하게 인공의 조명아래 싹을 틔운 상추를 먹을 수 밖에 없는 불안한 행복에 감사해야 할 우리의 처지를 고백하는데 있다.

 

소목장 산방, 갓 베어진 소나무가/빗물에 부은 속살을 헤치고/ 제 몸깊은 곳에서 나이테를 끌어 올린다// 바람과 햇빛에 부은 살이 빠지고/ 그늘에서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푸른 오기, 뒤틀린 마음을 내려놓을 것이다// 빠른 대패질에 스스로 몸을 바꾸는 나무/ 두터워진 영혼의 껍질을 부수려면/ 몇 번의 허물을 벗어야 하나/ 꿋꿋하게 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송진 내음이 남아있는 사원의 기둥에 기대어/ 내가 오래도록 서 있게 되는 이유는/ 영혼을 깎아내고 또 깎아낸 나무의 길이/환하게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김정임의 「유적」( 계간 『문학마당』 2010년 겨울호) 은 자연에 대한 방관적 위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쩔 수 없이 자연을 훼손하고 점령하는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소통하고 자연을 인간의 혈맥 속에 끌어들일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시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 소나무와 개별자인 인간의 운명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용 用과 불용 不用의 잣대는 누구의 것인가? 일찍이 칸트는 '개별자인 인간을 항상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 것'을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철칙으로 받아들일 것으로 요구했지만 그러한 도덕적 명령이 만인에게 수긍되고 수렴되기는 지난한 일일 것이다. "송진 내음이 남아있는 사원의 기둥에 기대어/ 내가 오래도록 서 있게 되는 이유는/ 영혼을 깎아내고 또 깎아낸 나무의 길이/환하게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는 시인의 토로는 이 세상에 절대적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장자 莊子의 사유를 얹으므로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시인의 깨달음으로서 시인의 독자에 대한 책무가 완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인에게 남은 책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를 통해서 또 하나의 질문을 시인 자신에게, 독자에게 화두로 남겨두는 일일 것이다.

 

■ 좋은 시와 나쁜 시

 

항간에는 '선정된 좋은 시'가 뿌려지고 있다. 유력한 매체와 권위를 인정받은 일군의 문학 종사자들이 가려뽑은 좋은 시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주제의 새로움이 도드라지는 시, 기법이 독특한 시, 보통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도의 추리로 무장한 채 무한정의 상상력이 증폭된 시들이거나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가 농축된 교훈적인 시들, 또는 이와는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노래로 불리울 수 있는 시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나 문학은 과학이 아닌 이상, 표준화된 잣대로 좋은 시를 가려뽑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좋은 시가 많은 만큼 나쁜 시도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면 그만일 것이다. 나쁜 시는 언어의 꾸밈을 축자적으로 상투적으로 사용한다든지, 논리성이 결여된 채 의미를 강요하는 감정나열의 시들이 될 것이다. 그래도 정말 어쩔 수 없이 좋은 시를 가려야 할 필요가 있다면 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절차탁마 切磋琢磨하려는 의지를 가진 시인, 말 재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아파하면서 갱신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시인을 찾는 일이 될것이다.

 

자주 다니는 푸나무에 집을 지었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구겨지길래/ 다시 허공에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여/ 촘촘하게 끈끈하게 얼기설기 엮었지/ 파닥거리는 것들, 파닥거릴수록 더욱 수렁에 빠진/ 함정처럼, 빠져나가려고 수단을 쓸수록 옭아지는/ 으뭉한 늪처럼, 몇 겹의, 몇 겹의 내 사랑/ 마침내, 당신과 나를 이 그물에서 걷어낸 손은/ 더 큰 하늘, 우리가 미쳐 볼 수 없었던 힘/ 오늘, 스산한 바람에 벌레 울음만 걸려드는,/ 온 힘을 다하여 촘촘하고 끈끈하게 짰던 그 그물/ 홀로 흩어지고 홀로 흩날리고 있네

 

진란, 「거미줄」, 전문 (『시와 산문』 2010년 겨울호)

 

앞서 언급한 김정임의 「유적」과 「거미줄」은 다같이 자연 현상의 세밀한 관찰로 부터 삶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유적」이 자연의 속성을 빌어 자아의 성숙을 발현하고 있다면 진란의 「거미줄」은 자연의 위력 앞에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인공의, 관념의 허무를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 노래가 되는 시는 어떤 사람에게도 위안이 된다. 밥이 된다. 붓끝에서 만들어진 인공의 문자가 관념의 딱딱한 외피를 벗고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아픔과 고통이 버무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가인 歌人이 사라지는 시대에 기꺼이 형극의 길로 나서기를 바라는 시인이 얼마나 될까?

파란만장한 생을 마약중독으로 40대에 마감한 빌리 할리데이 Billie Holyday의 「이상한 열매」를 듣고 싶은 날이다.

 

 

 

 

   <<시와 산문>> 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