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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교의 시>젖음, 생명의 근원을 묻는 고통의 숙고熟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1. 4. 10:03

                                                                  젖음, 생명의 근원을 묻는 고통의 숙고熟考

 

                                                                                                                                                                - 이경교의 시

                                                                                                                                                                                               나호열

 

 

  이경교 시인을 만난 것이 삼년 전쯤일까? 내가 잠시 몸담고 있던 문학회의 초청 강연자로 짧은 해후를 했을 때, 그의 단호한 어조와 형형한 눈빛에 놀라고,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단련이 무엇인가를 그는 이미 알아채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같은 해에 같은 잡지로 등단을 하고 또 몇 년 간 함께 동인활동을 해왔다는 인연으로 만났다가 각기 자신의 길로 걸어갔던 이십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친밀함(?)이 퇴색하지 않았던 것은 『이응평전』(1988), 『꽃이 피는 이유』(1990), 『달의 뼈』(1994), 『수상하다, 모퉁이』(2003)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잊지 않고 보내준 그의 시집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서정과 어우러지는 비감悲感, 쉬임 없는 언어의 담금질에 투영된 그의 시에 대한 인상은 그와의 연대감連帶感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지루한 장마가 주는 눅눅함과 폭염에 속수무책인 몸처럼 그의 시 앞에 나는 무력하게 서 있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 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현)는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화두로 삼아도 됨직한 원초적 질문에 아직도 명확한 답변이나 창작의 방법론을 내놓지 못 하는 나의 게으름에 비해서 이경교 시인의 내적 분발은, 이미 단호한 어조와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쓴다’는 행위는 어쩌면 한 번 사랑함으로써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수펄의 생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침이 닿는 자리마다 꽃은 꿀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나의 시도 꿀 같은 생의 정수가 되길 희망하며…”(시집 『ㅇ평전』 자서)와 같은 첫 시집을 엮으며 정의했던 그의 시관詩觀이 「전환, 하이퍼, 파괴」(『문학과 창작』, 2002. 7.)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명되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아직도 그들은 확실성에 익숙하며, 중심과 주변, 주와 객을 따지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면 남이거나 적이라는 편협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대, 질서를 무질서로 전환하는데 인색한 세대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사유의 한계, 상투적인 이념의 한계, 안일과 나태로 함몰된 철학성, 낡은 감수성, 고갈된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치열성이 사라진 자리엔 실험의식이나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기성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여기 있다.

 

 

 시관詩觀이라고는 했지만 그의 첫 시집 자서自序나 평론에 드러난 견해를 ‘시의 정의’로 받아들이기는 성급한 것이다. 시의 정의는 잠시 뒤로 물려두고 ‘시’라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앞에서 그 그림자를 어떻게 포획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간(시인)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언명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성을 찾아내려는 도구로써의 시에 대한 인식과 정체되지 않고 부단히 변화해가는 의식의 분발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의 진리관에서 보면 삶의 진정성은 이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불변의 이데아이다. 그런가 하면 기성문인에게 촉구하는 관습과 일상성으로부터의 탈피는 프래그마티즘Pragmatism이 즐겨 주장하는 진리의 가변성을 함의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에 부딪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에 대한, 인간과 문학에 대한 일관적 태도가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야 한다는 창조성과 과연 행복하게 융합할 수 있는가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순은 이경교 시인의 시를 일별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이고 시인 이경교가 지향하는 진정한 삶과 창작의 방법론을 규명하는 열쇠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한 권의 시집도 아니고 삼십 년에 가까운 창작활동 끝에 태어난 수 많은 작품에서 대표작 몇 편을 고르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것도 시인 스스로에게 내민 선택권은 가혹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그런 편집자의 주문에 시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지만 아마도 시인에게 망설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고른 다섯 편의 대표작은 모두 『수상하다, 모퉁이』 (2003)에 수록된 시들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수상하다, 모퉁이』 이전의 시들을 과감하게 파기했던 것일까? 혁신과 파괴의 시학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지난 시절의 섬세한 서정과 지사적 시풍을 일거에 버리기에 시인으로 첫 출발을 할 때의 “나의 침이 닿는 자리마다 꽃은 꿀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는 결의는 너무도 강렬하지 않았던가?

 

  필자의 억견일지 모르지만 그가 골라 뽑은 대표작은 독자가 뽑는 대표작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시집들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최근의 작품들보다 초기의 작품들에서 더 큰 감동을 받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정서의 농밀함은 여전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나 신작시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깊은 은유보다 더 묵중한 상징의 숲이 시의 전편에 깔려 있는 까닭에 감상 차원의 시를 읽는 사람들이나 난해시를 비판하며 쉬운 시를 지향하는 시인들에게는 까다롭기 그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경교의 시는 최근에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이는 근거 없는, 좌충우돌의 우연적 상상력에 기대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시는 탄탄한 논리적 구성과 즉물화된 관념을 배제하는 독특한 시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땅거미 지는 이 시각, 밀려오던 어둠이 일순 정지하였다

까마귀 한 마리 잿빛 마을을 가로 질러 날아간다

무슨 빛깔의 소리에 이끌려 지구가 기우는 순간

나는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선 어둠을 예감할 때가

진정한 어둠이다

어둠이란 언어까지 지워버린 뒤 찾아올 밤은

어둠이라 말할 수 없다

까마귀의 날개짓마저 켜버릴 것이므로

하지만, 아직 입술의 윤곽 희미하게 남아있는

저물녘 안개 다리 끌며 내 앞을 스쳐갈 때

죽음이 들불처럼 번지는 저 소리

어둠을 한 발 앞서 맞이하는 이 순간

이제 나는 다리 위에서 곱게 지워져야 한다

아니, 까마귀와 함께 잊혀져야 한다

등 굽어 발 밑 푹푹 꺼지는 아버지*

나는 지금 그 분께 가고 있다

 

아버지는 아니 계시다!

봉분의 흙도 마르지 않은 저 어둠 속 어디

검은 꽃잎만 화석이 된 이 길

 

 

 이 시는 『수상하다, 모퉁이』에 수록된 「어둠, 길 화석」이라는 시이다. ‘인물시의 유형’이라는 강의 자료로 이 시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을 때의 난감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시의 말미에 주석으로 붙어 있는, “*이우목(李愚穆 1925~1998). 역사에 등재될 수 없는, 이름없는 농부로 평생 살았다. 일제의 징용에서 탈출하였으며, 1950년 인공군에 편입되었으나 다시 탈출하였다. 그래서 그는 질곡의 우리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를 증거한다.”는 설명으로도 시의 요의를 체득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매헌이라든가, 매천이라든가 하는 우국지사나 역사적 인물을 시화詩化하거나 부모와 같은 피붙이에 대한 회억을 토로할 때의 과잉된 정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시집 『달의 뼈』(1994) 말미에 시인은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상처하고 새 장가를 들었는데 인공군에 징집되어 가는 도중에 옻나무 잎으로 용변을 처리한 탓에 옻에 옮아 대열에서 격리되어 탈출하였다고 한다. 시인은 「역사의 비碑」에서 아버지의 일화를 소개한 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시대의 평온과 무감각, 고민을 상실하고, 연민이 사라진 시대는 태평성대도, 감수성의 시대도 아니다. 본질을 잊은 채 껍질에만 급급한 삶을 문화란 미명으로 위장하는 그 허위를 나는 거부한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해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방식으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태도를 이해할 때 이 시는 형체를 드러낸다.

 

 

 지구의 흔들림, 어둠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거대한 법칙이다. 인간은 이곳과 저곳─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이항 대립은 무수히 존재한다─을 이어주는 다리에 서 있고, 기억 속의, 현존하지 않는 아버지, 검은 꽃잎으로 표징되는 어둠의 화석으로 영원히 역사에 등재될 수 없는, 이름없음으로 남는다. 「어둠, 길 화석」은 필연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무상함을 직시하면서도 어둠에 동화하지 않고 차라리 화석이 되어버리는 장삼이사의 적멸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경교 시인의 시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이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그러나 결코 본질 자체를 정의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내포한 채 항해를 거듭하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 그가 내놓은 대표작이 가장 최근의 시편이라는 사실은 그가 이전의 그의 시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이전의 시들은 시인의 삶의 지반으로 침강沈降함으로써 기꺼이 새로운 시들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근거를 갖게 된다.

 

 

 이 세상에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답고, 훌륭하며, 감화와 교훈을 주는 시들이 있다. 읽히지 않는, 기억되지 않고 노래로 불리지 않는 시들은 얼마나 허망한가!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시를 전파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눈치를 본다. 새로움의 충격을 선사하기 위하여 일탈과 이른바 상상이라는 모험적 사색을 거듭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사상에 입술을 대고 달콤한 액즙을 빨아들이는 시인들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학學은 넘쳐 나는데 습習은 찾아보기 힘든 세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란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난 후의 행위는 기교에 빠지기 쉽다. 한 생애를 통해서 시인은 시를 써가면서 시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친구들의 내왕마저 뜸해진 서울 변두리의 달 밝은 밤에 나는 닫혀진 것의 소중한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달팽이나 올빼미, 마늘이나 양파, 그리고 달의 뼈는 그 속에서 만난 사물이거나 관념들이다. 이제 어떻게 궁핍한 현실을 넘어 내 속내를 다스리고, 정신의 속살 깊은 곳 까지 다가가는가 그것이 문제다. 나는 그지없이 외로우므로 행복하다.(『달의 뼈』)”는 격절의식은 시작 행위의 목적을 온전히 영혼의 청결성을 찾으려는 열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경교 시인은 첫 시집 『이응평전』의 평설評說에서 시를 읽는 기쁨이 시 속에 내재된 영혼의 청결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발견하지 못한) 영혼의 청결성을 시에서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영혼이 청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의 다양한 해석만큼이나 영혼의 청결성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영혼이 청결해야 할까? 아니면 영혼의 청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일까? 그도저도 아니면 시인과 시와 영혼의 청결성은 아무런 연관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컨대 이경교 시인이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온 정신적 기반은 영혼의 청결성을 찾기 위한 시 쓰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회적이고 창 없는 모나드의 운명을 지닌 개체의 고양高揚이 이경교 시인의 덕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이 피는 이유』에 수록된 산문 「삶의 흰 뼈에 이르기 위하여」에서 시인은 만해를 가장 존경하고 만해의 정의감과 ‘석가도 본래 보통사람’이라는 말씀을 각인하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시 쓰기는 투철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시 쓰기의 수련을 통해서 영혼의 청결성은 물론 정체불명으로 뒤로 돌려 놓았던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내보이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응평전』의 평설評說이 이경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꽃이 피는 이유』의 서문으로 재수록되고 있는 것에서 시인의 태도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체를 바탕으로 시의 방법론으로써 용用의 문제는 이경교 시인의 체험적 시론에서 ‘감응’의 시작법으로 드러난다. 즉, “시인이 오브제를 선택하는 행위는 시인의 감수성 속으로 대상을 끌어들여 적시고 건져내는 행위”로 규정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광포한 상상력의 폐해를 지적한 바도 있지만 그것은 상상력의 발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근거를 물을 때 파생되는 문제이다.

 

  시인에 따르면 대상의 변형과 재조합은 마음의 감동, 즉 침례浸禮가 행해졌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사물, 현상, 대상과 시인의 정신이 혼연일체가 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기계적 의인화가 아닌, 진실한 말 트기가 되기 위해서는 고독을 인내하는 영혼의 청결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과정을 필자는 젖음의 시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근대적 이성의 이분법적 분해가 아니라 사물과 정신이 서로 젖고 적시는 과정(감응)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을 함유하고 있다. 서로에게 생명을 건네는 은밀한 내통이야말로 이경교 시인의 시를 상징의 크나큰 품으로 이끄는 통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나호열 /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외 8권이 있고,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2005년 녹색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 『시와산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계간 <<시와 산문>> 시인조명으로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