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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용의 시>정체성에 대한 진솔한 물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1. 12. 17:44

정체성에 대한 진솔한 물음

 

                                                                 

                                                                                                                                                               - <김금용의 「고구려의 바람」연작시>

 

                                                                                                                                                                                                       나호열 ( 시인)

 

 

 김금용 시인의 신작 소시집 다섯 편은 얼핏 보아 연작의 형태를 취한 기행시 紀行詩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고구려의 바람'이라는 시제 詩題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역사적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면서 조우하게 되는 사람들과 함께 빚은 이야기인 것이다. 고구려라는 이미 사라져버린 나라와 그 고토에서 다른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조우는 어떤 의미로 형상화될 수 있을까?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명확하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연작으로 쓸 수 밖에 없는 당위성과 의도를 제대로 짚어내고 이것들이 어떻게 행복한 접점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짚어내는 것이 이 글의 중요한 관심 사항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익숙한 듯 하지만 그만큼 불분명하게 통용되고 있는 '기행시'의 특성에 대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김금용 시인의 「고구려의 바람 」연작은 기행시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 말은 김금용의 이번 시편이 흔히 보아온 기행시가 극복하기 힘든 난관을 거리낌 없이 돌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별성을 가진 독특한 빛깔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오래 전 필자는 「기행시, 그 재미와 함정」라는 글에서 수다한 기행시가 실패하는 몇 가지 요인을 분석한 바 있는데 김금용의 「고구려의 바람」연작은 그와 같은 난점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이유를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 째, 새로운 풍물에서 빚어지는 경이로움에 함몰된 나머지 스냅화된 감상의 분출과 단순한 묘사에 그칠 우려를 불식하고 있고, 둘 째 대상을 오래 관찰할 수 없는 까닭에 대상을 육화 肉化할 시간의 제한이 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기 쉽지만 다섯 편의 시들이 골고루 현장성과 진정성을 담고 있다는 점, 즉, 영상매체의 발전, 즉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음향이 수반되는 동영상이나 사진이 가진 리얼리티의 재현을 문자매체가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을 숙련된 수사로 극복하고 있다는 점, 셋 째, 교통수단의 발달과 경제력의 증대로 관광과 여행이 일상화되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독자들에게 추체험의 깊은 울림을 주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점인데 이를 오늘에 당면한 우리의 문제로 다시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금용의 시편은 기행시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이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시인이 대만을 비롯하여 북경, 청도, 심양에서 10여년을 살아온 까닭에 중화권 中華圈의 외양보다는 그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남다른 근기를 지니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 째로 왜 시인들은 연작시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연작連作은 개별적 작품들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마치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이 제 나름대로의 음색을 지니고서 거대한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연작의 각 편들이 궁극적으로 시인이 의도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 의식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각각의 조각들이 빈틈없이 제 자리를 찾아감으로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퍼즐과도 같은 원리를 가지기 때문에 연작시가 종결되기 전에는 그 성패를 가늠할 수 없다는 즐거움(?)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김금용 시인은 이번에 발표하는 다섯 편을 포함하여 열 편의「고구려의 바람」연작시를 생산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미 발표한 연작시들과 이번에 발표하는 시들을 개별적으로 분리해서 읽지 않고 서로 연계해서 읽어 본다면 시인이 의도하는 맥락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구려의 바람」 연작은 그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이었던 만주 땅이라는 공간을 날줄로 삼고 만고성쇠를 거듭했던 민족사를 씨줄로 삼고 있다. 심양 땅에 살고 있지만 시인은 이방인임에 틀림이 없고, 이방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유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나라 이름은 바뀌었으되 모국어를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은 동포가 산재하고 있는 고토의 의미를 곰삭여 보는 작업이 이번 「고구려의 바람 」연작시로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미 시인은 여러 지면을 통하여 다섯 편의 연작시를 발표하고 있는데 그 작품들이 중원 고구려비(충주), 여순 감옥, 백암성, 심양 서탑 거리, 집안 국내성터 등의 현존하는 공간을 배경으로 명멸했던 패배한 민족사를 회고하고 있다면 이번의 연작시는 바로 오늘, 남의 나라가 되어버린 그 땅에서 여전히 살 부대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명함으로서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면서도 아프게 부딪치고 있는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와 달리 이번 연작시의 부제로 등장하는 '평양관 복무원 아가씨', '조선족 리문호 시인', '개성댁 시엄마' 와 같이 현존하는 실제인물들과, 요녕성 동포들의 한가위 풍속을 통하여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정신적 유대감을 표출한 「고구려의 바람. 9」에서는 이산 離散의 신고 辛苦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전자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바람」연작시를 통하여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문제를 성급하게 예단한다면 첫 번째 문제는 인류사를 얼룩지게 했던 땅을 둘러싼 쟁탈과 그 쟁탈로부터 빚어진 이산의 문제이며 두 번 째 문제는 이 이산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는 개인들의 정체성의 문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디아스포라diaspora 즉 이산 離散의 문제는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자국 내 떠돌이 집시들을 추방함으로서 야기된 갈등에서 보듯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자민족 우월주의로 말미암은 분쟁과 살육은 일상화되어버린 인류사의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이른바 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동포들은 디아스포라이기는 하지만 보다 복잡하고 특수한 환경에 놓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명히 그들은 남의 나라 땅에 사는 소수민족이지만 정신적인 뿌리는 그 옛날 고구려나 발해와 같은 원주민의 의식에 강열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6.25 전쟁과 남북의 분단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복합적 디아스포라의 양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땅이었다가/ 독립군 활동이 뜨겁던 봉천이었다가/고국은 한국이나 조국은 중국이라는 /조선족 거리에 북한 사람과 탈북자까지/ 뒤섞인 한국 교민의 거리 ..(중략) 모국어 하나면 다 통하면서도 /중국인인 척, 한국인인척, 조선족인 척/북한인은 모른 척 아닌 척 -「고구려의 바람. 4」 부분에 묘사된 바와 같이 주체성의 상실identity crisis은 단지 우리 민족만이 극복해야할 난관만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카프카는 소설「변신」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실존의 문제를 제기했다. 엄밀히 말해서 주체성은 정체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내가 어떤 특성을 가진 존재인지, 그 뿌리가 어디인지를 인식하는 과정이 정체성의 형성내용이라면 그러한 토대 아래 타자와는 다른 자아를 개인적, 집단적으로 수렴하고 정립해 가는 과정이 주체성의 과제인 것이다. 즉 사회성의 내면화가 정체성의 문제라면 개별적 존재가 사회화 하는 과정이 주체성의 문제라고 정의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 세기 전에 카프카가 던졌던 질문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살아 있다는 것의 존재론적 증명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였다. 카프카 자신이 유태인의 혈통을 가진 까닭에 죽을 때까지 벗어던질 수 없었던 복합적 양상의 디아스포라의 불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이나 요즘 다시 대두하게 된 중화주의의 확산은 패권주의의 양상을 띄면서 소수의 디아스포라에게 동화와 복속의 외길을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맞서서 범인류적인 대안이 꾸준히 모색되어 온 것도 서실이다.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똘레랑스 tolerance 라는 이상적인 관념을 실천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로부터 빚어지는 우열의식을 무너뜨린다면, 역지사지 易地思之의 관용정신은 이 세계의, 국가 간의, 민족 간의 불신의 장벽과 갈등의 철조망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양방의 조건 없는 양보나 화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 타자에 대한 조건 없는 양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한갓 허망한 구호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똘레랑스의 이데아인 것이다. 똘레랑스가 이데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의식화된 자아로부터 이행되어가는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정체성으로부터 숙성되어지는 건강한 주체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시인은 바로 이 점에 대한, 똘레랑스의 개화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번 「고구려의 바람」연작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작업에 힘을 쏟고 있는 듯 보인다. 이국 땅 평양관 냉면집의 종업원이 시공을 넘어서 서울 무악재 너럭바위 틈에 핀 진달래와 같다거나 -「고구려의 바람. 6」, 중국 땅에 살지만 이남사람의 서정시를 좋아한다는 조선족 시인의 토로를 전하거나 -「고구려의 바람. 7」하는 동질성의 근거 확인은 다같이 민족의 얼을 잊지 않게 만드는 한국어라는 매개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마움을,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모국어의 살겨움을 잊어버리고 산다. 모국어를 잃어버리게 될 때 급기야 혈통적 주체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고구려의 바람 .8」은 시어머니가 중국 땅 심양에 온 이후로 자폐에 빠진 상태를 묘사한다. 왜 시어머니는 시인이 거주하고 있는 심양 땅에서 일곱 살 어린아이가 되어버렸을까? 그 이유가 건강의 악화로 인한 치매증상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시 속에 감추어진 상징은 낯 선 타국이라는 공간적 폐쇄성이 가져오는 언어의 불통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된다. 언어는 정체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이다. 어디에 살든 모국어를 잊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과연 그럴까? 이미 발표했던 다섯 편의 시와 이번 신작 소시집으로 발표한 다섯 편의 시를 조감하여 볼 때 조금씩 희미하게 드러나는 시인의 의식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다.

 

자아를 성찰하고 주체성을 굳건히 하면 할수록 당면하는 삶은 더욱 더 고단해지고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서는 동화 同化의 길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우리의 얼 속에 간직해야할까?

 

우리는 이미 다문화의 시대 한 가운데 들어와 있다. 세계화라 일컬어지는 혼혈과 혼융의 문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다. 소통의 구호가 아무렇지 않게 거리에 나부끼고

의식의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다. 그렇다면 웅혼했던 고구려의 옛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이라 불리우는 동포들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굶주림과 학정 虐政을 피해 탈북자로 불리우며 도피와 유랑을 거듭하는 사람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똘레랑스와 민족의 동일성은 어디서 만나고 어디에서 헤어지는가?

 

다시금 카프카를 생각한다. 그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골 삼사는 어느 날 독충으로 변한다. 그리고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부모와 누이를 부양하던 착실한 한 사내 그레골 삼사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독충으로 변해버린 아들을, 오빠를 종국에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그레골 삼사의 가족들이, 수많은 타자 他者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고 삼사의 주인공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체로서의 동일한 속성을 유지한다는 전제가 가능할 때만이 진정한 삶, 즉 실존이라면 우리는 감각적으로 살아 있어도 그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없고 오직 타자에 의해서만이 자신의 실존을 확인 받을 수 있다. 시인이 묻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시인이 일관되게 각 시편의 마지막에 던지는 발언은 그래서 먹먹하기 이를 데 없다. 중국 심양 땅에서 만나도 / 서로에 대해 물을 것도 없이/ 딱 그만하다/ 더도 덜도 없이 딱 그만하다 - 시 「고구려의 바람. 6」,함경도 이북이 고향이지만/ 이남사람의 서정시를 좋아 한다며 하는 말씀이다 -시 「고구려의 바람.7」 , 압록강 건너 신의주 아래 개성을 가늠할 때만/ 제비꽃반지를 끼고 사진모델이 될 때만/ 함박꽃이 되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시 「고구려의 바람. 8」,송편 솔향이 이웃 중국집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 시 「고구려의 바람. 9」에서 드러나는 바대로 길게 묻지 않아도 같은 핏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까닭은 언어와 풍습의 동질성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김금용의 시들이 단지 같은 핏줄의 확인이나 감상의 전달에 그친다면 이미 수없이 보아온 기존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의 확인에 그치고 말 것이다. 김금용의 이번 연작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수와 소수의 문제, 동일성과 타자성의 문제를 정체성이라는 큰 개념으로 재정의 해보려는 노력, 이 노력의 당위성을 다시 되묻는 작업으로 이해할 때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사회』에서 "예술이란 구체적인 사실에 의하여 실현되는 하나 하나의 가치들에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그 사실들을 배열하고 정돈하는 선택작용이다. 예를 들면, 노을진 저녁 하늘을 잘 보려고 몸이나 눈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간단한 예술적 선택작용이다."라고 하였다. 김금용의 「고구려의 바람」 연작시는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 관찰의 사실성을 확보함으로서 공감의 진정성을 성취하려는 숙고의 과정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길을 묻고 있다'는 있다는, '한민족의 앞날을 묻고 있다'는 「고구려의 바람. 10」은 단지 시인만이 던지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지향하고, 다문화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우리 모두에게 되묻는 숙제일 수 있다. 과도한 복고주의와 맹목적 민족주의가 어떤 말로를 향해 갔는지 우리는 역사의 궤적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역사의 순환성보다는 진보적 발전을 희망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숙고는 중요한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김금용의 「고구려의 바람」연작은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천착이 되지 않을까 하는 궁금함과 희망을 감히 예상해 보면서 더욱 다채롭고 흠리로운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980년 『우리함께 사는 사람들』로 작품활동 시작 이후 『월간문학』 신인상과 『시와 시학』중견시인상을 받음.

prhy0801@khu.ac.kr

 

  계간 <<미네르바 >>2010 겨울호에 게제